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집사의 명령에 따라 약재 상자들을 챙겨 든 하인들과 엘렌은 1층에 위치한 응접실로 향했다.
탁, 탁. 넓은 탁자 위로 상자들이 쌓였다.
“전하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드린다고 말씀 전해 주시지요.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 주신 경께도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귀한 이는 응당 그리 대해야 하는 법이지요.”
“저를 귀히 여겨 주시는 것이 감사한 것이랍니다.”
엘렌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영애의 가치는 영애가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렇게 영애께 예를 차리는 것은, 그만큼 영애가 이룩해 놓은 것들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여느 영애들 가슴앓이 꽤나 시키셨을 법한 화술이로군요.”
“그렇습니까?”
클라우디스는 제법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엘렌이 약재통들을 보며 말했다.
“이 상자들, 열어 보아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클라우디스는 엘렌이 관심을 보이는 통을 집어 들어 뚜껑을 열어 주었다.
“어머.”
“보시다시피, 대부분 말린 것들입니다.”
“종류가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어찌 이리 단시간에 구해 오셨는지…….”
엘렌이 감탄을 고스란히 내보이자 클라우디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황족의 한마디면 대부분의 것은 가능해지는 마법을 볼 수 있지요.”
“아.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한차례 농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말린 것들이면 기존 약재랑 다루는 방법이 비슷하지 않나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굳이 사용법을 알려 주셔야 한다고…….”
엘렌이 의문 섞인 눈으로 물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클라우디스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제 기사도입니다. 거짓은 때로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하지만, 약자에 대한 위협은 상대적인 강자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니까요.”
그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 행동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작게나마 분명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려요.”
엘렌의 만류에 그는 씩 웃어 보였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영식께서 사고를 당해 심란하신 마음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셨을까요.”
“덕분에요. 그래도 잘 정양만 하면 된다니 한시름은 놓았지요.”
“아,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반색하며 말했다.
“영애께서 어떠하실지 몰라 많이 걱정했는데, 저도 걱정을 한시름 덜었군요.”
그리 말한 클라우디스는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엘렌에게 건넸다.
“이것은 뭔가요?”
“약재는 전하께서 영식에게 보내는 것. 그리고 이것은 제가 영애께 드리는 겁니다.”
“제게요?”
엘렌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실크 주머니를 보며 물었다.
“예. 영애께서도 과중해진 일 탓에 분명 무리하실 것 같아 챙겼습니다. 가족과 건강하게, 오래 지내려면 영애의 건강도 챙기셔야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엘렌이 얼떨떨한 낯으로 주머니를 받아 들자, 그녀가 자신의 선물을 잘 받아 챙기는 것을 본 클라우디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크레센트 전하께서는 영애와의 매사냥을 꽤나 기대하고 계시는 눈치였습니다만…… 지금 영애를 보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잊은 것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아닙니다, 경. 제가 제 입으로 한 약속인데…….”
“당분간은 영식과 내사에 집중하시지요. 손님은 오래 있어 봤자 신경만 쓰이니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영식의 쾌차를 바랍니다.”
“아……. 감사합니다, 경.”
엘렌은 갑자기 찾아든 친절 아닌 친절에 얼떨떨해서는 답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조만간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인사를 남긴 클라우디스는 곧 저택을 나섰다.
* * *
다그닥. 다그닥.
크라이언트가의 마차가 태자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렌은 답지 않게 마차 등받이에 기대 누워 늘어졌다.
“아. 너무 피곤해.”
아침부터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주르륵 마주한 탓에 피로가 극심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아발란쉬 저택에 들러야 한다는, 가장 큰 본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자궁에 한해 크라이언트가의 마차는 언제나 별다른 검문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방문 소식에 케이든이 헐레벌떡 튀어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영애!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전하. 정말 죄송하지만, 바로 용건을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정말 피곤했던 엘렌이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케이든이 해사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상관없으니 편한 대로 하시지요.”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아발란쉬 저택으로 가야 합니다.”
“지금?”
케이든이 놀라 되물었다.
“예. 어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 깜박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어제는 워낙에 경황이 없었으니 그럴 수 있지요. 괜찮습니다. 그저 지금 당장 가는 것이냐고 물어본 겁니다.”
“전하께서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는 여성 작위 계승에 대한 법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잠깐. 무슨 법이라고?”
케이든은 잠시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를 곱씹다 간신히 질문을 뱉었다.
“……갑자기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요? 일단 이유는?”
“이 또한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사건이 제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서 제때 설명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엘렌은 두통이 이는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가면서 설명을 드릴 테니, 흥미가 끌리신다면 지금 황실 마차를 타고 아발란쉬 저택으로 향해 주세요.”
정말 갑작스러운 소리였다.
서론, 본론, 결론순으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었어도 기겁할 만한 화제인데, 대뜸 결론부터 통보당했으니.
그는 얼이 빠져서 대답했다.
“그래요. 일단 갑시다.”
그렇게 급하게 결성된 아발란쉬 후작가 방문단은, 마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두 엘렌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영애. 이제 설명을 좀 들어 봅시다.”
케이든이 일행을 대표해 그녀에게 물었다.
“우린 지금 크렘벨을 내치는 데 필요한 가장 큰 핵심을 포획하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아발란쉬 후작을 포섭하러 가는 거라는 소리입니까?”
“정확하십니다.”
엘렌이 짝, 박수를 치며 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테리어드가 물었다.
“그와 여성 작위 계승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그가 소르본 영애를 양녀로 들일 거니까요.”
“어째서입니까? 후작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양자를 들이려 한다 치더라도 소르본가에는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고……”
“어제, 아카데미에서 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엘렌이 갑자기 엉뚱한 화제를 꺼내자 케이든과 테리어드는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이번에 소르본 영애가 당한 마차 사고. 페리윙클 영식이 계획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뭐요? 정말입니까?”
그녀의 말에 케이든이 무릎을 치며 벌떡 몸을 세웠다.
“예. 심지어 그전부터 도를 넘는 괴롭힘은 지속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녀가 왜 혼자 감내해 왔던 것 같습니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가문 간의 관계 때문에…….”
“그렇겠지요. 심지어 소르본 백작은 페리윙클이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보복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확실히. 소르본도 백작가라 하나, 페리윙클에 그 위세가 비할 바가 못 되지.”
테리어드가 덧붙이자 케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동급생에게, 가문 간의 권력 구도로 인해 살해 위협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 조카를 예뻐하기로 소문난, 게다가 아직 미혼으로 후계자가 없는 후작이 이 상황에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여성 작위 계승을…….”
“네. 단순히 입양만 한다면 더 높은 혼처를 찾기 위해 경쟁하고, 그 혼처의 판단에 그녀를 맡겨야 합니다. 제가 장담컨대 아발란쉬 후작은 그런 걸로 만족할 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확실한 신분을 쥐여 주고 싶어 할 것이다.”
케이든이 그녀의 말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테리어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립을 끈질기게 유지하고 있던 후작이야. 자기 자식도 아닌, 조카의 일에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일까? 솔직히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엘렌.”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그렇지만 부딪쳐 봐서 나쁠 게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저는, 제 시간을 자신이 있는 곳에만 투자한답니다.”
엘렌은 싱긋 웃어 보였다.
* * *
중앙 귀족으로 일하고 있는 아발란쉬 후작의 주된 거처는 수도에 있는 그의 저택이다.
평소 꽤나 성실한 귀족이었던 그는 가진 재산이나 지위에 비해, 동선이 퍽 단순한 편이었다.
저택의 일상은 아주 고요했다.
아이도, 다른 가족도 없이 그 혼자 머무르는 저택.
가끔 마이어스 백작이 들러 거나하게 술 파티를 벌이거나, 조카들이 들르면 그때에나 간혹 사람 소리가 나곤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저택에 얼마 만일지 모를 소란스러운 비일상이 찾아왔다.
원인은 단순했다. 방문자가 찾아온 것이다.
예고 없이 등장한 마차에서 내린 것은 저를 황태자라 밝힌 남자와 그를 수행하는 기사, 그리고 여인 한 명으로 구성된 세 사람이었다.
“……포섭이라더니 이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지금 막 들어가지 않으면 때를 놓칩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전하께서 같이 오신 것을요.”
“아, 그러니까 통행증이다?”
“받아들이시기 나름 아닐까요.”
그렇게 복장부터 직함까지 그 무엇도 숨기지 않은 황태자가 떠들썩하게 쳐들어왔다.
회의 때마다 밥 먹듯이 황태자의 면상을 확인하는 아발란쉬 후작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 선 것은 그 신분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한, 체셔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아주 황당한 얼굴로 나온 중년의 남자는 신분을 무기로 밀고 들어온 불청객을 맞이했다.
“전하, 이런 곳까지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