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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67화 (67/128)

<67화>

“자, 여기. 보이십니까?”

그녀는 시종이 갖고 온 클러치에서 준비되어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건…….”

“올리버 오스틴. 누구인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밀러 페리윙클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지만, 오늘 올리버 오스틴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 그 자리에 없었다.

다만 온 것은 오스틴 부부뿐.

“오스틴 부부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여기 적힌 서명은 진짜이니까요.”

팔랑, 엘렌의 손에 들린 서류에 이목이 쏠렸다.

[페리윙클! 페리윙클이 시켰어요!]

[페리윙클이? 어째서죠?]

[그는 전부터 소르본을 싫어했으니까요. 누구한테 물어보더라도 다들 알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그녀가 탈 마차에 미리 손을 댔죠?]

[잭 호르세가 마차 예약 장부에 메이 소르본이 예약한 기록이 있더라며 이야기를 했어요. 그걸 듣더니 테라 로이체와 밀러 페리윙클이, 그것을 이용해 한 번 제대로 혼을 내 주자고…….]

[좋아. 잘했어요.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는 비밀을 지켜 드리지요.]

아카데미에서의 그날.

올리버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망설이던 그는 적절한 보상이 약속되자 곧 자신이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고, 그것을 확인한 엘렌은 그의 증언을 받아쓴 종이를 내밀며 그의 서명을 종용했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서명하던 올리버의 모습까지 떠올린 엘렌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마지막입니다. 페리윙클 영식과 사이가 애매하거나, 협박이나 매수에 넘어갈 만한 틈이 있는 사람. 말해 봐요. 적중하면 그만큼의 보상을 추가로 얹어 드릴 테니.]

엘렌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좌중을 훑었다.

“……오스틴은 원래 내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 서명이 진짜라도 그 증언은 조작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밀러 페리윙클이 파들거리는 입가를 숨기지도 못하고 말했다.

“겨우 증언 하나라니, 크렘벨 공작 각하의 말씀에 비해서는 준비가 허술하십니다.”

그가 양어깨를 으쓱이며 제 뒤에 선 이들을 향해 말하자, 그들이 왁자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던 엘렌이 물었다.

“그러면 대체 증언이 얼마나 더 있어야 인정하시겠습니까? 누구의 증언이라야 신빙성이 있는 겁니까?”

“적어도 내게 적대적이지 않고 이 사건에 있어서 중립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지요! 나도 내가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증인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습니다.”

페리윙클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한 소년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한발 앞으로 나왔다.

“그래……. 잭! 잭 호르세!”

밀러 페리윙클은 그에 대한 신뢰가 상당했는지 곧바로 그를 지명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잭 호르세가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직접 행차하시어 진상을 밝히고자 하시고, 지금 제 앞에는 2황자 전하께서 계십니다. 이 앞에서 저는 절대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서론을 길게 깐 그는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부들거리는 손을 꽉 주먹 쥐어 숨기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밀러와 테라가 소르본, 아니 아발란쉬 후작 영애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어 그들의 주도하에 영애가 탈 마차에 손을 댔습니다.”

“잭!”

밀러 페리윙클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외쳤다.

“바퀴와 축에 손을 댔습니다. 그 마차에 크라이언트 영식이 함께 타면서 두 사람이 함께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 이건 무언가 잘못됐습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유명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계속해서 언성이 높아지고 소란스러워지자, 주요 인물들의 부모들과 그들의 친지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엔 페리윙클 백작도 있었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페리윙클 백작이 나타나 크레센트에게 물었다.

“글쎄. 영식이 크라이언트와 아발란쉬 암살 시도를 했다는데. 나야말로 묻고 싶군. 이게 무슨 일이지?”

“예?”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페리윙클 백작이 황망해져서는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밀러!”

그때 메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암살 시도. 참 적절한 말씀이십니다.”

그녀는 앞의 후계자 모임을 쏘아보았다.

“밀러 페리윙클과 테라 로이체. 저는 이 두 사람을 저, 아발란쉬가 후계자 암살 미수로 고발합니다.”

점점 사건이 커지자 주변에서 이곳에 아이들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로이체 자작, 호르세 자작, 오스틴 자작, 아발란쉬 후작…….

그리고 이 논의에 마침표를 찍어 줄 사람까지.

“시끌시끌하군. 아카데미 마차 사고가 후작 영애 암살 시도였다고?”

뒤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그에게 길을 터 주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이 사건에 대해 직접 조사를 명했던 황태자 케이든이었다.

“아니지. 정확히는 아발란쉬 후작 영애와 크라이언트 영식 암살 시도였지. 두 사람이 타고 있었으니.”

“아닙니다!”

밀러 페리윙클이 외쳤다.

“전하. 이것은 억측입니다. 제가 건드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만약 건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게 사고의 원인이라고 반드시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요인이 있었을지 어찌 확신한단 말인지요!”

“그 문제라면…….”

케이든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내게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가 나기 전날, 그전까지 마차의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고 하더군. 사고 전날과 당일 사이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가 없는 손상이라고 말이야.”

그러자 잭 호르세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네. 저희가 손을 댄 것이 사고 전날입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잭 호르세!”

아발란쉬 후작이 말했다.

“……그래. 아이들의 싸움이, 불이 옮겨붙듯 커지는 것은 금방이지. 그럴 수 있다.”

“…….”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그것을 충분히 반성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지. 물론 이 말도 천만다행히 메이가 아직 살아 있으니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잭 호르세가 재차 사과하자,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사과를 하는 놈은 적어도 제 잘못을 알고 반성을 한 것이겠지. 너희에게는 이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써 메이의 팔에 대한 금전적 배상만을 요구하마.”

호르세가는 미리 협의된 사항이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고 있다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끝까지 발뺌하는 놈에게까지 내가 자비를 베풀어 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

후작은 그리 말하고는 케이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밀러 페리윙클을 메이 아발란쉬 암살 미수범으로 고발합니다.”

“저 또한 밀러 페리윙클을 엘시어 크라이언트 암살 미수범으로 고발합니다, 전하.”

엘렌까지 나서서 말하자 정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페리윙클 백작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자, 잠깐! 저희에게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이리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어떻습니까!”

그는 절박한 눈빛으로 크레센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크레센트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와 엘렌 사이에서 저울질을 끝낸 상태였다.

“……글쎄. 적어도 저 수사에 관해서는 내게 권한이 없군. 형님께 말씀을 드리지 그러나.”

“전하!”

페리윙클 백작은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그를 보았으나, 크레센트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뭐, 더 끌 것 있나. 연행하지.”

“전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케이든을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케이든의 지시를 들은 후작이 명령했다.

“연행해!”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밀러 페리윙클을 향해 다가갔다.

“이건 잘못됐습니다, 잠시만요!”

“이보게! 잠시만 기다리게. 전하, 전하!”

페리윙클 부자는 연회장의 한가운데서 연행에 저항했고, 그런 그들을 구경하던 메이가 밀러에게 다가갔다.

제게 오는 기척을 느낀 밀러가 눈을 사납게 뜨고는 소리쳤다.

“넌 뭘 보러 오는 거야! 남들에게 기생해서 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계집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말을 못 가리네. 정말 수준에 문제가 있어.”

“뭐? 지금 네가 정말 우리랑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황제 폐하께서 직접 승인하신 법안을 한낱 백작가의 아들 따위가 부정하다니.”

메이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하, 지금 이자는 황실의 권한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듣고 있으니 걱정 말도록.”

케이든이 시끄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서 연행해.”

“전하!”

끌려 나가며 뒤를 돌아보는 밀러에게, 메이가 말했다.

“잘 가, 무능력자.”

* * *

한참을 저항하던 페리윙클 부자가 끌려 나가며 시끄러웠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고 나자 길리언이 다시 엘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번엔 네 자작극이 아니었나 보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엘렌이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시 제 옆에 와 있는 길리언을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한숨을 뱉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제발, 더는 제가 공께 무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이만 서로 모른 척 갈 길 가자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길리언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군.”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케이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못하겠어?”

그 소리에 마찬가지로 쏘아붙이려 준비하고 있던 스파니엘이 되레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전하?”

하지만 케이든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듯, 그는 계속해서 굉장한 어조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영애를 그렇게 열심히 찾았나?”

“죄송합니다. 부부간의 일을 아무렇게나 밖에 풀어놓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하여.”

“부―부―간?”

케이든이 말 사이를 늘이며 길리언의 말꼬리를 잡았다.

엘렌이 두 사람을 기가 막힌다는 듯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전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당신과 아직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야 하는 거죠?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언제부터냐고, 전하께서 옛일을 물으셨지 않나.”

“내가 아는 자네는 영애를 그렇게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만!”

엘렌의 외침에 케이든과 길리언이 입을 다물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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