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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42화 (42/128)

<42화>

홀을 나온 그들은 케이든의 뒤를 따라 긴 열주랑을 걸었다.

마차가 대기하는 길목. 엘렌이 입을 열었다.

“엘시어.”

“예, 누님?”

“너는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예?”

엘시어가 눈을 뎅그렇게 뜨며 물었다.

“……지금이요?”

“그래. 네게는 할 일이 있잖니.”

할 일을 꼬집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엘시어는 풀이 죽었다.

그렇지. 확실히 지금 메이 소르본에게서 눈을 떼어 놓는 것은 위험하지.

“……물론 그렇지만.”

“그건 무슨 이야기냐?”

도와 달라는 아들의 눈빛에 못 이긴 백작이 묻자, 엘렌이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아, 얼마 전에 페리윙클과 싸웠던 일이요. 영 분하다기에 주먹질 대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요.”

“이 녀석아. 그걸 가르쳐 줘야만 아는 게냐?”

저런 것을 하나하나 배워야만 안다니.

백작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엘시어를 돌아보았다.

“저는 언제나 정정당당했다고요, 아버지!”

“난 네게 손부터 쓰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정정당당한 결투였어요! 입회인까지 끌어들여서 거짓말을 한 그 자식이……!”

“엘. 소리가 너무 높아지는구나.”

엘렌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끊어 내자, 엘시어가 다시금 풀이 죽어서는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그래. 그리고 누구와 달리 배우려고 하는 것만으로 대견하잖아요, 아버지. 엘이 얼마나 성실해요.”

잘못했다가는 우리 애 기가 다 죽겠네.

바짝 쪼그라든 동생의 모습에 엘렌은 백작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 그런 점에서는 참 잘 컸지. 암.”

“들었지, 엘?”

뒤늦게 깨달은 백작이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자, 엘렌은 엘시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고 맡긴 거란다. 황궁은 다음에 전하께서 따로 불러 주실 테니 당분간만 좀 더 힘을 내 보렴.”

“다음에요?”

“그래. 방학을 하면.”

갑자기 화살의 방향이 제게 튀자, 케이든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엘렌은 그가 그러든 말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렇죠, 전하?”

‘형제 사이가 퍽 좋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남매를 구경하던 그는, 느닷없이 대화에 소환당해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물론이지요.”

“들었지? 앞으로 종종 전하께 전해 드릴 말씀이 있으면 네게 부탁하마.”

“그래요. 우린 그때 또 보지요, 영식.”

“예, 전하!”

엘렌은 그런 동생이 사랑스럽다는 듯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다, 엘시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엘. 무엇보다 네 몸이 먼저인 것은 알지?”

“당연하죠, 누님.”

“그래. 믿으마.”

금세 기분이 풀린 엘시어는 누이의 당부에 해맑은 낯으로 대답했다.

그는 곧 아버지인 백작에게도 서먹함 없이 다가가 인사했다.

“네. 그럼 아버지, 저는 여기서 돌아가 볼게요.”

“그러려무나. 가는 길 조심하고.”

“네, 아버지.”

엘시어를 보낸 뒤, 나머지 인원들은 그대로 중정을 지나 케이든의 거처인 태자궁에 다다랐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그가 상석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지요.”

그의 양옆에 엘렌과 백작이 앉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와인 한 병과 오프너, 잔 세 개와 가벼운 안줏거리인 치즈를 내려놓았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물러가 있도록.”

그의 명령에 시종들이 자리를 비우자, 케이든은 코르크 따개를 집어 들었다.

“일단 다시 한번 고생했습니다.”

퐁!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그는 잔 세 개를 채워 각자에게 건넸다.

“들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세 사람의 와인 잔이 가운데로 모여 맑은 소리를 냈다.

쨍.

엘렌이 와인 잔을 빙글, 흔들고는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자유를 쟁취해 낸 기분은 어떻습니까?”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섞여 있는 ‘자유’라는 단어에, 새삼 이 상황이 실감이 났던 엘렌은 푸흐흐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저는 이제 정말 자유로군요.”

어리석게 붙들고 있던 것들을 털어 내고, 이제야.

그녀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였다. 케이든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런데 어째 웃음이 개운해 보이지만은 않는데……. 혹 무언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그래, 엘렌. 내가 보기에도 표정이 좋지 않구나. 무언가 아직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게냐?”

백작도 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엘렌이 살짝 당황해서는 말을 흐렸다.

“아니요. 아직 이렇다 할 문제는 없는데…….”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썩 기뻐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런가요?”

엘렌은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입꼬리가 조금 내려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게. 나 왜 이런 얼굴이지?

“글쎄요. 일단 아주 홀가분한데요. 처음 그 저택을 빠져나왔을 때가 생각날 정도로―”

엘렌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다, 저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내가 왜 그 저택을 그렇게 갑작스레 도망치듯 떠나오게 되었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어 왔는지.

아버지는 자세히 모른다.

“꽤 오랫동안 붙들려 있던 이름이었으니까 그런 걸까요?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직은 조금 낯선가 봐요.”

그녀는 애써 태연히 말했지만, 그녀로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는 몰랐다.

그냥, 정말로 오랫동안 제 것이었던 것을 놓아 버린 그 느낌이 어색해서일까.

엘렌은 그리 말하며 다시 활짝 웃어 보였다.

백작은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꾹, 힘주어 잡아 툭툭 쓸어내렸다.

“그래. 4년이 길기는 했지. 네가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겠느냐…….”

“괜찮아요. 아버지.”

“그래요, 백작. 그래도 축하할 날 아닙니까.”

케이든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짐짓 크게 웃어 보였다.

“슬퍼하기보다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 보지요. 이제부터 영애의 거처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그러잖아도 저도 그 부분을 딸애에게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백작이 제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쓱쓱 닦아 내며 답하자, 엘렌이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크라이언트 저로 돌아가야지요?”

“궁에서 더 머무르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케이든이 조심스레 제안하자, 엘렌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의문 가득한 어조로 반문했다.

“궁에서요? 이전까지는 크렘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대책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크렘벨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케이든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까 보니 길리언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군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까지는 묻지 않겠지만, 길리언이 돌아 버리면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조금 더 조심하자는 차원에서의 제안입니다.”

“뭐, 그래 봤자 죽이려고 밖에 더하겠습니까.”

“엘렌!”

백작이 식겁해서 소리치자, 엘렌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와인 잔을 집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크렘벨은 당장에 저를 해코지할 여유도 없으니까.”

그녀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장 하역장 사건으로 압류당한 물자가 얼마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면 지금쯤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죠. 게다가 추적은 어찌 피하고요?”

그녀의 잔에 담긴 와인이 빠른 속도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런데 그 와중 급작스럽게 자금줄까지도 바꿔야 하게 됐네요. 제 일이었다면 분명 펜을 집어 던졌겠군요.”

“그건 나도 동의한다만, 그래도…….”

“그리고 이 사태에서, 황실과 저희는 서로 그다지 긴밀한 관계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혼란을 주기에는 더욱 좋겠지요.”

“……그 또한 확실히 그렇지만.”

백작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닫자, 케이든이 조금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일전에 오간 루비 반지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말이군요.”

“예.”

“하지만 그대는 이제 공작 부인이 아닌 백작가의 여식입니다.”

“염려하시는 바는 압니다. 뭐, 모욕을 주고 싶어 하는 자들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자들은 반드시 처리할 자신이 있으니 걱정 마시지요.”

그러자 케이든은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 품속에라도 지니고 다니는 게 좋겠습니다. 여차하면 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증명할 수도 있고, 일단 그 친구의 이름이 보호자이기도 하니까.”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름이 있었나요?”

“황실의 핏줄을 지켜 주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타지오 황조는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긴 치세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니,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이야기지요.”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제 손에 이 반지가 쥐어진 탓에 황실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대수롭잖게 그의 말을 받아치던 엘렌의 안색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영애?”

“…….”

아니다. 한낱 미신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겨우 이런 반지 때문에 한 황조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니 그것은 비약이 아닌가.

‘하지만 정말이라면, 반지를 내 손에 쥐여 주었던 탓에 이 남자는…….’

엘렌은 한번 떨어져 나갔던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렇게 시간을 되돌아온 것 또한 남들이 듣기엔 어불성설인 이야기였다.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저 놀란 듯 굳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든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어딘가 좋지 않습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며 말을 흐리는 엘렌 크라이언트라니?

‘아, 혹시 불경죄가 된다고 생각해서?’

황실의 끝이라니, 확실히 감히 남들이 들었다면 크게 경을 칠 만한 말이기는 했다.

그는 크라이언트 영애도 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속으로 웃고는 말했다.

“끝나기는. 나는 지금 그대의 손에서 지켜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모든 결과는 그대의 손을 잡은 내 책임이지요.”

“……그렇지요. 제 최선을 다해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수 있도록, 안전히 치세하실 수 있도록 보좌할 겁니다.”

“그래요. 그러니 필요하다면 그 반지는 반드시 쓸 수 있도록 하세요.”

케이든이 그녀의 어깨를 툭, 가볍게 두드렸다.

엘렌은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누구인데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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