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64화 (64/128)

<64화>

“이번 안건은…… 여성의 작위 승계에 관한 법률?”

회의실, 준비된 상자에서 서류 뭉치를 꺼낸 헤지스가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군. 발의자가 누구지?”

헤지스가 놀라운 척 물었다.

포트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스트힐 자작입니다. 그는 슬하에 딸뿐이나, 직계를 두고 어째서 방계 남성에게 작위와 영지를 양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해당 안건을 제시해 왔습니다.”

“흠. 확실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

헤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듣고 있던 트라이아 공작이 기가 막힌다는 듯 툭 내뱉었다.

“여성에게 작위 계승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그게?”

그는 허, 하며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들은 영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릅니다. 자작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이 안건을 그대로 받아 줘 제출한 포트 후작의 머리도 의심이 될 지경이고 말이지요.”

“권한이 없으니 배울 필요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소. 그런 것은 실시 전 말미를 조금 두면 될 일.”

포트 후작이 그 정도의 반박이야 가소롭다는 듯 받아치자, 트라이아 공작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온 가문의 계승권 서열이 뒤집히는 일이오. 후작은 지금 귀족 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싶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 소리는 아카데미 입학 허용 때도 똑같이 나왔었소.”

“말 돌리지 마시오, 후작.”

“말을 돌리다니. 결국 그래서 지금 아카데미 제도는 잘 정착하지 않았소? 잠시간의 혼란이 있긴 하겠으나 그것은 어떤 제도든 새로이 시작할 때는 동반하게 되는 진통이오. 당장 아플 것이 무서워 상처 소독을 않을 셈이오?”

“이건 멀쩡한 살을 도려내겠다는 소리지 않소!”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썩은 환부를 잘라 낸다고 표현해야지.”

“지금 폐하의 통치를 두고 썩었다고 표현한 것이오?”

“폐하의 통치 이전부터 내려온 구습을 두고 말한 거요.”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로크 후작이 끼어들어 배턴을 헤지스에게로 넘겼다.

“일단 폐하의 의중이 어떤지도 중요하겠지요.”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대로 진행하자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딱 그런 얼굴로 두 사람이 나란히 저를 바라보자, 헤지스는 혀를 쯧 차고는 말했다.

“선황께서 여성의 아카데미 입학을 허용하셨지. 분명 이런저런 염려가 많았던 정책이었지만, 지금은 여성들도 우수한 성적을 내며 졸업하고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이들도 생겨나고 있소.”

헤지스가 그리 말하며 슬쩍 길리언을 보자, 회의장에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엘렌 크라이언트.

“나는 지금이 또 한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아발란쉬 후작이 거들었다.

“……확실히, 구습에 갇혀 놓치기엔 아까운 인재들이 드러나고 있지요.”

“후작?”

그가 선뜻 찬성하고 나서리라 생각지 못했던 트라이아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바로크 후작이 말했다.

“……후작은 아직 후계가 없어 앞으로 닥칠 혼란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외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객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좋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헤지스를 향해 물었다.

“폐하. 그렇다면 그것은 황위 계승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말씀이십니까?”

“……!”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 늙은이가 한시도 방심할 틈을 주질 않는군.’

헤지스는 찌푸려질 뻔한 눈살을 간신히 참아 내고는 말했다.

“……그렇소. 당장 후계 수업을 받지 못한 이번 대는 무리겠지만, 다음 대부터는 그리할 생각이오.”

“그렇습니까.”

바로크 후작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 크렘벨 공과 헤이젤 후의 입장만 들으면 사실상 투표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군요.”

그러자 의견을 좀처럼 나서서 밝히는 일이 없는 헤이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전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에 한 표 던지지요.”

“남은 것은 크렘벨 공뿐이군요.”

길리언은 황제를 쳐다보았다.

내가 황제에게 받은 것은 모두 공중분해 되었는데, 이제 와서 뜻대로 해 줄 필요가 있나?

‘엘렌을 되찾으려면. 내가 다시 힘을 가지려면. 황자들을 밀어내고 내가 황위에 앉으려면. 그러려면…….’

[가능하다면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조금 더 넓어지면 좋겠네요.]

[갑자기 무슨 말이지?]

[아직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제가 불순분자니까요.]

[불순분자……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아직도 저는 제가 책임자임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게…… 그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러게요. 당연한 소리죠. 그러니 당신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거예요.]

하지만 방금,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 * *

“제기랄 놈의 늙은이들이 체력만 좋아서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봤나?”

케이든이 구시렁구시렁 욕을 갈겼다.

“그래도 계획하신 대로 풀려서 다행이지요. 양자일 경우, 남녀 모두 14세 이상일 경우에만 계승권이 인정된다는 것이었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 놓으면 소르본 영애는 무사통과다.”

“그러면 아발란쉬까지 포섭이 되었으니, 이제는…….”

테리어드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로 증거만 확실히 모으면 되지.”

“슈탓트펠트 경은 무언가 소식 없습니까?

그러자 케이든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중하긴 더럽게 신중해. 정말로 영애가 아니었다면 쉬이 파내지 못했을 거다.”

“그렇군요. 그래도 그것 또한 돈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지요. 이제는 활동을 그만하든지, 치밀함을 포기하든지의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시간문제야.”

그는 곧장 외투를 챙겨서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럼 다음 일정을 수행하러 가 보자고.”

그는 크라이언트 저택으로 향했다.

* * *

크라이언트 저택은 요 근래 계속 분주했다.

가문 영식의 사고에, 떠맡게 된 환자에,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는 손님들까지.

그런데 오늘은 한술 더 떠서 정계의 거물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웬 삯마차가 들어온다 했더니 아발란쉬 후작이고, 느닷없이 달려온 마차는 황실 마차다.

문지기들은 몇 번이고 깜짝깜짝 놀라야 했고, 그 행렬의 마지막 주자는 소르본 백작가의 마차였다.

“백작. 오셨습니까.”

“메이의 이야기로 전할 말이 있다니 갑작스레 무슨 일이오?”

백작은 내리자마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엘렌에게 물었다.

“혹시 손을 영 쓰지 못하게 되었소? 모양이 흉측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애 결혼은 시켜야지 않겠소.”

“나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걱정 마시고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나저나 저택에 손님이 나뿐이 아닌 모양인데, 또 누가…….”

주변을 살펴보며 들어오던 백작은, 응접실에 앉아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만 바짝 얼어 버리고 말았다.

“저, 전하? 각하?”

“왔군.”

아발란쉬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네, 소르본 백작.”

“후작 각하. 이곳에는 어찌……?”

소르본 백작은 당황했다.

‘여기엔 대체 어떻게 온 거야!’

백작은 등허리를 지나쳐 가는 싸늘함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페리윙클에게 달려드는 것은 잃는 것만 생기는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성격상, 제대로 된 조사나 보복을 포기해 버린 자신을 보면 분명히 노발대발할 테니 그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그러니 메이에게 일을 저지른 것이 페리윙클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후작에게는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함구하고 있었는데.

‘이 일 때문에 제이가 후작가로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돼!’

백작은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어찌 왔겠는가. 연락을 받았으니 왔지.”

아발란쉬 후작이 소르본 백작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크라이언트 영애가 연락을 주었네.”

“얼마 전 자선 파티에서 각하를 뵈었던 덕분이지요. 그때 소르본 양에 대해 각하의 애정이 아주 깊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뭔가요.”

엘렌이 후작과 마주 웃으며 말하자, 소르본 백작은 괜한 짓을 했다며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는 말했다.

“그러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미처 챙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아이가 셋이나 되는 집 아닌가.”

“그렇지요. 집안의 아들들 간수하기도 벅차 죽겠습니다. 딸내미는 그래도 학교를 잘 다니고 있나 했더니, 이런 사고가 벌어지는군요.”

그런데 소르본 백작의 이야기를 듣던 아발란쉬 후작이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학교를 잘 다니고 있나?”

“……예?”

“아니, 그러니까 메이가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느냔 말이야.”

“그럼 물론이지요. 혼자서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우등생이지요.”

그런데 후작의 표정이 이상했다.

“성적이 좋으냐고 물어본 게 아닐세.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느냐고 물어본 거야.”

그 말에 소르본 백작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후작이 이미 일의 전말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이다.

“하하……. 그럼요. 학우들과 다소의 다툼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잘 해결되었습니다.”

“잘 해결되었다, 라.”

그의 말을 한 번 되풀이한 후작이 후우,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갑자기 외쳤다.

“어떻게 해결되어야 잘 해결이 된 겐가! 애가 저렇게 누워 있는데!”

“가, 각하!”

“잘 해결이 된 게 대체 어떤 해결인가! 응?”

아발란쉬 후작이 쏘아붙이자 소르본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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