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탕탕!
탁자를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트라이아 공작이 화가 나서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해충이 들끓어서 도대체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발란쉬 후작이 은근슬쩍 거들고 나섰다.
“저희 바로 옆 영지인 가네트의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가뭄에 해충까지 아주 고역이라더군요.”
그의 말에 트라이아 공작이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겨울이 이례적으로 따듯했던 게 마냥 호재가 아니었던 게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지금 둑 보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눈앞의 가뭄이…….”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소리가 길어지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트 후작이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했다.
“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뭐요?”
“가뭄이니 더더욱 홍수를 함께 대비해야 하는 거지요.”
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당장 배가 고프니 내년 종자를 빼먹자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그게.”
“아직 오지도 않은 비에 대한 대비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농사가 먼저 아닙니까.”
“빠른 곳은 삽을 떴습니다. 게다가 이미 다 망친 농사, 이 사업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그런 곳들까지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다 굶어 죽기라도 하라는 게요!”
쾅쾅!
주먹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에 시끄럽게 오가던 고성이 멈추었다.
황제가 불편함을 숨기지 않은 잔뜩 찌푸린 낯으로 말했다.
“……식량. 식량을 구할 방도를 생각해 보지.”
그러자 먼 곳에서 팔짱을 낀 채 싸움을 방관하고 있던 바로크 후작이 나섰다.
“영지마다 상황이 상이합니다. 당장 수확 이후의 식량이 급한 곳도 있고, 아까 이야기가 나왔듯 해충 피해로 인해 이중고를 겪고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 부분도 고려를 해 주셔야 합니다, 폐하.”
“그 이야기는 들었네. 그러니 우선 식량을 어디서 조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는 거고.”
“우선적으로는 세금 감면이 필요합니다, 폐하.”
바로크 후작의 말에 헤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금?”
“급격한 생산량 저하가 예상되지만 영지별로 상비해 둔 곡물의 양이 다를 겁니다. 그에 따라 지원책도 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우.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헤지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영지별로 논의가 필요할 듯하니 각자 구휼, 구충책을 구상해 보고 가능한 선을 책정, 책정 근거까지 준비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다음 안건!
헤지스가 골치 아픈 일은 대충 해치워 버리고는 외치자, 시종이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 크라이언트의 이혼 법정에 가실 시간입니다.”
“아, 지금?”
헤지스는 다음 안건을 받아 드는 대신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 그렇군.”
헤지스는 책상 위에 널브러뜨려 놓았던 서류를 쓱쓱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회의가 길어졌군. 이쯤에서 다들 해산하지.”
그가 부산히 자리를 정리하자,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공후들은 저희도 은근슬쩍 시계를 꺼내 보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바로크 후작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트라이아 공작이 픽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길리언을 곁눈질했다.
“어서 갑시다. 기왕이면 상석에 앉아서 봐야지요.”
“보는 자리가 달라진다고 일어날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을 겝니다. 천천히 가지요.”
바로크 후작이 느긋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두 사람이 퇴장하자, 그것을 시작으로 다들 저마다 눈빛을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혼자 회의장의 자리에 남아 있던 길리언은 우르르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언짢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동작으로 서류철을 탁, 덮었다.
“……딱 짐승 수준밖에 안 되는 작자들 같으니.”
길리언은 곧 신경질적인 발길질로 의자를 퍽 밀어 넣고는,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홀에 들어서자 내부는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로 북새통이었다.
보나마나 상석을 차지하기 위해 너도나도 귀밑머리 날리며 달려온 것이 뻔했다.
그게 못마땅해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길리언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크렘벨 공.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들어오자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오늘 법정의 당사자인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남자는 중앙쯤에 들어서자 맨 앞 우측에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께서는 저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
안내된 자리로 가자, 맞은편에 크라이언트 일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상태였다.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어째 오늘은 그런 것 없이 맨몸이었다.
‘그래도 이젠 몸이 제법 괜찮아졌나 보군.’
길리언은 저도 모를 안도감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애써 진정되었던 그의 속이 다시 뒤집히기 시작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엘렌의 낯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도 저 얼굴이군.’
그의 잇새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왜 저런 낯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이해나 한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은 일절 없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것이다.
물론 최근에 불거진 불만 사항이 있었지만, 이 사달이 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제반 사항을 시정해 주겠다는 말까지도 그녀는 거절하고 나갔으니까.
‘그 이후로 모든 게 예상을 벗어나고 있어. 대체 무엇이 변수로 작용해서 일이 어그러지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간의 일을 되짚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에 손바닥을 폈다.
‘됐어. 이미 이렇게 됐다. 어차피 엇나갈 거라면 제대로 사고를 치는 것도 좋겠지.’
그래 봤자 제 손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다신 저러지 못할 테니.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옥좌 옆의 입구를 통해 황제가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황제는 옥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큼, 흠. 모두 고개를 들도록.”
소란스럽게 떠들던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황제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 그에 대해서는 짐도 아주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이며, 태자에게 맡겨 철저히 조사할 예정임을 미리 밝히네.”
그 말에 주위의 시선이 길리언과 케이든을 훑기 시작했다.
그래도 같은 세력인데 정말 철저히 조사할까? 이 사람아, 크렘벨이 아님을 밝혀내겠다는 소리이지 않겠어…….
“크렘벨 공은 혐의에 대해 부인하고 있으나, 크렘벨 부인은 범인으로 크렘벨 공을 강력히 의심하고 있네. 그리고 어찌 되었든 크렘벨 부인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 그리하여 크라이언트와 크렘벨 부인이 내게 이 이혼을 요청해 왔다네. 두 사람,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예. 폐하.”
“그렇습니다. 폐하.”
엘렌과 백작이 대답하자,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페리윙클 부인의 말과는 다른 이야기로군요.
그러게요. 그녀는 가끔 제 생각대로만 말을 뱉는 경향이 있죠.
그녀의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러한 소리들이 들렸는지, 크렘벨가가 이혼하는 꼴을 보겠다며 찾아와 앉아 있던 페리윙클 백작 부부의 낯이 붉어졌다.
“마수가 누구였는지는 차차 밝혀질 것이네. 그에 따라 서로에게 배상할 일이 생기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두 가문 모두 약조하였지. 양측,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예, 폐하.”
“예. 인정합니다.”
엘렌과 길리언이 연달아 대답하자, 황제는 준비한 말을 이었다.
“좋아. 지금까지 확인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될 것이네. 그럼 이제부터 크라이언트가로부터 제기된 소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지. 엘렌 크렘벨, 그대부터 시작해 보도록.”
황제의 호명에 엘렌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절 살해하려 한 것은 길리언 크렘벨 공입니다. 물론 아직 황실의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엘렌이 자신의 양팔을 부여잡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만약 그가 제 말대로 범인이 맞다면, 그리고 만약 이 혼인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면. 전 그 범인과 한집에서 살며 계속해서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합니다.”
귀족들은 황실 대회에서 자신들이 목격했던 바에 대해 다시금 떠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크렘벨 공이 부인을 거칠게 대하긴 했죠.
그녀가 겁을 먹을 만도 해요…….
헤지스는 그런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는 말했다.
“그대의 말은 잘 들었네. 그 외에 더 주장하고픈 바는 없는가?”
“그는 평소 저를 한낱 물건에 가깝게 대했으며, 종래에는 목숨에 위협까지 가한 파렴치한입니다. 부디 제 간절함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폐하.”
“그래. 내 유념하지. 그럼 이제 길리언 크렘벨 공, 그대가 말해 보도록.”
헤지스의 지명에 길리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아내의 염려를 이해합니다.”
길리언의 첫마디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어떻게든 이혼하는 것을 피해 보려 하지 않겠냐는 모두의 예상이 보기 좋게 깨지고 만 것이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 생사의 기로에 섰고, 충분히 공포에 질릴 만한 일을 겪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평화를 되찾길 바랍니다. 제가 그녀를 붙잡고 있어도, 그녀가 안심할 수 없다면 서로 괴로울 뿐이니…….”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희생하고 감내하는 사람처럼, 눈에는 어떠한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주먹을 살짝 움켜쥐고 말했다.
“그러니 저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두가 놀랄 만한 감성적인 연설이었다. 하지만 헤지스는 그저 얼른 이 일을 처리해 버리고 싶다는 듯 물었다.
“그 말인즉, 크렘벨 부인의 요청대로 합의를 통한 이혼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슬픔에 침잠한 눈빛으로 담담히 제 속내를 서술하는 길리언 크렘벨.
그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처럼 보였다.
“그래. 받아들이지.”
길리언에게 확답을 받아 낸 헤지스는 큼큼,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