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몸값을 올리려는 건가?”
“예?”
케이든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모리스가 반문했다.
“하지만 난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대우를 해 주고 있어. 영애도 그 사실은 알 텐데.”
그런데 왜 이리 애를 태우는 거야.
케이든이 답답한 마음에 벅벅 제 머리를 헤집자, 영문도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안타까이 보고 있던 모리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일의 일이 생기더라도 테리어드가 있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그러라고 보낸 체셔 경이기는 하지. 그런데 왜 난 그걸 들으니 더 속이 꼬일까?”
“그것만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 자네에게 대답을 구한 게 아니야.”
케이든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눈독. 눈독을 들인다고.
그의 머릿속에서 수상쩍은 눈빛으로 엘렌을 훑는 괴한들이 나타났다.
그 괴한은 검은 그림자에서 트라이아 공작으로, 또 제 이복형제인 크레센트로…….
“오, 제기랄. 안 돼.”
케이든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예?”
“이거 하루만 더 미루지.”
“전하.”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 같은 소리에 모리스가 얼굴을 굳혔다.
“안 돼. 안 되겠어. 난 지금 가 봐야겠다. 느낌이 좋지 않아.”
“지금 가셔도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실 겁니다.”
하지만 케이든은 이미 외투를 집어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도 어서 따라와. 트라이아로 갈 거다.”
“…….”
모리스는 아연해진 얼굴로 책상 위의 서류를 봤다가,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벌써 저만치까지 나선 황태자의 발걸음은 빨랐다.
파티에 참석할 거다! 자선 파티니 검소하게! 하지만 최대한 화려하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갖다 붙인 그는 냅다 준비해서 트라이아가로 튀어 갔다.
결국 한창 파티 중일 때 트라이아가의 정문을 밟을 수 있었던 그는,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기겁해 외쳤다.
“크레센트 저 자식이……!”
크레센트 이스타지오, 제 이복형제이자 인생 최대의 숙적인 2황자가 엘렌에게 치근덕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이곳에 와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쿵쿵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에서 유독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그것도 꽤나 화려하게 꾸민 남자.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씩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낯을 보니 그가 누구인가.
이곳에 초대받았을 리가 없는 케이든 이스타지오 황태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황자가 파티에 등장한 데 대해 놀라움을 표했고, 그는 그 사이를 헤집고 엘렌에게 다가갔다.
엘렌에게 눈웃음을 치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던 크레센트는 갑자기 제 앞으로 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형님?”
케이든이 빈정대며 말했다.
“넌 남의 것을 그만 탐낼 필요가 있어, 크레센트.”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 크레센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 맞느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못 볼 것을 본 표정이구나.”
“초대장도 없이 난입하시다니 놀라워서 말입니다.”
그의 지적에 금방 다시 웃는 낯으로 변한 크레센트는, 테리어드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했다.
“여기 체셔 경은 파트너 자격이라도 챙겨 왔으니까요.”
테리어드의 얼굴이 똥 씹은 것인 양 굳었다.
엘렌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테리어드의 모습에 당황했다가, 케이든의 난입부터 시작된 급전개에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소리. 파트너 자격으로 참석한 건 나야.”
“참 재밌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체셔 경은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제때 올 수 없는 나를 대신한 기사지.”
“아하.”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팔짱을 낀 크레센트가 허리를 쫙 펴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나저나 형님. 다 똑같은 제국의 백성인데 어디는 식량 지원을 하고, 어디는 하지 않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직 이들 사이의 동맹은 굳건하지 않다.
크레센트는 엘렌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는 케이든을 보고 확신했다.
아마도 케이든은 단순히 이혼을 돕는 데 대한 대가로써 막대한 식량을 받아 챙기고, 그것의 사용처는 독단으로 정했을 것이다.
“엄연히 조세 부담이 다른데 당연하지. 지원을 통해 비로소 공평해진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나?”
“그 세율을 통과시킨 것은 결국 폐하 아니십니까.”
“하.”
케이든은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는 제 이복동생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서로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지.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그저 다 같이 힘든 시기, 서로 도와 가며 지내보자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나, 영애?”
엘렌은 갑작스레 제게 튀어 온 불똥에 목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이 사람들 왜 이래. 왜 여기서 싸워.
“난 영애가 저런 거금을 선뜻 내놓은 것이 최대한 많은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길 원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재차 물어 오는 크레센트의 말에 엘렌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황실에서 현명함을 발휘해 주실 것이라 믿고 있답니다.”
하지만 크레센트는 집요했다.
“형님의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는 식량 지원도 영애가 선의로 내놓은 것들이잖아. 기부자의 의사도 반영을 해 줘야지.”
“황실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신하가 생각할 일 아니겠습니까. 결정은 황실의 몫인 것을요.”
크레센트가 계속 엘렌을 물고 늘어지며 살살 신경을 긁어 대자, 케이든은 열이 뻗쳤는지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그러면 너도 사비로 식량을 좀 사들여 와 보지 그래? 그리고 네가 기부하면 되겠군.”
“형님. 아쉽게도 제가 품위 유지비로 들고 있던 자금은 오늘 여기서 모두 기부한지라.”
하지만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던 크레센트의 낯은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왜. 잘난 외가의 힘이 있잖아?”
외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크레센트는 낯을 급속도로 굳히며 물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뭡니까?”
“너야말로 자꾸 그러는 저의가 뭐야?”
“그야 이스타지오의 백성들을 위해서지요.”
“그러면 이렇게 말싸움이나 벌일 생각을 하지 말고, 최소한 영애처럼 무언가 행동이라도 해. 행동하는 사람을 포섭해서 네 공으로 돌리려는 것, 빤히 보이니까.”
“그러는 형님도 결국 남의 공을 가로챈 것밖에 더 됩니까?”
“내 경우엔 협력이지. 어차피 다 알고서 말하는 것 아닌가?”
“그 협력, 저도 좀 같이 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경쟁 사회이지 않습니까, 형님.”
“방금까지 서로 도와 보자며 협력을 제시하던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군.”
두 사람의 공방이 빠르게 오가고, 파티에 참석해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거물과 그들의 싸움에 흥미진진한 관심을 보였다.
조용히 있다 사라지는 것은 글렀음을 깨달은 아발란쉬 후작은, 결국 한숨을 쉬며 중재를 위해 나섰다.
“두 전하께서는 이만 고정하시지요. 두 분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장소가 적절치 못한 듯합니다.”
아발란쉬는 현재 황제파에게도, 귀족파에게도 주요한 인물이었다.
양측 모두 아발란쉬에게는 아쉬운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곧잘 먹혀들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고, 그 틈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전면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만 가시지요.”
“전하.”
클라우디스와 테리어드는 각각 저희의 주군들이 더는 헛짓거리를 할 수 없도록 앞을 막아섰다.
그 덕에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리게 되었으나, 그때 크레센트가 물러서다 말고 씩 웃으며 말했다.
“후작. 그리고 영애. 다음 주쯤, 영지로 내려가기 전에 같이 한 번 사냥을 나가지 않겠어?”
“예?”
“전 사냥은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후작의 거절을 산뜻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영애는 아직 경험이 없다고 했지? 가면 꽤 재미있을 거야. 이참에 친교의 범위도 조금 더 늘려 보고, 새로운 취미도 찾아보고.”
그는 저를 노려보고 있는 케이든을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사업도 중요하지만, 가끔 새로운 경험도 해 보고 숨통도 틔워 주어야지. 어쩌면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보내는 ‘저 사람은 좋은 인선이 아니다’라는 신호에, 케이든은 열이 부글부글 치미는지 그를 눈빛으로 뚫어 버릴 듯 쏘아보았다.
“기대가 되는군요. 초대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클라우디스, 들었지?”
“예, 전하.”
“그렇게 알고 일정을 짜 보지.”
“알겠습니다. 전하.”
크레센트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케이든은 전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치미는 화로 이글이글 끓는 눈을 하고 있던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처량하게 눈매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영애.”
엘렌은 속에서부터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저래서야 티가 너무 나잖아.
“전하. 오늘 주셨던 호의는 감사했습니다.”
엘렌이 선을 긋는 듯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자, 케이든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낯을 보고 하마터면 정말 웃음을 터뜨릴 뻔한 그녀는, 이 이상 거리를 두면 저러다 눈물까지 맺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타협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절 오래 기다리게 하셨으니 여기서부터는 제 말에 따라 주세요.”
엘렌은 그 말과 함께 케이든의 팔 위로 손을 올렸다.
“어, 예? 아, 물론이지요.”
케이든은 잠깐 생각이 멈춘 듯 버벅댔다.
“그럼 황자 전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어지는 상황에 둘 사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크레센트가 말했다.
“아…….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닙니다. 보내 주시는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엘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케이든을 끌고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