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엘렌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던 테리어드가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엘렌.”
그는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아까 아발란쉬 후작이 입장했어. 조용히 있다 가고 싶은 모양이던데.”
그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자, 저 멀찍이 한구석에 있는 아발란쉬 후작이 보였다.
“그러게요. 그런데 내 꼴을 보았으니 식겁했겠어요.”
“대충 후원금만 맡기고는 도망갈지도 모르지. 나라면 백 퍼센트 그랬을 거야.”
“일단 가 보죠.”
그들은 후작이 무언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 전, 빠르게 접근을 시도했다.
다가가는 과정이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중간에 다른 음료도 한 잔 받아 마시며 슬쩍 자리를 옮기다, 적당히 거리가 가까워졌을 즈음 엘렌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발란쉬 후작.”
구석에서 조용히 잔을 기울이고 있던 후작은, 누군가가 제게 과감히 말을 걸어오자 뚱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체셔 경? 오랜만이군. 그대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호스트에게 초대받지는 못했지요. 여기 엘렌의 파트너로 참석했습니다.”
테리어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엘렌을 소개하자, 그녀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크라이언트가의 엘렌입니다.”
“로널드 아발란쉬요. 영애는…… 사실상 초면이로군.”
“어머, 그랬나요? 남동생에게 조카분의 이야기를 하도 들었더니 초면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조카?”
“소르본 영애 말씀이에요.”
메이 소르본의 이야기가 나오자, 냉랭한 낯으로 그들을 훑어보던 후작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사르륵 녹아내렸다.
“아, 메이를 아는가?”
“예. 둘이 제법 친한 모양인지 아침 운동도 같이하곤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 애가 최근 친해졌다고 이야기하던 친구가 크라이언트 영식이었군. 편지엔 이름이 적혀 있질 않아 몰랐네.”
웃음기가 져 풀린 눈매와 광대, 그리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들이 처음 인사를 건넸을 때 보았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요즘 영애를 보고 배웠는지 아이가 제법 의젓해져서 한시름 놓았답니다. 자꾸 사고나 쳐 대는 통에 어찌해야 하나 누이로서 난감하던 차였거든요.”
엘렌이 웃으면서 말하자, 후작은 껄껄 호쾌한 웃음과 함께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메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꽤 괜찮은 친구인 것 같더군.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네만,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음을 믿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테리어드가 끼어들었다.
“거봐, 엘렌. 조금쯤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좋아.”
“그리고 테드처럼 대형 사고도 쳐 보고 말이죠?”
“오, 엘렌. 그건…….”
아카데미 재학 시절 사고뭉치로 유명했던 테리어드가 진땀을 빼자, 그들을 보고 있던 후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부딪쳐 보면서 배우는 법이지. 그 나이에 시행착오를 겪어 보며 깨닫는 과정 아니겠나.”
“그러려나요. 가능하다면 어딘가에 부딪히기 전에 먼저 깨달아 줬으면 좋겠는데.”
엘렌이 염려 섞인 어조로 말하자, 후작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나중에 아이들 일로 또 만나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크라이언트 영식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시오.”
“그럼요. 저도 소르본 영애에게 안부 부탁드릴게요.”
아마도 후작은 후일 자신의 저런 사고방식을 크게 책망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고의 규모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컸으니까.
아이가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뒤에 서 있어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그에게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오늘의 주요 인사 두 사람이 모두 여기에 있었군.”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익히 알고 있는 은발이 있었다.
“황자 전하?”
“왜 이런 구석에 있나, 주역들이.”
‘크레센트 황자……!’
엘렌은 살짝 당황했다.
트라이아의 접근까지는 예상했었지만, 그 자리에 황자가 버젓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공작 부인도 굳이 구휼 사업을 언급했었지. 그런 걸 보면 자극이 지나치게 과했던 모양인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도 참석하셨을 줄이야.”
“후작이 참석할 만한 자리라 생각했거든. 내 그래서 냉큼 쫓아왔지.”
“저 같은 이가 뭐라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크레센트가 천연덕스레 하는 말에, 아발란쉬는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오면 안 될 자리에 온 것도 아니잖나.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쳐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를 받네.”
크레센트는 시종일관 여유롭게 웃으며 아발란쉬의 인사를 받아쳤다.
“뭐, 사실 후작만 보고 행차하기에 먼 곳이기는 했지.”
그는 은근슬쩍 타깃을 바꾸어 엘렌에게로 다가갔다.
“크라이언트 영애가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야.”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난 그대와 같은 이를 처음 봤거든. 이렇게 인사하는 것도 처음이지, 아마?”
촉.
그녀의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경계심으로 움찔거리자, 엘렌은 그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예.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크라이언트가의 장녀, 엘렌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그건 알고 있어. 그대를 보려고 왔다니까. 그대가 궁금했다고.”
황자는 파트너 소개까지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중간에 말을 잘랐다.
“……이혼녀 타이틀이 확실히 드물긴 하지요.”
“엘렌.”
대놓고 무시하는 황자의 모습에 굳어 있던 테리어드가, 엘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작게 나무랐다.
“하하,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알잖아.”
그는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잘 알고 있는 듯, 가볍게 눈웃음을 쳐 보였다.
그녀의 눈에도 제법 유혹적인 것이, 과연 저런 표정을 처세술이라고 익혀 사용할 법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 견식이 좁았어. 그대와 같은 강자는 처음 봤지.”
“과찬이십니다.”
“나는 그대와 같은 이들을 좋아해. 아주 귀히 여기지.”
그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엘렌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래, 이를테면…… 그대, 매사냥은 즐기나?”
“사냥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궁금하면 다음에 같이 매사냥이나 가지. 나는 가끔 클라우디스와 함께 가곤 하거든.”
“클라우디스라면?”
“여기 있는 바로크가의 장남 말이야.”
“아.”
엘렌이 낮은 감탄사와 함께 그를 쳐다보자, 클라우디스 바로크는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마 다음에 매사냥을 함께 가게 된다면 마주치게 될 텐데, 지금 안면을 익혀 두는 게 좋겠군.”
“클라우디스 바로크입니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연회복 차림이었던 테리어드와 달리, 황자를 수행하는 기사로서 따라붙었던 그는 기사단의 제복을 갖추고 있었다.
그 제복에 맞게 절제된 동작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엘렌 크라이언트입니다.”
손등에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고, 그는 절제된 것인지 굳은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 얼굴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보다시피 이 녀석은 기사라 그런지 무뚝뚝하고 고지식하기 그지없어. 영애가 사업을 한다지? 그 수완을 바로크 경이 조금만 배워 왔으면 좋겠는데.”
“……전하.”
클라우디스가 난처한 기색으로 황자를 불렀다.
“전하. 하지만 제가 경험이 없어 누가 되지는 않을지…….”
엘렌이 말을 얼버무리자, 클라우디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으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으니,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편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경.”
일부러 말을 얼버무려 확실한 약속을 피하려 한 것이었는데, 알고 그런 것인지 모르고 그런 것인지 클라우디스에게 차단당해 버린 엘렌은 애써 웃었다.
‘아, 이거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사실 매사냥 정도야 함께 가도 그다지 큰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더욱 긴밀한 정보를 얻어 내기는 쉬웠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른 귀족들을 물색하러 온 거였단 말이지. 황자랑 바로 엮이게 될 줄은…….’
그런데 그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뒤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남의 것을 그만 탐낼 필요가 있어, 크레센트.”
눈앞의 2황자와는 대비되는 듯한 흑발.
그러나 그들이 서로 혈연임을 증명하는 맑은 사파이어의 눈동자.
케이든 이스타지오, 1황자인 황태자가 등장했다.
* * *
휘릭. 휘릭.
케이든의 손에 잡혀 있는 펜이 팽이처럼 정신없이 돌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말했다.
“전하. 오늘까지 서명을 마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케이든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괜찮을까?”
그가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엉뚱한 질문을 하자, 모리스는 잠시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 말했다.
“괜찮겠지요. 그래도 백작가 자제 둘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어떡할까.
모리스의 지적에 제가 일에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든은 ‘집중이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이야.’ 하며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모든 귀족이 호의적일 거야. 그러니 분명 큰 위협이 있진 않을 테고……. 경이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예. 어찌 되었든 현 시장 최고의 매물이니까요.”
“시장?”
“정치든, 혼인이든 말입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발끈해져서는 말했다.
“둘 다 내가 선점했어.”
“압니다. 하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젠장.”
그냥 태자의 총애를 받는다고 공언하면 안 되는 건가?
케이든은 괜히 속이 뒤틀리는 기분에 애꿎은 펜만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