<68화>
“공. 다음에도 이러신다면, 제게 무례를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는 전하의 앞에서 드리는 약속입니다.”
엘렌이 차오르는 숨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러든지.”
엘렌의 선전 포고에도 길리언은 덤덤했다.
그 반응에 그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던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것은 역시나 케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자네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 보게 되는군.”
“저 또한 전하의 새로운 모습을 자꾸 뵙게 됩니다.”
“그러게 말이야. 어쩌다 자네와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저는 알 것도 같습니다.”
길리언은 엘렌을 한 번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변하셨으니까요.”
네가, 너 따위가 내 것을 자꾸 빼앗아 가려 탐을 내니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이어진 말소리에 끊겼다.
“아니. 모든 건 당신에게서 비롯된 거예요.”
엘렌이 말했다.
그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주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말아요.”
하지만 길리언은 엘렌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것도 엘렌이 먼저 제게 말을 걸자, 그것이 저를 적대하는 말임에도 괜히 가슴이 콱 붙잡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홀린 듯 엘렌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말했다.
“……새겨듣지. 노력하겠어.”
“아니요. 아무 노력도 하지 마세요.”
엘렌이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저 다신 엮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네가―”
길리언이 입을 열었다.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래서 찬성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관심 없습니다.”
“여성 작위 계승법을 말하는 거다.”
“공의 투표권 행사에 저를 이유로 가져다 붙이지 마시지요. 불쾌합니다.”
“그게 사실이니 그리 말할 뿐이다. 불쾌하다니 유감이군.”
그러자 엘렌은 하, 하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공께서는 이적을 결심하시지 않는 이상 어차피 동의하셔야 하는 법안 아니었나요?”
그녀가 싸늘히 쏘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은 제발 부탁이니 그만 늘어놓으세요. 그럼.”
엘렌은 그 말을 남기고, 일행들을 이끌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 *
페리윙클 부부는 날벼락을 맞은 기분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게 대체…….”
백작이 허망하게 중얼거리자, 페리윙클 부인이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우리 밀러는 어쩌면 좋죠?”
“지금 밀러가 문제요?”
백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당신은 애가 그러는 걸 알고 있었소?”
“그러는 거라니요?”
“아카데미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딴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걸 말하는 거요!”
“알았으면 제가 뒀겠어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뭘 한 게요!”
“이게 지금 저만의 문제인가요?”
그렇게 부부는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싸웠다.
그런데 저택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들을 마중 나온 집사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그는 오늘 저택에 도착한 소식들을 전달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페리윙클 백작은 식겁해서 외쳤다.
“중앙 거래소에 저희 가문과 관련된 채권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는 건 그만큼 널리 유명한 사건이 있었거나, 누군가가 일부러 저질렀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질 않는데, 그만한 원한을 가질 사람이…….”
집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 냅다 화를 내려던 페리윙클 백작이 잠시 멈칫했다.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크라이언트?’
근래 저희에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
돈과 시장을 이용해 복수할 만한 사람.
그때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크라이언트가에서 온 전령이라는데 어찌할까요!”
멀찍이서 문지기가 집사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할까요?”
“……들이게.”
백작의 지시를 들은 집사가 소리쳤다.
“이리 들이게!”
문지기들은 도착한 전령을 들여보냈고, 전령은 그대로 뚜벅뚜벅 그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 들어와 백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됐고, 가져온 거나 주게.”
그러자 전령은 제가 품어 온 편지를 건넸다.
후작은 그 자리에서 대충 봉인을 뜯고는 봉투를 열었다.
<선물은 잘 받으셨는지요?>
페리윙클 백작은 그대로 손 안에서 편지를 와작, 구겼다.
“으아아아아―!”
* * *
“엘.”
“누님!”
정양을 마치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엘시어가,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렌을 반겼다.
“어떻게 됐습니까, 누님?”
“고생 많았구나. 덕분에 깔끔하게 끝났다.”
“어떻게 됐는데요? 제게도 생생하게 설명해 주세요, 누님!”
엘시어가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못내 궁금한지 그녀를 조르며 달려들었다.
엘렌은 이것 봐라, 하며 제 동생을 한 번 흘기다, 마지못해 웃으며 말해 주었다.
“아주 주저앉아서 엉엉 울다가 끌려 나갔다.”
“아, 조금 더 자세히요!”
“잠시만요! 잘못 됐어요! 하는 소리만 죽어라고 외치다가, 결국 주저앉더니 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양팔을 결박당해 끌려 나갔다.”
“오, 멋져.”
엘시어가 두 손을 모아 말했다.
“그 자식 꼬락서니를 봤어야 하는데.”
그는 신이 나서는 말했다.
“누님이 최고예요. 저도 누님처럼 되고 싶어요. 짜릿해. 최고라고요.”
“코엔하임 경이 들으면 서운해하겠구나.”
“경은 경이고 누님은 누님이죠! 코엔하임 경 같은 기사가 돼서, 누님 같은 수완가가 되어 가문을 이끌 겁니다!”
엘렌은 그런 제 동생을 물끄러미 보다가, 곧 미소 짓고는 말했다.
“그래. 부디 좋은 가주가 되렴.”
* * *
크라이언트.
요즘 들어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름이 되었다.
“크라이언트가 영주 가문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무슨 소린가?”
“후계자가 황궁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더군. 크라이언트가 고발했다던데.”
“나도 그 얘기는 들었네. 그런데 그런다고 몰락이라고까지 하나? 양자를 들이면 그만이잖나.”
“아니. 돈이 없다던걸?”
“엥? 우리 영주 가문이? 설마.”
“아니야. 정말이라더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뭐 하던 일의 돈이 완전히 끊긴 모양이야. 그대로 쪽박 찼다더군. 그것도 크라이언트의 소행이라는 말이 도는 모양이야.”
“맙소사. 그러면 우리 영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미친 듯이 세금이 걷히든지, 황실로 반납되든지 둘 중 하나겠지.”
“안 돼!”
그 이야기를 듣던 한 남자가 벌떡 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세율도 힘들어. 다 같이 죽어 가는 중인 것 안 보이냐고!”
“나도 알아. 그런데 높으신 분들이 우리 같은 작부들의 속을 알아주겠나?”
그러자 턱을 괴고 한참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말했다.
“차라리 다른 영지로 떠나 버리는 게 방법일 수도 있어.”
“그래. 다른 부유한 농업령이나, 다른 공업령들…….”
일어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의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크라이언트 같은?”
“그런 곳에서 우리 같은 이들의 이민을 받아 주나?”
“거긴 공업령이잖아. 광산도 있지 않나? 항상 필요한 게 노동력일걸.”
“하지만 너무 멀고 추워. 난 어머니까지 계셔서 그렇게까지 갈 수가 없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말했다.
“내가 한번 알아볼 테니, 다들 한번 생각이나 해 보라고. 나라고 혼자 생판 모르는 영지에 가서 시작하고 싶지는 않으니.”
그들은 신흥 강자, 크라이언트령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흩어졌다.
* * *
“전하! 제발 도와주십시오!”
페리윙클 백작이 소리쳤다.
그는 털썩, 크레센트 집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흥 강자라.”
그런 그를 바라보던 크레센트가 말했다.
“한때는 그대가 듣던 소리인데. 그렇지?”
“전하. 부디…….”
“언젠가부터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싶긴 했어.”
크레센트는 들고 있던 담배를 지져서 껐다.
“우리도 우리만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했잖나. 그래서 수금을 하는 것인데.”
그는 백작이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런데 수금도 제대로 못해, 그렇다고 무언가 획기적인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럴 능력이 있는 패를 데려오려 했더니…….”
크레센트가 들고 있던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그걸 이렇게 망쳐 놔!”
쨍그랑!
“내가 너 따위를 상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당장!”
“그, 그것이…….”
“날 여기서 설득하지 못하면, 페리윙클가의 말로는 크라이언트를 낚아 오기 위한 미끼가 될 테니 그리 알고.”
그러자 페리윙클 백작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곧장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저, 전하.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제가 반드시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많이 모금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한 번?”
“예.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무슨 도움을 바라는지도 이야기 않고는 무작정 도와 달라고만 하나?”
“제 아들의 재판과 당장 융통할 조금의 지원만…….”
“아하.”
크레센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전보다 더 가문을 불릴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는 다시 담배를 찾아 커팅용 가위로 끝을 잘랐다.
탁탁. 성냥을 켜 불을 붙인 그가 담배를 깊게 들이켰다.
“후우.”
크레센트는 제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백작을 보며 말했다.
“알겠으니 가서 한번 열심히 해 봐. 마지막 기회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페리윙클 백작은 연신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크레센트의 집무실을 찾아오던 클라우디스가 뛰쳐나가는 백작과 마주쳤다.
그는 집무실의 문을 닫고 들어오며 물었다.
“정말 받아 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크레센트는 시니컬하게 손을 휙 흔들었다.
“저렇게 해 놔야 더 볼만하지 않겠어? 크라이언트 영애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킥킥 웃고는 후, 담배 연기를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