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엘렌은 요즘 기다리고 있는 소식이 있었다.
“오늘도 별다른 보고가 없다던가?”
“예. 아직까지 올라온 문서는 없습니다만…….”
“그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 되겠어. 내가 가 있어야겠군.”
엘렌이 외출용 외투를 달라며 손을 뻗자, 집사가 걸려 있던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 올려 주며 물었다.
“대체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신 소식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게 있네. 집사도 듣게 되면 알 거야.”
부쩍 얇아진 외투의 옷깃을 탁탁 잡아 펴던 엘렌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곧 줄초상이라도 난 듯 시끄러워질 테니 기대하라고.”
그녀는 곧장 마차를 준비시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 * *
수도의 번화가.
크라이언트 소유의 상호들이 늘어선 패션 거리, 그중 한 주얼리 숍에 엘렌이 들렀다.
그곳의 3층, VIP룸을 지나 가문의 보안책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열면 나오는 사무실.
엘렌이 도착하자 근무 중이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사장님! 오셨어요!”
“수잔. 들어온 소식은 아직 없나?”
“지금 막 도착한 게 있어요. 지금 해석 중이었죠.”
여인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드디어 왔군. 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최우선으로, 최대한 빠르게.”
“네. 네. 걱정 마세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엘렌이 기다리고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렌은 제게 전달된 쪽지를 펼쳐 보았다.
<마그놀리아 패전. 일시에 왕성을 기습당해 국왕이 항복 선언.>
그것을 읽은 엘렌은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않고 외쳤다.
“마린!”
“네. 사장님.”
“지금부터, 우리 가문이 갖고 있는 트리발로스 관련 재산을 모두 처분해 줘.”
“마그놀리아가 아니라 트리발로스 말씀이십니까? 승전국?”
“그래.”
“음……. 알겠습니다. 회수율은 어느 정도 선까지 생각하십니까?”
“글쎄. 3할? 굉장히 급하게 처분하는 듯한 느낌만 주면 충분하니 더 높여도 좋고.”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오늘 하루. 아니, 이틀.”
구획을 나누어 일정 지점마다 말을 갈아타며 곧장 올 수 있도록 했고, 배를 수배할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기동성 좋은 고속정을 비치해 두었다.
그러니 육지에서 최소 하루, 바다에서 짧게는 한나절, 길게는 하루.
아슬아슬한 선까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엘렌은 다시 한번 시간을 계산해 본 뒤, 이틀까지는 괜찮겠다는 확신이 서자 다음 할 일을 지시했다.
“처분은 내 이름으로, 아주 급한 티를 내면서 해. 그리하면 분명 발 빠른 귀족들은 내가 마그놀리아 승전의 확실한 증거를 들고 있다며 지레짐작하고는 곧장 저희들이 들고 있는 트리발로스 물량을 마구 팔아 치우기 시작할 거야.”
“오, 맙소사.”
마린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면 그걸 티 나지 않게 전부 사들이란 말씀이시겠지요?”
“그래. 가능한 한 전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뭐지?”
“정말 다른 귀족들이 그것만 보고 움직일까요?”
이 계획이 실패하면 떠안게 될 막대한 손해가 머릿속에 그려졌는지 마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최근 크라이언트의 상승세를 알고 있는 귀족들이 그런 내 행보를 보고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겠지요?”
마린이 괜히 쭈뼛쭈뼛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손등을 한 번 문지르고는 말했다.
“정말이지 이런 도박은 처음 해 봅니다, 사장님.”
“도박? 그렇다면 한번 믿어 봐. 나는 스스로 제법 괜찮은 승부사임을 자처하고 있으니.”
그리 말한 엘렌은 싱긋 웃어 보였다.
* * *
한 무리의 남성들이 커피 하우스에 모여 매캐한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하하, 크렘벨 공께서는 요즘 들어 더욱 좋아 보이십니다.”
콜린 남작이 후,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말했다.
“아무렴. 더 젊고 아름다운 신부를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실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린랜드 자작이 여기 있었다면 볼만했겠군.”
“거기 딸 얘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고.”
저희끼리 눈짓을 교환한 남자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그런데 길리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아. 누가 재취에 귀한 딸을 쉬이 내주겠나.”
그를 띄워 주려는 이야기였지만, 길리언은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은 듯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콜린 남작은 이 화제가 그에게 있어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님을 파악하고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오늘 제가 들고 온 비장의 수를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소식들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을 말인가?”
“제가 들은 게 한 가지 있는데, 우리 클럽분들에게만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콜린 남작이 목소리를 낮게 죽이고 속삭였다.
“마그놀리아가 승전했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요!”
“전쟁이 끝났다고? 그게 정말인가?”
“제가 이 자리에서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어제부터 크라이언트가 트리발로스 관련 재산들을 모두 처분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두 손까지 번쩍 들어 가며 말했다.
길리언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크라이언트?”
제게 온 관심에 남작이 신이 나서는 외쳤다.
“예!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간 투자 측면에서는 크라이언트를 따라갈 이가 아무도 없었지요. 무언가 정보를 먼저 손에 넣은 게 틀림없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가드 자작이 흥분해서는 끼어들었다.
“마그놀리아라니! 내 그럴 줄 알았지. 들었나, 다들?”
“허, 자네가 기어이 한 건을 하는구먼.”
“이제 안사람도 할 말이 없겠지. 모험 없이는 큰돈도 없는 법이라고!”
가드 자작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자네도 내가 이야기할 때 같이 시작하지 그랬나. 하하!”
“그러게 말이야. 아쉽군.”
한참을 입을 다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만 하던 길리언이 물었다.
“……크라이언트가 트리발로스에 관한 것들을 모두 팔기 시작했다는 건 확실한 정보인가?”
그러자 사람들은 그도 이 전쟁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공께서도 한 발 걸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어느 쪽이십니까?”
질문을 들은 그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갯짓으로 대답을 재촉하자, 그가 마그놀리아에 투자했음을 알아챈 콜린 남작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하. 지금이라도 중앙 거래소에 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어제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이야기로 한참 떠들썩거렸으니까요.”
“그렇군.”
길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줄곧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윌튼 자작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전 여기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가십니까?”
“예. 일이 있던 것을 깜빡했지 뭡니까.”
윌튼 자작은 일이 있는 척 말했지만, 콜린 남작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에게 트리발로스와 관련해 엮인 돈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비웃음과 함께 저마다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지요.”
“가는가? 그럼 나도 이만 가 보겠네. 공, 다음에 뵙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가면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 나는 이대로 거래소로 갈 생각인데, 같이 갈 이 있나?”
“나도 갈 생각이네. 같이 가지.”
윌튼 자작이 물꼬를 트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거래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내고 자리에서 커피를 한 잔 더 시키는 길리언을 본 가네트 백작이 말했다.
“공께서는 가지 않으십니까?”
“다른 일이 있어서.”
그는 뒤의 수행원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것을 본 백작이 아하, 하더니 파이프의 담뱃재를 툭툭 털어 내고는 말했다.
“공께서는 마그놀리아에 전부 거셨던 모양입니다.”
길리언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것을 보니 선구안은 크라이언트가 아니라 공께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그저 남들보다 빠른 정보력을 갖고 있을 뿐인 게지요.”
“……그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닐 텐데.”
“예?”
백작은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반문했다.
길리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속단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소리지.”
드르륵,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2층으로 올라갈 테니 주문은 2층으로 가져다주게.”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종업원과 함께 길리언은 그대로 계단을 올랐고, 그들이 모여 있던 테이블에는 가네트 백작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하, 이제 와서는 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비위 맞추기 더럽게 힘들군.”
전처랍시고 감싸고 있는 그의 모양새가 웃겼던 백작은, 그의 뒤늦은 행동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예의 커피 하우스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클럽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그놀리아 패전이라지 않아!”
며칠 전 의기양양하게 선물까지 잔뜩 사 들고 집에 돌아갔던 가드 자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대체 그런 엉터리 정보는 어디서 물어 온 거야!”
“말은 정확히 해야지요! 내가 전달한 것은 크라이언트가 트리발로스에 관해 급매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그놀리아가 이긴 게 틀림없다고 했잖아!”
“이보시지요, 가드 자작! 자작은 애초에 내 말과 관계없이 마그놀리아에 꼬라박았잖습니까!”
“뭐? 꼬라박아? 말 한번 천박하게 하는군!”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거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격하십니다들!”
“아니! 나도 말해야겠네. 마그놀리아 승전이란 말에 난 트리발로스에 관련된 것을 모두 팔아 버렸단 말이야!”
똥 씹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윌튼 자작이 외쳤다.
“이 손해를 모두 어쩔 거요!”
“아니, 정보랍시고 받을 때는 거저 받아 가더니, 막상 손이 나니 그것은 제 책임입니까? 제가 팔라고 강요라도 했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제가 전달한 말은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비롯된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뿐인 거지!”
그런데 그 말을 듣던 가네트 백작이 나서서 말했다.
“글쎄. 이쯤 되면 그 소식도 의심을 해 보아야지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