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 예. 이든은 이든 부부의 딸입니다.”
앨먼은 들뜬 목소리로 답하며 백작을 쳐다봤다가, 그의 표정이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이든은 확실히 많은 경우를 다뤄 본 친구입니다. 제게 딸이 있다면 저는 이 친구에게 맡길 겁니다.”
“그래? 수도 중앙 병원의 의사가 그 정도로 말한다면야…….”
흠흠.
소르본 백작은 괜한 헛기침을 뱉으며 엘렌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백작이 찔끔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가소롭기는.
엘렌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친절한 낯으로 미소 지었다.
“제게는 도울 수단이 있고 소르본 영애는 제 동생의 친구입니다. 아무리 귀족 사회가 철저한 이익 사회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아야지요. 가문도 상회도 그래야 장수하거든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그 이든이라는 여자는 본인 수술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거요?”
“그것은 그녀가 결정하겠지요. 제가 드리는 건 그녀에게 진료를 받을 기회뿐이랍니다.”
그녀의 대답이 영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백작은 무언가 마뜩잖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는 앨먼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이 수술을 하게 되면 비용을 얼마나 청구할 생각이오?”
“저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400골드입니다.”
“400골드라고? 이 수술이?”
예상하지 못했던 금액이었는지 백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예. 400골드. 병원에서의 방침으로 정해진 금액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곤란해 보이는 낯에 함께 얼굴이 굳어진 것은 메이 소르본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엘렌이 메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영애. 영애만 괜찮다면 이든에게 부탁해 보지요.”
“저야 그리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지만…….”
그녀가 아쉬운 기색을 가득 풍기며 제 아비가 있는 곳을 곁눈질하자, 앨먼도 얼른 한 수를 거들었다.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수술은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의사가 하는 간접적인 경고에, 소르본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쯧. 그래. 그쪽 주치의는 비용이 어떻게 되오?”
“아버지. 영애께서는 선의로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신 거예요. 본인이 고용한 주치의니 저희에게 비용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그래? 정말이오?”
소르본 백작이 놀라 물었다.
“굳이 그런 부분에서 제가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지요. 저는 그깟 몇백 골드보다 소르본이라는 제 동생의 친구를 중시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럼 부탁 좀 합시다. 애 흉만 안 남게 잘 부탁하오.”
“그건 가셔서 이든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엘렌은 자신의 일과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클러치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 무언가를 휙 적으며 말했다.
“영애는 엘시어와 함께 마차로 먼저 가 계시죠. 여기 이 편지와 함께 가서 이야기를 전달하면 집사가 잘 안내해 줄 겁니다.”
엘렌이 휘갈긴 메모지를 곱게 접어 건넸다.
그것을 다친 손 탓에 한 손으로 받게 된 메이는, 받으면서도 송구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개진 얼굴로 물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영애께서는 어찌 가십니까?”
“저는 이 길로 곧장 아카데미에 들러 볼 생각이라 괜찮습니다. 가서 개의치 마시고 필요하신 것은 집사에게 이야기하세요.”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세는 제가 지는 건데…….”
“아니요. 저는 해 줄 때는 확실히 해 주자는 주의라서요.”
그리 말하며 웃는 엘렌은 어딘가 거역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있었다.
그녀의 기세에 무어라 말을 더 하기가 어려워진 메이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애.”
“백작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아카데미에 들러 보시겠습니까?”
“아니. 공연히 두 사람씩이나 갈 필요는 없지. 난 딸애와 함께 가고 싶소.”
“얼마든지요.”
엘렌은 백작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시지요, 전하.”
“나도 같이 갑니까?”
“그럼요? 전하께서 도와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케이든은 허, 하며 헛웃음을 뱉었다가 이내 푸흐흐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갑시다.”
* * *
늦은 저녁.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을 겪게 된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혼돈에 빠졌다.
“……저거 황실의 문장 아닌가?”
“그러게? 황실에서 올 때가 아닌데 이상하군. 이 시간에 황실 마차가 들어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야.”
어리둥절한 문지기들을 시작으로,
“저, 전하?”
“전하!”
“세상에, 전하.”
“오랜만이네. 하워드 경, 폴렛 경, 아덴 경.”
아카데미에 재직 중인 교수들과,
“허허.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재작년 입학식 때 보고 처음이지요?”
학교의 최고 결정권자인 총장까지.
총장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게 벌써 재작년입니까?”
“작년과 올해는 크레센트와 이클립스가 왔으니 재작년이지요.”
“허허. 2년 새 더 늠름해지셨습니다.”
총장이 다 키워 놓은 조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툭 말을 던졌다.
“총장께서는 주름이 느셨습니다.”
“뭘 모르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다 인내심입니다.”
총장이 허허 웃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지더니, 다짜고짜 이야기를 본론으로 끌고 들어갔다.
“안부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래서 전하. 이리 늦은 시간에,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 행차십니까.”
그러자 케이든이 엘렌의 손을 슬쩍 잡아끌며 말했다.
“이리 갑자기 찾아오게 된 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좀 생겨서.”
“안녕하십니까. 엘렌 크라이언트입니다.”
케이든에게 집중하고 있던 총장은 그제야 옆에 서 있던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전하께서 웬 일행과 함께 계신다 했더니……. 총장 빌 슈페터입니다.”
그는 엘렌에게 악수를 청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용건은 일행이신 영애께서 있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그저 동행인이지요.”
케이든이 피식 웃자, 악수 후 손을 거둔 총장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들이 어제 아카데미의 마차를 이용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이런. 총장은 낮게 침음을 뱉었다.
“크라이언트 군입니까? 아이들이라면 또 누구입니까? 다들 괜찮습니까?”
“여기서부터는 제가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엘렌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장은 잠시 케이든을 쳐다보았다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했다.
“그러시지요.”
“사고가 난 것은 제 동생 엘시어와 그 동급생인 메이 소르본 두 사람입니다. 마부는 사고로 죽었고, 엘은 다행히 조금만 정양하면 나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소르본 양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더군요.”
“맙소사.”
총장을 비롯한 교수진들이 탄식했다.
“저는 그에 관해 아이들의 출석 문제를 처리하고, 추가로 알아볼 것이 있어 방문했습니다.”
“사고는 정말 유감입니다. 출석 문제는 교무실로 가셔서 해결하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알아볼 것이라면 무엇인지?”
총장이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마차가 길을 달리다 혼자 바퀴가 빠지며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마차에 대한 조사는 치안대가 할 테지만, 마차의 관리 환경에 대해서는 아카데미 측에서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과연…….”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조만간 치안관이 들러 자료를 요구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요청하는 자료는 모두 속히 건넬 수 있게끔 준비하라 이르지요.”
엘렌은 그의 말에 살짝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총장은 은근슬쩍 치안대에게만 자료를 보여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괜히 케이든이 친절을 발휘하며 끼어든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없었으면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질 뻔했다.
“치안관도 물론이지만, 가문의 사람이 다친 만큼 저 또한 사실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엘렌이 다시금 이야기했지만 총장의 뜻은 완강했다.
“영애의 마음은 알겠지만 영애에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끝내 총장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은 뒤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케이든이 나섰다.
“그래서 내가 함께 왔지요. 나도 이번 사고는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장.”
그가 놓는 으름장에 총장은 끄응 신음을 흘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명령이시라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책임 소재는 확실히 해야지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마부들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그와 함께 아카데미의 마차들도 살폈으면 합니다.”
총장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케이든을 흘끔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얼마든지요. 가시지요.”
* * *
하버 아이비스는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돌아가던 중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외부인이 돌아다닐 만한 때가 아닌데 학교에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쪽입니다.”
“마차 보관소가 생각보다 멀리 있군요.”
“마부들의 휴게실도 이곳에 같이 있습니다.”
마부? 마차 보관소?
총장이 직접 인솔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꽤나 중요한 이들인 듯싶었다.
“거리가 제법 있으니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누군가가 와도 알아차리기 어렵겠군요.”
“음……. 그건 마부들에게 물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전하.”
전하?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아이비스는 그 일행을 다시 훑어보았다.
언뜻 보았을 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몇 번 본 이목구비였다.
‘황태자 전하……!’
옆의 여자는 누구지?
그는 두뇌를 쥐어짰다.
‘맞아, 크렘벨 공작 부인!’
이번에 이혼 소동으로 화제가 되었던 여자였다.
‘무언가 아카데미에 일이 생긴 건가?’
저 정도의 인물이 이곳에 이렇게 갑자기 올 이유로 달리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었다면 아마 며칠 전부터 황태자의 방문으로 아카데미가 시끄러웠을 것이다.
뭐지? 뭘까.
궁금했지만 황태자의 뒤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엿들을 배짱이 없던 그는 그대로 기숙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도착하니 아이들이 제법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