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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48화 (48/128)

<48화>

“전하.”

엘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클라우디스가 말했다.

“영애는 별로 마음이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크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리한 거다.”

“……영리하다니요?”

“제 몸값을 더 올리려는 거야.”

크레센트의 분석에 클라우디스는 과연,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값이라.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너 정도면 괜찮은 보상일 거라 생각했는데……. 일단 당분간은 형님 쪽 동향을 잘 살펴야겠다. 무조건 형님보다 한 단계 높여서 주면 돼.”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저 패는 내가 가지고 싶다. 오늘 보니 더욱 탐이 나는군.”

“……노력해 보겠습니다.”

왠지 일이 쉬이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에, 클라우디스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 * *

“전하. 여기까지 정말로 오시다니요.”

엘렌이 제 말을 듣지 않은 케이든을 야단쳤다. 그러나 그는 크레센트가 치근덕대던 모습이 떠올랐는지 외려 격분해 외쳤다.

“하지만 정말로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합니까. 그대의 우수함은 벌써 다 소문이 났지, 그대는 파티를 간다지. 아니나 다를까, 크레센트 같은 놈이 그대에게 들러붙지!”

“하지만 적당히 혼란을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저를 신경 쓰는 만큼 다른 곳으로 주의가 분산될 텐데요.”

“그건 물론 그렇지만 그만큼 따르는 리스크가 신경 쓰인다는 말이지요.”

케이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크레센트가 클라우디스를 굳이 소개시킨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뻔히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

그런데 그의 하소연에 엘렌이 갸우뚱, 고개를 움직이며 물었다.

“그렇게 바로크 경의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 시간을 끄는 게 더 유리하지 않나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

그가 어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엘렌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전하. 혹 제가 전하를 배신하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뭐, 아, 아니!”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배신이라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당연히―”

그냥 당신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당연히?”

“당연히…….”

뒷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 그는 움직이던 입술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전하?”

그가 대답하지 못한 채 말을 흐리자, 의아하게 여긴 엘렌이 그를 재촉했다.

그냥 성 안에 계속 숨겨 두는 게 좋았어. 아파하는 게 안쓰러웠어도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내가 마련해 준 곳에서 나와 같이 지내면 되잖아.

정신없이 뻗어 나간 생각이 어떠한 그림에 다다르자, 그는 퍼뜩 놀라서는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전하? 어디 좋지 않으신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엘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바짝 가까이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피는 엘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을 반사해 반짝거리는 눈동자,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서 넘치는 생기.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저 여자의 저런 모습은, 이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있는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일 테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제 배신이 염려되어 걱정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말했잖습니까. 그냥, 선지자는 그대고 난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니까. 등대의 소중함은 망망대해에 있는 자가 가장 잘 아는 법이지요.”

저 여자가 그리는 결말에, 아마도 손을 잡고 있는 이는 나뿐일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

이 이상 생각하지 마.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아카데미로 돌아간 엘시어를 반긴 것은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메이는 코끝까지 내려온 엘시어의 다크서클을 보고는 기겁해서 물었다.

“……안 피곤하니?”

“피곤해.”

“그럼 굳이 왜 오는 거야.”

“필요하니까.”

엘시어는 뻑뻑하게 당기는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메이 소르본과의 대화 그 이후, 엘시어는 가능한 한 시간을 내어 메이의 근처를 맴돌아 왔다.

처음 그녀의 시간표를 받아 보았을 때는 솔직히 조금 막막했다.

그녀와 그간 데면데면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서로 겹치는 수업이 없었던 것이다.

오, 제기랄.

엘시어는 앞으로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누이의 당부에 따라 그는 최대한 메이의 근처를 맴돌았다.

그리고 최대한 빡빡하게 시간을 잡아 그녀가 듣는 강의실에 모조리 출석했던 날.

그는 곧장 해당 과목들의 교수들을 모두 찾아가 청강을 부탁했다.

[교수님. 제가 그간 안일했습니다. 이곳에서 배울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가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사실 학우들과 엉뚱하게 부딪쳤다 뿐이지 학습 태도 자체는 굉장히 좋았던 그였기에, 교수들은 모두 흔쾌히 그의 청강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 보였다.

처음 수업에 함께 출석한 그를 본 메이는 질린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진짜 이걸 다 듣게?]

[그래.]

엘시어로서도 이런 미친 스케줄을 수행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 함께 일정을 수행해 본 뒤, 그는 곧장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그간 느껴 왔던 것보다 그녀가 느껴 왔던 페리윙클 패거리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컸던 것이다.

그녀를 향한 수업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원래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또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해 보았겠지만, 그가 겪어 본 바로 그녀는 꽤 호탕한 성격에 스스럼없이 친해지기 좋은 이였다.

그런 이에게 이런 노골적인 분위기라니. 보통 학우들 간의 단순한 다툼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꺼림칙함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그는 체력의 한계까지 쥐어짜는 스케줄을 수행하기로 결심했고, 지금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너 그러다 쓰러진다.”

“쓰러져 봐서 아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사지 건강하게 태어난 백작가 도련님이 쓰러져 볼 일도 있나?”

메이가 불신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엘시어는 이거 왜 이러냐는 듯 그녀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처음에 누님이 혼인으로 집을 떠나셨을 때 그랬어.”

“그래? 무엇 때문에?”

“빨리 한 사람 몫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기사가 돼서 누이에게 가겠다고 난리를 쳤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다른 공부를 좀 더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뭐…… 네 누이가 혼인할 때면 충분히 어렸잖아.”

메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때 무언가에 그렇게 몰두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대단한 거야.”

“그래. 그리 평가해 준 것은 고맙고, 어쨌든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든가.”

그렇게 계속 티격태격하며 두 사람은 걸어갔다.

엘시어는 제 누이의 당부를 떠올렸다.

[페리윙클은 제 자존심에 어떻게든 무슨 짓을 저지를 놈이야. 안 되면 안 되는 만큼 더욱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 테니 지나치게 자극하지 말고. 알았지?]

누이는 제가 어지간히 걱정되었는지 손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네 몸이 다치지 않을 정도의 적정선을 지키면서, 그들이 그녀에게 상해를 입히려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해.]

[어떻게요?]

[글쎄. 직접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증인이 있으면 되겠고, 누군가를 매수한다면 매수 관련 증인을 확보하면 되겠지. 이 경우가 쉽기는 더 쉽겠구나. 분명히 대금이나 신분 증명을 위한 물품이 오갔을 테니.]

어쨌든 그래서 엘시어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굴기 시작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누이의 일 때문에 그래? 어쨌든 잘 해결됐잖아.]

그의 룸메이트인 오즈 가네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지만, 엘시어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랬던 탓에 주변에서는 그가 누이의 이혼으로 인해 압박을 받는 모양이라며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제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던 탓에 피곤했던 엘시어가 길을 잘못 들자, 메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 검술 대련 수업이야.”

“아.”

“많이 피곤하면 오늘 하루 정도는 대련 쉬지그래? 그러다 너 진짜 다친다.”

엘시어는 제 몸 상태를 점검해 보고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럴까. 나 없어도 짝이 맞나?”

“안 맞으면 교수님 계시잖아. 너 없을 때는 원래 항상 그리해 왔어.”

“퍽 불편했겠네.”

“외려 더 수준 높은 전문가와 검을 섞을 수 있으니 다행인 부분이었지.”

그녀가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히 말하자, 엘시어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생각하니 그것도 그렇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쉬고 있어.”

“교수님께 말씀드려 보고.”

다행히 검술 대련 수업의 교수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해 주었다.

“그래. 네가 무리하는 것 같기는 했지. 어차피 너는 청강생이니,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있어라.”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러면 난 오랜만에 메이와 대련을 해 볼 수 있겠구나. 그간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봐야겠어.”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메이의 짝을 자원해 온 학생이 있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지?”

“저도 파트너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요.”

“그래? 그러면 마침 짝이 맞겠구나. 그 학생에게는 내게 오라 전하고, 넌 메이와 조를 짜서 대련을 하도록.”

“예.”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윽!”

“메이!”

대련이 시작되자, 그는 실수인 듯 그녀의 얼굴께를 계속해서 노리기 시작했다.

“아, 미안. 파트너랑 네가 신장 차가 좀 있어서 조절이 잘 안 되네.”

“……알았어.”

메이는 으득, 이를 갈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럼 다시 간다.”

그녀는 그의 정면으로 뛰어 들어갔다.

챙!

정면에서 검이 맞부딪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메이의 검이 한 번 튕겼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검로를 바꾸어 다시 짓쳐 들어갔다.

촤아악!

맞닿은 검날이 서로 미끄러지고,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대의 검보다 더욱 몸을 낮춰 아래에서부터 파고든다.

“윽!”

곧장 제 목을 노려 들어오는 검에 그는 뒤로 크게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잠시!”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들어 휴식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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