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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49화 (49/128)

<49화>

하지만 메이는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잠시는 무슨 잠시?”

“이봐! 윽!”

더 깊게 들어오려고 하는 검에 당황한 상대는 그대로 무리하게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철퍼덕.

그 소리에 그들의 주변에서 대련하고 있던 조들의 검이 멈추었다.

“아, 미안.”

메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반응 속도가 좀 느려서. 넘어뜨린 건 사과하지.”

메이가 손을 내밀자, 그는 그녀의 손을 탁, 뿌리치며 말했다.

“너 내가 분명히 잠시라고 손까지 들었잖아!”

그는 분기로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학생들 앞에서 엉덩이로 바닥에 앉아 있는 꼴을 보이고 만 것이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 거하고 몸이 반응하는 거하고는 다른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메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네가 덜떨어진 게 내 탓이라는 소린가, 지금?”

“맞아. 나 덜떨어졌는데, 그건 너도 그렇지 않나?”

“뭐?”

“너도 계속 조절 못하고 실수했잖아.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에 알았다고 해 줬고.”

그녀는 자신의 볼에 난 자잘한 생채기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도 실수하자마자 사과부터 한 건데. 너도 받아 줄 거지?”

“허!”

상대가 분에 못 이겨 헛웃음만 뱉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가 잠깐 끊기자, 그 틈을 타 엘시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원래 파트너는 나니까 이만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자, 남학생이 고개를 돌려 엘시어를 보았다.

“몸이 안 좋다고 빠지더니 꾀병이었나?”

“그건 아닌데, 이제는 좀 괜찮아졌거든.”

하지만 상대는 그녀 좋은 대로는 해 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버팅기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네.”

“어렵다고?”

“난 이 수업을 정당히 신청해서 듣고 있는 학생이고 넌 그냥 청강생이잖아. 난 이 수업을 듣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숫자가 안 맞으면 네가 빠져야지.”

“그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엘시어가 뒷말을 잇지 못하자, 메이는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말했다.

“됐어, 엘시어. 수업은 교수님께서 담당하시는 거니까 교수님께 여쭈면 되지.”

그녀는 혼자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그대로 교수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무슨 일 있나?”

“엘시어가 이제는 괜찮다고 해서요. 대련 조를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말에 교수는 엘시어가 있는 곳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면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저기 저 친구는 나한테 오라고 전해.”

그 이야기를 들은 메이는 씩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고, 메이가 웃는 것을 본 남학생은 굉장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메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통통 다가가 말했다.

“너, 교수님께서 오래.”

그녀는 대놓고 킥킥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러모로 오늘은 네가 배우는 게 많은 시간이 되겠구나.”

“너……!”

남학생은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가, 곧 한쪽에 있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는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많~은 배움이 필요한 건 너뿐만은 아니었겠구나. 오늘의 경험, 꼭 친구들과 나누길 바랄게.”

그녀는 그가 바라본 곳에 서 있는 학생, 밀러 페리윙클을 보며 픽 비웃음을 날렸다.

“빨리 가 보는 게 좋을걸. 교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잖아.”

메이가 재촉하자 남학생은 그녀를 한 번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팍! 하며 땅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그 자식 면상 봤어? 아주 똥 씹은 얼굴이던데.”

“그렇긴 하더라.”

메이가 수긍하자 엘시어가 씩씩대며 말했다.

“저 자식은 나중에 만나면 내가 꼭 똑같이 해 준다.”

“됐어.”

“되긴 뭐가 돼. 저런 놈들이 기사가 되겠다고 아카데미에 들어와 있는 꼴을 봐야 한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어.”

엘시어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진저리를 치자, 메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버려둬.”

“정말로 그냥 내버려둘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 아니야.”

“정말로 됐으니까 하는 말이야. 난 솔직히 쟤도 그냥 불쌍해.”

“뭐?”

엘시어가 얼굴을 팍 찌그러뜨리며 묻자, 메이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너, 쟤가 아까 어디 보는지는 봤어?”

“아니? 그런 걸 볼 새가 어디 있어. 어딜 봤는데?”

“페리윙클. 무슨 과제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 하는 짓인지.”

“과제 평가라니? 설마…… 저 자식이 그냥 널 싫어해서 저 난리를 친 게 아니라, 페리윙클에게 과제 받듯 일을 사주받아 저런 짓을 벌인 거라고?”

엘시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외치자, 메이는 턱짓으로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는 남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도 봐. 교수님만 없으면 금방 멀쩡해져서 걸어 나갈걸?”

그녀의 말에 엘시어는 허, 하, 하는 헛웃음만 내뱉다 말했다.

“저거 진짜 웃긴 놈들이네? 본인이 악감정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시켜서…… 아니, 그래도 나는 못마땅한데!”

“나도 못마땅해.”

“그런데 저 녀석들에게 왜 면죄부를 주려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담담하게 이어지는 메이의 말에 외려 엘시어가 분통이 터져서는 외쳤다.

“그냥 나는 원흉은 뒤에 있는 놈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무래도 너는 내가 저놈을 봐주겠다는 소리로 이해한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면 곤란해.”

“그럼 뭔데.”

“너무나도 한미하고 하찮아서, 굳이 타인의 손까지 빌려 가며 일을 벌일 가치가 없는 놈들이란 뜻이야.”

“아……. 그런 의미의 ‘내가 알아서 해’였나.”

엘시어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도 뭐, 한동안 엉덩방아로 유명세 좀 타겠지.”

“그건 좀 통쾌한데. 어쨌든, 저 녀석을 어찌할지와는 관계없이 너는 지금 위험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애초에 나와 붙어 있어서 좋을 건 없을 거라고 했잖아.”

메이가 기분 나쁘게 그런 소리는 왜 또 꺼내느냐며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 아파! 그리고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어쨌든 당분간은 진짜 가능하면 붙어 있자고.”

프라이버시 침해라며 거절당하면 미행을 해서라도 그녀의 주변을 관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엘시어는, 주먹을 불끈 쥐며 그녀의 곁에 바짝 붙었다.

엘시어는 이 모든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애초에 페리윙클만 하더라도 그랬다.

솔직히 그냥 열등감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제가 더 잘나고, 제가 자신의 앞길만 본다면 남에게 그리 행동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극복해 낼 수 없으니, 타인을 끌어내려 자신의 밑에 두려고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됐어.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그리고 페리윙클에게 한 방 먹여서,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는 거다.

엘시어는 메이에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뭔가 감이 좋지 않아. 가능하면 붙어 있자.”

“나 오늘 외출 일정 있는데?”

“뭔데.”

“여름옷 사러. 그런데 겸사겸사 소형 무장도 하나쯤은 더 찾아보면 괜찮을 것 같아서, 좀 발품을 많이 팔 예정이야.”

“추가 무장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네. 같이 가.”

“나 쇼핑에 시간 좀 걸리는데?”

“그래 봤자 몇 날 며칠 걸리지는 않을 것 아냐.”

몇 날 며칠이라니.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하는 엘시어에게 메이는 떨떠름한 낯으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그럼 같이 가.”

“참 나. 그러든가.”

메이는 이 친구 참 이상하네,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 * *

출발 전, 엘시어는 누이에게 오늘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누님. 오늘은 정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련 시간에 메이에게 고의로 상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다분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악질적인 괴롭힘들을 스스로 잘 타파해 냈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는 점점 그녀 혼자서 상황을 이겨 내기가 어려워질 듯했습니다.

누님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페리윙클은 이제 학우들, 아니 동급생들까지 동원해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메이가 크게 다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황을 막고 싶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가능한 한 메이와 모든 행동을 같이하려 합니다.

또, 매수를 당한 건지 설득을 당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개자식들을 증인으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럼 이후 또 다른 일이 있을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수도의 크라이언트 저로 편지를 부친 엘시어는, 약속 시간까지 벌써 10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달려 나갔다.

팔짱을 끼고 오른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메이는, 뛰어오는 엘시어를 새초롬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혼자 있는 게 위험해서 같이 다녀야 한다며?”

“미, 미안.”

엘시어가 헉헉대며 숨을 고르자, 메이는 그 모습을 또 약간의 한심함과 안쓰러움으로 보다 입을 열었다.

“됐어. 앞으로는 서로 약속을 잘 지키자고.”

메이는 미리 학교에 신청을 해 두었던 외출용 마차를 찾아 나섰다.

주차장에 주르륵 서 있는 마차들 사이를 훑으며 돌아다니던 그녀는, 본인의 메모와 마차 번호를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AK013……. 아, 저기 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자, 마부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부가 보였다.

“마부도 대기 중이네.”

“우리가 조금 늦었으니까. 빨리 와.”

메이는 한 차례 그를 타박하고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마부는 자신이 담당한 학생들이 오자 학생증을 확인한 뒤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마르디니 광장으로 가 주세요.”

이랴!

채찍 소리가 들리고, 두 마리의 말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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