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후작 목소리에는 설마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그것은 대답하는 쪽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미안하네. 내 긴히 전할 말이 있는데, 사안이 원체 급해서 말이야.”
“……일단 드시지요.”
아발란쉬 후작은 이 예상치 못한 손님을 3층 서재로 안내했다.
침묵 속에서 계단을 오른 뒤에야, 곧 방음을 신경 쓴 육중하고 두꺼운 문이 열렸다.
그러자 나타난 공간은, 창문 하나 없이 불을 올린 등을 조명 삼아 내부를 밝히고 있는 커다란 서재였다.
뒤따르던 사용인들에게 모두 나갈 것을 지시한 아발란쉬 후작은 먼저 황태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고맙네.”
자리를 정리한 시녀들은 후작의 명에 따라 신속히 자리를 비웠다.
“각하. 어쩌다 보니 이리 또 뵙게 되었습니다. 크라이언트가의 장녀, 엘렌입니다.”
그에 아발란쉬 후작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조금 무례하지만, 안다니 더 이야기하지는 않겠소.”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으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아발란쉬 후작은 황태자를 흘끗 본 뒤에야 마지못해 엘렌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내 일단 전하를 보아 넘어가도록 하지. 그대도 앉게.”
“감사합니다.”
자리가 조금 정리되자 케이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군.”
“아닙니다. 사안이 촉급하다 하셨으니.”
아발란쉬 후작은 황태자의 사과를 순순히 받아 주지 않았다.
요는 들어 보고, 정말로 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이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중개인에 불과하다네. 오늘의 용건은 그대와 크라이언트 영애 사이의 일이지. 다만 나는 그대들 모두가 나의 신하들이니 이대로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동행한 것이라네.”
“알겠습니다. 이 이상 말씀을 들었다간 제가 송구해지겠습니다.”
“알겠네.”
케이든의 그 말을 끝으로 발언권은 엘렌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품에서 곱게 봉인된 편지들과 목걸이를 꺼내어 후작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무언가?”
“제가 그것을 누구에게서 맡아 온 것인지, 보시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자마자 선문답이로군, 하는 불평을 들으라는 듯 뱉은 후작은 다소 불손한 태도로 목걸이를 턱 집었다.
그러나 그 펜던트를 본 순간.
그의 팔은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의 발단은, 제 동생인 엘시어와 페리윙클가의 영식이 서로 싸움으로 얽혔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동생인 엘시어가 제국 수도의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것, 페리윙클과의 싸움으로 인해 엘시어가 그에 대한 적대감을 불태운 것, 그 와중에 페리윙클의 이상한 행적이 눈에 띈 것, 그것에 소르본 영애가 엮여 있던 것…….
“뭐라고?”
갑자기 언급된 사랑하는 질녀의 이름에 후작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화가 난 듯 거친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기저에 깔린 미묘한 두려움을 완벽히 숨겨 주지는 못했다.
“질문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합니다만, 일단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엘렌은 이야기를 이었다.
메이 소르본이 학교에서 정도가 지나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것, 메이 소르본의 룸메이트인 평민 아이가 페리윙클과 적대적인 사이를 유지 중인 엘시어에게 그 행적을 고발한 것, 그러던 와중 어제 두 사람이 함께 마차 사고를 당한 것, 그리고 어제 아카데미를 찾아가 그것은 페리윙클의 소행이라는 증언을 확보한 것.
“……그래서, 그대가 내민 이것이 메이가 맡긴 것이라고?”
“예. 이 편지 또한 소르본 영애가 쓴 것입니다. 나머지는 제게 이러한 문제를 고발해 왔던 아카데미 학생들이 쓴 것입니다.”
엘렌은 그것들을 다시금 그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영애는 현재 머리를 다쳤고, 왼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후작께서도 아시겠지만, 검술에 뜻이 있는 아이에게 골절상은…….”
그녀가 말을 흐리자 후작도 침음을 흘렸다.
그는 제 앞에 놓인 편지를 집었지만, 안에 있는 편지지를 꺼내지도 못한 채 그저 겉봉만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시선만을 조용히 옮겨 제가 직접 골라 선물한 질녀의 목걸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는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가 쥐고 있던 편지지를 확인했다.
부스럭. 부스럭.
구겨져 있던 종이가 펼쳐지고, 그 안에는 깔끔한 필체로 제 질녀의 수모와 다짐이 담담히 적혀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후작의 눈동자와 떨리는 손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힘이 빠진 움직임으로 제 얼굴을 덥석 움켜쥐고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상태가 심각한가? 아이는 괜찮다던가? 울지는 않았고? 괴롭힘이라니, 그 아이가…….”
“일단 수술은 저희 가문의 주치의에게 부탁해 둔 상태입니다. 운이 좋다면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가서 확인해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겠소.”
후작은 케이든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아까 범했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내가 무리하게 온 것은 사실이지요.”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어서 갑시다. 나도 영애의 상태가 걱정이 되는데 후작은 오죽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크라이언트 영애에게도 감사를 드리오.”
“일전 파티에서 각하께서 소르본 영애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도 이리 찾아뵐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거 천만다행이로군. 그래도 어쨌든 고맙소.”
“거 인사는 그만들 하고, 어서 갑시다.”
케이든이 외투를 입으며 말하자, 두 사람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 * *
크라이언트 저택 내의 작은 의원.
문이 열리고, 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를 보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소녀 또한 그런 중년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숙부님.”
뱉은 목소리에는 짙은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소녀는 성한 곳이 없었다.
머리를 싸맨 붕대와 부목을 대어 감싼 탓에 두껍게 고정된 팔. 온 얼굴에 난 생채기와 힘없이 늘어져 있는 다리.
애써 태연하려 치켜뜬 눈에는 눈물이 아롱져 물기가 어른거렸다.
“……너.”
후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모습이 눈에 박혀서, 목이 메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어 조금씩 주름이 지기 시작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왜,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왜 어른들 싸움에 네가 지레 기가 죽어서 그래!”
그는 소리친 목소리와 달리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 조카딸의 상처 위를 어루만졌다.
“왜 말하지 않았어…….”
“……죄송해요. 숙부님.”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는 메이 소르본의 눈썹도 하늘을 향하기 시작했다.
깨물린 입술. 떨리는 목소리와 열기 오른 눈가.
그런 서로를 바라보던 숙질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미안하다. 내가 믿음을 주지 못해서, 그래서…….”
“아니에요. 죄송해요, 숙부님…….”
“팔은 괜찮으냐? 많이 아프지는 않았고? 머리도 다쳤으니 두통이 있겠구나. 내 좋은 약을…….”
“지금은 누워 있는 게 불편할 뿐 괜찮아요. 정말 다행히도 크라이언트 영애께서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팔도 이대로 잘 나으면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할 거래요.”
그녀의 말에 후작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 비로소 힘을 풀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그는 엘렌에게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고맙소.”
“세상에. 고개를 드시지요, 후작 각하.”
“정말 고맙소. 이 애가 이리 내 눈앞에 있는 건 크라이언트 일가의 도움이 정말 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반드시 보은하리다.”
“아닙니다. 보은이라니요.”
엘렌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보다 이제부터 후작께서는 어쩌실 요량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어쩌고 말고 할 것이 있나. 이것들을 모두 단두대에 세울 것이오. 정말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엘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오늘 이렇게 각하를 찾아뵌 것은, 소르본 백께서 수술도 망설이시고 보복도 포기하신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제 목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뭐? 수술을 망설여?”
후작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예. 소르본 백작께서는 400골드의 수술 비용에 수술을 포기하셨으며, 마찬가지로 페리윙클의 소행이라는 말에 보복도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엘렌의 말이 사실인지 묻기 위해 메이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메이는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을 닫고 시선을 피했고, 그 반응에 엘렌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된 후작의 얼굴은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 한심한 자식이!”
후작은 분이 차오르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누님께서 결혼하실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제 자식에게마저……!”
“후작 각하.”
그를 부르는 엘렌의 목소리가 사뭇 결연했다.
아발란쉬 후작이 그녀를 보았다.
“저는 엘시어까지 표적이 된 지금, 페리윙클가에 대한 보복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후작 각하께서도 마찬가지시지요.”
“그렇소.”
“그러니 저는 더욱 효과적인 보복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후작께서 후계자로 영애를 세우심이 어떠하십니까?”
“후계자? 그대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