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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43화 (43/128)

<43화>

‘어떻게 됐을까.’

남자가 등진 햇빛이 그의 머리칼 위로 하얗게 부서졌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옅은 새벽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레센트 이스타지오.

케이든 이스타지오의 이복동생이며,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 소생의 2황자이자 바로크 후작가를 제 외척으로 두고 있는 이였다.

크레센트는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언제 오지.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그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들어온 이의 이름은 클라우디스 바로크.

크레센트의 종형제로, 그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들고 온 사람이었다.

“가만히 기다리는 건 지루해서 힘들어. 어떻게 됐지?”

“정말로 이혼했습니다. 의외로 평화롭게 진행되더군요.”

“분위기는?”

“어느 정도 사전 협의가 있었는지 큰 마찰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크레센트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무엇이 오갔기에 그랬을까? 크렘벨이 그런 자가 아닌데.”

“글쎄요. 애초에 돈을 보고 한 결혼 아닙니까.”

“그래……. 돈. 그렇지.”

클라우디스의 말에 혼자 중얼거린 크레센트는 손뼉을 짝, 치며 일어섰다.

“외출 준비를 좀 해 줘.”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제는 내가 움직여야지. 트라이아 공작에게로 간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클라우디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준비를 위해 먼저 방을 나섰다.

“그럼 어디 화제의 인물을 만나러 가 볼까.”

크레센트는 가벼운 콧노래와 함께 외투를 집어 들고 제 방을 나섰다.

* * *

트라이아 공작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층계참을 날 듯이 오르며 제 부인을 찾았다.

“아쉴리!”

격의 없는 호칭이었지만, 귀족들 중 보기 드문 잉꼬부부였던 그들은 그런 호칭이 더 익숙했다.

저를 찾는 목소리에 트라이아 부인 아쉴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드웨인. 무슨 일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트라이아 공작은 제 아내의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아쉴리, 혹시 크라이언트 영애와 친분이 있소?”

남편의 다급한 물음에 아쉴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친분……. 조금 애매한데요. 무슨 일 있나요?”

“이번 이혼과 관련해서 크레센트 전하께서 알아보고 싶으신 게 있으신 모양이오. 파티를 열면 그녀가 참석을 하겠소?”

“어머, 물론이죠. 그런 것이라면 올 거예요.”

얼굴에 당혹을 묻힌 채 쏟아 내는 남편의 말에 아쉴리는 가볍게 그의 뺨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다행히 예고해 놓은 것이 있거든. 오늘 바로 초대장을 작성해서 날릴 테니 걱정 말아요. 많이 급한 일인가요?”

“조금.”

“요즘 나라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드웨인은 제 부인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그래도 우린 괜찮을 거요. 그대도 나도 그 정도 능력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

“알아요. 어쨌든 그렇다니 급한 파티의 명분으로는 자선 파티가 적절하겠군요.”

“자선 파티라, 그거 괜찮군.”

드웨인은 주름이 지기 시작한 눈가를 접으며 미소 짓고는, 아쉴리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런데 드웨인.”

그녀가 나직이 부르자, 그녀의 뺨에 키스를 남기던 공작이 눈짓으로 무어냐 물었다.

“난 크라이언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요즘 그 이름 덕에 아주 시끌시끌해.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얻어야 할 패가 아니겠소.”

“그렇지요?”

아쉴리는 살짝 웃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걱정하지 말고, 이만 들어가서 씻어요.”

그녀는 남편의 뺨에 마주 키스했다.

* * *

길었던 수도의 5월이 끝났다.

이제 공식적으로 크라이언트 소속이 된 엘렌은 당당히 크라이언트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맞이하는 가족의 따스한 품과 그녀의 취향을 아는 사용인들.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가구들과 좋아하던 정원, 사랑했던 모든 것.

그 속에서 이혼 첫날의 미묘한 기분은 차츰 희석되어 가고, 이제는 홀가분함만이 남아 그녀를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던 5월의 끝자락.

크라이언트 저에 우편이 하나 도착했다.

“우편이라고?”

“예. 트라이아가에서 왔습니다.”

집사가 내미는 쟁반 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봉투에 호기심이 일었던 엘렌은 곧바로 페이퍼 나이프를 들었다.

봉투를 찢자 보인 것은 고급스러운 은박을 입힌 초대장이었다.

“……자선 파티라니. 이런 시기에?”

“혹시나 했는데 정말 파티 초대장이었습니까? 날짜는 언제인지요?”

“사흘 뒤.”

“촉박하군요.”

예정에 없던 엘렌의 파티 일정에 머리가 복잡한지 집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러니 보통은 아예 열지를 않지만.”

이미 내려간 가문도 몇몇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왜 굳이.

엘렌은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따져 보았다.

속 편하게 정말 자선 사업이나 하자고 귀족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아닐 테고…….

엘렌은 일전에 이혼이 성사되면 한 번 초대하겠다던, 트라이아 공작 부인이 황궁 연회에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목적인가?”

엘렌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작 부인이 나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했지.’

맞으면 좋은 거고, 아니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가 접선을 시도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주. 아주 화려하게 가지. 물론 우리 부티크 작품으로.”

“예, 아가씨.”

“당장 가서 오늘 내로 수석과 함께 준비를 마쳐서 오라고 전하고, 지금 내가 써서 주는 편지를 각각 체셔 저와 태자궁으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집사는 엘렌이 휘갈긴 편지를 받아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마침 잘됐어. 어차피 아발란쉬 후작을 한 번 볼 기회도 필요했고.’

중립파까지 모두 초대한 파티라면 좋겠는데.

트라이아 공작가는 귀족파의 중심 세력이었으니 모든 세력을 아우르는 대규모 파티도 충분히 주최할 만했다.

엘렌은 초대장을 서랍에 넣어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샐리. 태자궁으로 갈 거야. 다들 준비를 하라고 일러 줘.”

“네. 아가씨.”

원래라면 수도를 떠나기 전에나 한 번 볼 이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조금 이르더라도 오늘 다시 얼굴을 봐야 할 듯했다.

* * *

“뭐? 오늘 저녁?”

케이든은 크라이언트 저에서 당도한 소식에 당황해서 외쳤다.

“예. 영애의 방문은 가능한 최우선으로 잡으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다고 당장 몇 시간 후라니!”

미친 일 처리 속도에 넋을 놓고 있던 케이든이 냅다 소리쳤다.

“이, 일단 만찬을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이르게. 장소는…… 그래, 후원으로 하지. 그리고…….”

그가 정신없이 방을 오가며 떠오르는 대로 주절거리던 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코엔하임입니다.”

“들어와!”

떨어진 허락에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트라이아가에서 자선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하! 하는 비웃음과 함께 손을 올렸다.

“돈이 썩어나는 모양이군.”

“그렇다기보다, 크라이언트를 비롯해 중립파 거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 구렁이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던 케이든은 갑자기 어딘가로 생각이 미쳤는지, 걷다 말고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는 말했다.

“……오늘 영애가 온다던 게 아무래도 이것 때문이었나 보지?”

“크라이언트 영애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그래. 아무래도 공작의 파티에 가겠다고 통보하러 오는 것일 듯한데.”

“굳이 그런 일로 알현을 허하십니까?”

“아, 의논은 사전에 하기로 약속을 했었거든. 내가 먼저 제안한 거야.”

“……그렇군요.”

모리스는 제 주군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 성격에 분명 가서 또 한바탕 휘젓고 오는 게 목적일 것 같은데…….”

“어차피 갈 파티라면 그렇게 접근해서 정보라도 빼내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아는데 그냥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

“……그러십니까?”

무언가 굉장히 이상한 것을 봤다는 듯, 모리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왜 그런 얼굴로 보나?”

“……아닙니다.”

“아니, 자네는 무언가 한소리를 하고 싶을 때 그런 표정을 지어. 또 내게 무언가 불만이 생긴 게로군.”

“아닙니다.”

“됐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으니.”

“…….”

“그런데 생각을 해 봐. 태어날 때부터 같은 배를 타게 된 자네와 그녀는 다르잖아. 난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 해.”

모리스는 왜 그 불안함이 ‘최대한 잘 보여야 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토를 달고 싶지 않아 대답했다.

“예, 전하.”

“그래. 이제부터는 시종장이 할 일이 많아지겠군. 자네는 돌아가 봐도 돼.”

“알겠습니다.”

케이든은 시종장에게 말했다.

“자, 들었지? 일단 조명부터 테이블보까지 전부 새것으로, 화려하게 준비하게. 만찬에서 영애의 기분을 돌려야 해.”

“기분을 돌린다 하심은?”

“그 파티가 어디든 분명 그녀는 또 냅다 튀어갈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말이야. 하지만 내가 그 하이에나 같은 자식들의 아가리에 내 사람을 그리 쉽게 보내야겠나? 어림없지.”

“영애를 설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신경 써서 분위기를 갖추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뭐든 일단 최대한 정중한 대접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이지.”

전하. 그 설득은 결국 전하의 혀가 이뤄 내야 하는 일 아닐까요.

시종장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걸렸지만, 말해 봤자 자신이 할 일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대답했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봤자 안 될 일은 안 될 텐데.

그는 그런 속내를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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