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뭐요?”
“그런 것치고는 저쪽이 너무 조용하거든.”
딱히 이번 일과 큰 관련이 없던 가네트 백작은 혼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태를 관망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대충 들썩들썩 난리 난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크라이언트는 이상하게 조용하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누구보다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할 게 크라이언트였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조용하지요?”
한동안 말없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은 이윽고 같은 결론을 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애초에 이 매도행 자체가 그들의 의도였던 것은 아니겠지요?”
* * *
세간의 소식들을 모아 온 보고서를 읽던 길리언은 아연해진 낯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보았다.
<마그놀리아, 긴 고투 끝의 패전.>
<위기에 빠진 마그놀리아와의 교역상들.>
트리발로스의 마그놀리아 정벌 소식.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길리언은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제임스.”
“예.”
“가서 술을 가져와.”
“술 말씀이십니까?”
제임스가 반문했다.
원래는 정신을 흐린다며 술은 입에도 잘 대지 않던 공작인데, 근래에는 무엇 때문인지 부쩍 술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아직 업무 중이시니 조금만 나중에…….”
걱정이 되었던 제임스가 말을 흐리자, 길리언이 외쳤다.
“가져오라면 가져와!”
쾅!
“예, 예! 주인님.”
제임스는 제게 떨어진 불호령에 후다닥 자리를 떴다.
길리언은 제임스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그는 그곳에 보관해 둔 증서들을 확인했다.
“마그놀리아……. 마그놀리아.”
전부 마그놀리아의 채권이었다.
콰직, 그의 손 안에서 증서들이 우그러졌다.
이것만 믿고 잠시간의 이혼에 합의를 해 주었던 것인데!
그는 손 안의 종이 뭉치들을 내던지려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곧 찾아오는 허탈함에 팔을 내리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진정해……. 이미 벌어진 일을 생각할 게 아니라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길리언은 이로 인해 입게 될 타격이 얼마나 클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년부터는 광산을 굴리는 것도 문제다. 보급품의 질을 낮춰서 초기 물량은 맞추더라도 내전으로 이어질 경우 그것을 버틸 여력이 없어.’
뿐만 아니라 당장 기한에 맞춰 대금들을 지급하고 나면 그 뒤는 어찌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제임스가 술병을 들고 올라오자,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한동안 연거푸 술을 들이켜던 그는, 그런 저를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를 보더니 말했다.
“……당장 줄일 수 있는 저택의 예산이 얼마나 되지?”
“예? 어느 정도 선까지인지 말씀해 주시면 대강 계산해 보겠습니다.”
“고용인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계절 단장도 하지 않고. 사치품들은 적당히 팔아서…… 아니야, 안 돼.”
이런저런 것들을 나열하던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지 스스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지나가 버린 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신, 조금 쉬엄쉬엄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이번 대금 타이밍이 안 맞는다고 했죠? 다행히 조금 일찍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우리 거래처가 있었어요. 내가 해결했으니 조금 쉬도록 해요.]
한참 멍하니 있던 그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중얼거렸다.
“크라이언트가…… 엘렌이 필요해.”
* * *
“사장님. 여기 오늘까지의 거래 내역입니다.”
“고생했네.”
그것을 옆에서 흘끗 본 수잔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세상에, 사장님! 대박이에요. 대박이라고요!”
“그래.”
엘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장부를 넘겨 보았다.
“결과가 좋군. 고생했겠어, 다들.”
“이렇게까지나 사장님의 행보에 다들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줄이야. 대단하신 줄은 알았지만 정말 놀랍네요.”
수잔이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연신 장부를 훑어보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뭘.”
엘렌은 장부를 다시 마린에게 넘겨주고는 짝짝,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정보팀은 다시 국내 사정에 집중하도록. 여력이 된다면 트리발로스까지는 신경을 써 줬으면 좋겠네.”
“예. 사장님.”
“사장님, 이러시다가 나중에는 정말로 이 나라의 돈을 모두 갖게 되시는 것 아니에요? 황제가 따로 없겠어요.”
“수잔. 말이 지나쳐.”
“오, 마린. 그냥 감탄이에요. 그도 그럴 게 정말 대단하잖아요!”
그러자 엘렌도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필요하다면 그런 방법도 생각은 해 볼 수 있겠지.”
“그러면 저도 꼭 한 자리 챙겨 주시는 거예요, 폐하!”
수잔이 깔깔 웃으며 말하자, 그 호칭은 과했다며 지적하려던 엘렌도 그만 풋 웃고 말았다.
* * *
“이러다 실질적인 제국의 주인은 크라이언트가 될지도 몰라.”
마그놀리아 패전 소식을 전해 들은 케이든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녀의 손아래에 있는 느낌이야.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뭐지?”
“글쎄요. 결혼?”
“참 좋은 소리 하는군.”
케이든이 간만에 그의 집무실로 출근한 테리어드를 흘겼다.
“됐어. 부황께 가 보아야 하니 자네도 어서 따라오기나 해.”
“오늘 폐하 알현 일정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마그놀리아 패전 소식이 들어온 김에 부황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지.”
그러자 테리어드가 급히 자신의 차림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아, 이거 궁내부관에게 또 한 소리 듣겠는데.”
“그러게 평소에 좀 잘 챙겨 다니지 그랬나.”
“활동하기에 불편하단 말입니다.”
퍽 억울했는지 테리어드가 볼멘소리를 했지만, 들어 줄 생각이 없었던 케이든은 곧장 대화를 일축했다.
“됐고, 어서 가자고.”
그는 먼저 휙 문을 나섰고, 그 뒤를 테리어드가 서둘러 쫓았다.
* * *
“대단해. 이로써 정말 손 안 대고 크렘벨에게 타격을 주었어.”
짝짝짝.
이스타지오의 황제, 헤지스 이스타지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이 기세면 정말로 아발란쉬 후작도 포섭해 올지도 모르겠구나.”
“사실 그 말씀까지 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슨 소리냐? 이미 그것까지 완료가 되었다고?”
“예. 크렘벨 축출 관련해 지금까지 진행 상황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이든은 간단히 정리된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현재 총과 화약에 관해서는 잡은 단서를 조금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슈탓트펠트 경을 파견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아발란쉬 후작과의 동맹은 한 가지 조건을 전제로 받아 놓았습니다.”
“조건이라면?”
“여성도 작위 계승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입니다.”
“뭐?”
헤지스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이놈아.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뭐 그런 걸 조건이라고 달아 왔어!”
그는 어이가 없었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고는 와르르 말을 쏟아 내었다.
“게다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튀어나온 게냐? 그런 건 최소한의 명분, 앞뒤 맥락이 있어야지!”
“전면 개정이 아니라, 아발란쉬 후작이 질녀를 양녀로 들여, 그녀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후작의 질녀? 잠깐만. 이건 가계도가 필요하겠구나.”
헤지스는 손짓으로 멀찍이 서 있던 시종을 불러 서고에 보관된 귀족 명부를 가져올 것을 명했다.
곧 두툼한 책 한 권을 받아 든 그는 이리저리 페이지를 펼치며, 그들의 가족 관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후작은 후계가 없고, 후작의 누이만 아들이 둘에 딸이 하나. 그런데도 아들들을 제치고 딸을 양녀로 들이겠다고…….”
헤지스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흔치 않은 일이지. 그 이유가 후작에겐 제법 절박한 일이었나 보구나. 용케 그런 걸 파악해서 공략했어. 그 점은 칭찬하마.”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계가 딸 하나밖에 없을 경우로 한정해도 통과는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 딸은 양녀고, 같은 조건인 아들들이 둘이나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 아들 중 하나는 너무 어립니다.”
“그건 그렇지…….”
헤지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나이로 제한을 둘까. 장자는 가문을 우선적으로 계승하도록 하고, 양자로 들일 둘째 아들은…… 14세 미만일 경우에만 딸의 계승이 가능하도록.”
“그러면 입양 제도까지 함께 손을 보셔야지 않겠습니까?”
“아니. 양자의 경우 정상적인 계승을 위해서는 최소 14세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 정도면 충분하지.”
“아하.”
“아발란쉬 후작 대신 이 법안을 발의할 이가 필요하겠구나. 슬하에 딸 하나뿐인 귀족이…….”
“이스트힐 자작은 어떻습니까?”
“괜찮구나. 그다지 영향력 있는 이가 아니니 큰 견제도 들어가지 않을 테고.”
“일의 진행은 제가 시켜 두겠습니다.”
“그래. 회의는 나, 포트, 크렘벨, 아발란쉬로 총 네 표이니 전체 여론의 반대만 없다면 통과가 어렵진 않을 게다. 포트 후에게도 네가 이야기 전해 두어라.”
“예. 아버지.”
“그나저나 요 며칠 날씨가 좋지 않더구나.”
“예. 비가 오려는 모양이지요. 그나마 다행인 일 아닙니까.”
“그래. 이게 단비가 되면 좋으련만…….”
헤지스는 창밖을 보며 걱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 * *
쏴아아―
“적당히 챙겨! 그러다 깔린다고!”
“하지만……!”
“그러다 죽고 싶어! 당장 나와!”
“안 돼, 내가 어떻게 장만한 것들인데……!”
우르릉―!
긴 가뭄 끝에 폭우가 내렸다.
처음 먹구름이 끼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설레는 기대감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
몇 달 만에 내리는 굵은 빗줄기는 실로 금싸라기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한 시간, 한나절, 하루…….
비는 그간 내리지 않은 것을 모두 쏟아붓기라도 하는 듯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레 떨어진 엄청난 양의 비.
수목들이 물을 채 흡수하기 전 바짝 말라 있던 토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쓸려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아래에 자리한 민가를 덮쳤다.
“다들 나와! 나오라고!”
우르릉―!
“무너진다!”
“톰!”
“으아아악!”
하지만 급작스러운 폭우로 생긴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어! 둑이 새!”
“뭐? 젠장, 진짜잖아!”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둑을 막아야 해!”
“우디, 여긴 내가 막고 있을게. 너는 다른 곳을 살펴 줘!”
“고맙다! 넌 어서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물이 더 불어나서 터지기 전에 막아야 하니 어서!”
“어, 으응!”
진짜로 홍수가 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몇몇의 귀족은 둑 보수를 위해 나온 지원금을 횡령했다.
그로 인해 제대로 보수를 끝마치지 못한 둑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그들의 경제에 연쇄적인 타격을 입혔다.
가뜩이나 열악한 농사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부는 식량 저장고까지 물이 들어차며 식량 공급 상황이 더욱 극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흐름은 주로 크레센트와 그를 따르는 귀족파들에게서 나타났고, 이는 황태자에게로 여론이 완전히 기울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