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오늘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될 것이네! 짐은 크렘벨 부인의 요구가 인도적으로 타당하다 판단, 이에 대해 크렘벨 공도 동의하였네.”
헤지스가 선언을 위한 봉을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이혼을 승인하는 바이네!”
땅땅!
좌중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크렘벨 공작 부인의 자리가 다시 공석이 되는군!
그보다 우리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거죠? 크렘벨이 그대로 투자를 해 준다던가요?
그건 문제없이 진행될 거야. 이미 확답을 받았지.
어머, 어쩜. 크렘벨도 그 사이에 제법 여유를 가지게 되었나 보군요…….
그 웅성거림 사이로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길리언과 엘렌의 앞에 종이를 한 장씩 내려놓은 뒤 후다닥 한쪽으로 물러났다.
“지금 그대들에게 전달한 것은 방금까지 말했던 내용을 문서화한 것이야. 그대들이 인을 치면, 황실에서 보관 중인 그대들의 혼인 문서를 찢고 대신 그것을 보관하도록 하겠네.”
헤지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렌은 품속에서 크라이언트 가주의 권한을 상징하는 작은 반지를 꺼냈다.
도장을 찍는 손동작은 아주 간결했다.
꾹.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반지는 서류에 제 흔적을 남겼다.
이로써 그녀가 해야 할 마지막 절차가 끝났다.
한쪽이 빠르게 일을 끝내자 당연하게도 남은 한쪽은 좌중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저 엘렌만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를 기다리던 시종은 언제쯤 도장을 찍어 주나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속삭였다.
“크렘벨 공.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길리언은 천천히 도장을 집어 들었다.
힘주어 눌린 도장 밑으로 잉크가 번져 나왔다.
팔랑.
잉크에 젖은 종이가 도장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다 떨어지자, 도장이 찍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은 곧바로 서류를 회수해 황제에게로 올려 보냈다.
“이리 가져오도록.”
황제는 그것을 받아 들어 찬찬히 확인하고는 말했다.
“길리언 크렘벨과 엘렌 크렘벨의 의사를 모두 확인했네. 혼인 증서를 가져오도록!”
황제가 손짓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 한 명이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 앞으로 내밀었다.
헤지스는 그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던 종이를 꺼내 전면으로 내보였다.
“여기, 그대들의 혼인 증서가 있네. 확인해 보도록.”
시종은 헤지스가 건넨 증서를 엘렌과 길리언 각각이 확인할 수 있도록 부산히 발을 놀렸다.
“확인했는가?”
“예, 폐하.”
“확인했습니다. 폐하.”
“그래. 다시 들고 오도록.”
혼인 증서를 받아 든 헤지스가 그것을 높이 들며 말했다.
“이 증서는, 양측의 의사에 따라 이 자리에서 파기하도록 하겠네.”
그는 그대로 양 끝을 힘주어 당겼다.
쫘악!
“이제 크렘벨가의 혼인을 증명하는 증서는 없네! 황실은 그들의 이혼을 받아들이며, 엘렌 크렘벨은 크렘벨의 성을 반납, 크라이언트가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리네!”
크렘벨가의 이혼!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란스럽게 굴기 시작했다.
재미있어하는 사람, 불안해하는 사람, 기대에 가득 찬 사람.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은 크라이언트가의 사람들이었다.
“엘렌!”
크라이언트 백작이 제 딸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고생이 많았다 울먹이며 엘렌의 손을 붙잡았다.
그 뒤를 따라온 엘시어가 그런 아버지와 누나의 등을 토닥였지만, 그 역시도 아버지의 흐느낌을 듣고는 곧 아주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
멀찍이 황실의 상석에 앉아 있던 케이든이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생했습니다.”
“아, 전하.”
엘렌이 활짝 웃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길리언이 있는 곳을 흘끔 보고는 말했다.
“굳이 이런 곳에 더 있지 말고 일단 내 궁으로 돌아가지요.”
“궁으로 말씀이십니까?”
“예. 가서 풀어야 할 회포도 풀고, 앞으로의 일도 조금 상의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가 크라이언트 일가를 보며 물었다.
“백작과 영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야 영광입니다, 전하!”
그의 권유에 아직 제대로 황궁 출입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엘시어가 신이 나서는 외쳤다.
백작이 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아들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이놈 자식이!”
윽.
낮은 신음을 뱉은 엘시어가 그대로 슬금슬금 엘렌의 뒤로 숨자, 백작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사과했다.
“제 아들이 아직 어려 철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영식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 오히려 아주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이든은 손사래를 치며 하하 웃었다.
그가 엘렌에게 팔을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그럼 이젠 정말 가 보지요.”
그의 에스코트 신호에 엘렌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의 팔 위에 사뿐히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들의 앞에 섰다.
“……길?”
“전하.”
언제 다가온 것인지 길리언이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며 나가는 길을 막았다.
“자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자, 길리언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전하. 부부간에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잠시만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라이언트 영애와?”
케이든이 딱 잘라 지칭한 ‘크라이언트’라는 호칭에 길리언이 움찔했다.
“영애. 크렘벨 공과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엘렌이 단칼에 거절하자, 케이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는군. 미안하지만 아직 사안은 조사 중이고, 나는 영애의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어.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전하. 그간 마지막 인사를 전할 시간이 마땅치 않았잖습니까.”
길리언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로 신사적인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할 만한 낯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퇴장하는 듯했던 당사자들이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어머, 저길 좀 봐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요? 분위기가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데. 왠지 이혼 절차가 너무 일사천리라 이상하다 했어요…….
엘렌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크렘벨 공.”
그녀의 부름에 길리언의 시선이 물끄러미 아래로 향했다.
“그걸 왜 전하께 물으십니까. 제게 말씀하시면 될 일을요.”
“넌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그녀를 탓하는 듯한 길리언의 목소리에는 케이든에게 말할 때와 달리 어딘가 억눌린 구석이 있었다.
그 기색이 우스웠던 엘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씀을 아무리 드려도 무시하시니, 대답이 없는 것 같았겠지요.”
“……뭐?”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공께서는 이만 제게 신경 끄시지요.”
“하. 신경 끄라?”
“예. 당신과 나눌 인사는 없고, 우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만 가시지요.”
그러자 길리언이 양미간을 좁히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 우리는 물론 이혼을 했지. 당신과 크라이언트를 존중해서 그 결정에 손을 들어 줬어. 하지만―”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무 관련 없는 사이죠.”
길리언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부부였던 사이인데 어찌 아무 관련이 없을 수가 있지?”
“방금 공께서 직접 인을 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공께서는 제게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그녀의 말에 길리언은 그녀를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가슴이 한 차례 오르내렸다.
깊게 심호흡을 한 그는 다시 엘렌이 있는 쪽으로 몸을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엘렌 크렘벨. 지금 너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엘렌이 소리쳤다.
“크라이언트!”
그녀는 그가 평생에 본 적 없던 아주 싸늘한 낯으로, 그를 똑똑히 주시하며 말했다.
“……엘렌, 크라이언트.”
일부러 강조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뚝뚝 끊긴 음성.
“다신 내게 그딴 이름을 갖다 댈 생각 마세요. 크렘벨 공.”
그녀는 짓씹듯 내뱉고는 그에게서 한발 멀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케이든이 끼어들어 말했다.
“길. 정 전할 말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서신을 보내도록 해.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백작, 우리는 이만 가지요.”
길리언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기본자세였다.
‘안다. 아는데…….’
스스로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그리 살아왔는데.
그는 뒤죽박죽 섞이는 머릿속을 어찌하질 못한 채 그대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군.”
내가 어리석었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자를 응원했어야 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네가 죽도록.
나지막이 으르렁대는 길리언의 목소리에 엘렌의 걸음이 멈췄다.
이상하게 변해 버린 아내.
이상해져 버린 자신.
꼬이기 시작한 일들.
저를 지나쳐 가던 구두 소리가 멎자, 길리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길리언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엘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그녀가 길리언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은 곧 처음과 같은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엘렌이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죽길 바랐다는 건가요?”
“……글쎄. 그렇게 들렸나.”
슬픈 척 그렁그렁한 눈매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제 분을 감추기 급급한 얼굴.
길리언 크렘벨, 당신이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하.”
엘렌은 가볍게 한숨을 뱉는 듯 픽 웃어 보였다.
“사실, 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도 꽤 궁금했는데.”
“…….”
“이젠 별로 궁금하지도 않네요. 그냥 당신은 그런 사람인 거지. 몇 번이고 날 죽일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길리언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다고?
내가?
대체 왜 그런 오해를―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이미 살해 시도가 있었다는 소리인가? 대체 언제?
그는 이게 이 이혼의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엘렌은 그의 말은 무시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남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자를 응원했어야 했다고 했나요?”
“내가 한 소린 중요치 않아. 그보다 방금 그게 대체 무슨―”
“그 응원, 고맙게 받지요.”
엘렌이 생긋 웃으며 건네는 말에, 길리언은 잠시 본인이 하던 말도 잊은 채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
“그럼 이만.”
그의 눈이 놀라움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크게 뜨였다.
그 눈에 엉켜 있는 것들을 낱낱이 훑어낸 엘렌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어딘가 고장이 난 듯 멈춰 버린 길리언을 뒤로하고 엘렌은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홀을 걸어 나갔다.
그 발걸음 소리가 요동치는 맥박과 함께 그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태연하게 황태자의 팔을 잡는 손.
동생에게 마주 웃어 보이는 얼굴.
자신이 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고도 나온, ‘응원을 고맙게 받겠다’라는 표현.
“네가……?”
자작극이었다고?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 이혼을 위해?
대체 왜?
무엇 때문에?
해결되지 않았던 최초의 의문.
그는 직감했다.
아마도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오래도록 이 시간에 잡혀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