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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39화 (39/128)

<39화>

“내사라 하심은…….”

길리언이 묻자 헤지스가 깊은 한숨을 쉰 뒤에 입을 열었다.

“짐이 처음에 알고도 묻었던 일은, 공이 관리하고 있다던 여러 업장들의 이야기였다네.”

업장……!

길리언은 애써 동요를 감췄다.

어쩐지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들통이 난 것인가?

“이곳에서 일을 아주 제대로 벌여 놨더군. 괘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가문이나 비자금 조성을 위해 알음알음 불법을 저지르지. 나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다네.”

길리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조용하기에 영락없이 모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자신의 수들을 알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끌어안고자 한다고…….’

길리언은 이제 황제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완벽히 알았다.

“그러나 크라이언트는 그러지 않겠지. 심지어 크렘벨 부인이 가문의 내사를 어느 정도 안다면 더더욱.”

길리언은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엘렌 크렘벨에게 아직 그런 것을 알린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크라이언트에서 받아 온 지원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알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시끄러운 이야기가 터져 나올 것이다.

“……짐으로서는 세력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네. 그러니 적당히 합의점을 찾아. 이혼하게나.”

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이혼.’

길리언의 머릿속에는 단 한 단어만이 맴돌았다.

‘이혼? 내가?’

왜.

아니, 이유야 방금 황제가 계속 늘어놓았으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분명 이혼은 황제의 머리에서 나온 안이 아니라 크라이언트가 제안한 합의점일 것이다.

황제는 뼈를 잘라 내느니 다소의 살을 내주는, 그러니까 크라이언트의 말을 들어주며 최대한 크렘벨의 심기가 상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전략을 택했다.

크라이언트가 황제에게 갖는 의미가 이리 컸다는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덕분에 황제가 이 정도로 제 가치를 높게 쳐 주고 있다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가 제 가치를 높게 쳐 주고 있는 지금, 거래에 응해야 한다.

그의 신뢰를 잡는 것이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내 것을 스스로 놓아야 하지?'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길리언 크렘벨을 위한…….

‘애초에 저희가 스스로 굴러들어 온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제게 바라는 게 있었고, 그것은 크렘벨이라는 이름이 갖는 명예와 그에 따라오는 권력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 계약에 대해 성실했다.

‘……그러면 저희도 성실히 임해야지. 이제 와서 빠져나가겠다고? 내게서 도망치겠다고?’

“그렇게 되면 제가 일방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 너무 큽니다. 애초에 귀족 간의 혼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크라이언트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라.”

황제는 그의 말을 한 번 되뇌고는 물었다.

“중요한 것은 크라이언트인가, 아니면 그들에게서 제공받을 수 있는 무언가인가?”

길리언은 잠시 고민했다.

그들을 굳이 저렇게 떼어 놓고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금전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었다.

“……후자입니다.”

“알겠네. 그 부분은 내가 책임지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책임이라 하심은…….”

“내 사유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마그놀리아의 채권이 있네. 이런 일이 생길까 만들어 둔 것이지. 타국의 것이니 자금 출처를 쉬이 읽히지는 않을 게야. 짐과 공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일단은 그것으로 마무리를 하세나.”

황제는 길리언에게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드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눈만 감아 주시면…….”

“공. 나라고 내가 만들어 놓은 비자금이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크라이언트와 자네의 가치를 높게 치고 있을 뿐이야. 여기서 내가 자네의 손을 들어 주면, 아주 높은 확률로 크라이언트는 내게 등을 돌리게 되겠지. 난 가능한 최선의 타협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네.”

헤지스의 어투는 단호했다.

제 꺼림칙한 느낌이 무엇이건 간에, 지금의 황제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고, 제게는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효과적인 패가 없었다.

길리언은 여기가 자신이 물러서야 할 곳임을 직감했다.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가 사과하자, 황제는 저도 미안하다는 낯으로 그에게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지금은 크라이언트도 그리하지만, 종국에는 그들이 다시 공을 찾아오게 되겠지.”

“그들이 말입니까?”

“공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

“크라이언트가가 이제는 저희도 나름 중앙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크렘벨과 연을 맺은 가문이라 가능했던 것인지 그들 스스로 쟁취해 낸 것인지는 지나 봐야 알 일이지.”

황제는 그렇지 않느냐며 길리언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이번 소동으로 빚을 지워 두는 거라 생각하세. 그들이 제 발로 돌아오게 될 때를 기다리자고.”

“예.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크라이언트가에 연락을 넣지. 여봐라!”

황제가 큰 소리로 바깥에 대기 중이던 시종을 불렀다.

그는 시종에게서 종이를 받아 무언가를 휙 적더니, 제가 끼고 있는 반지의 인장을 찍어 편지를 봉하고는 말했다.

“공은 이대로 나와 함께 가지. 처리는 빠를수록 좋을 테니.”

“예. 폐하.”

황제가 알고 있는 자금과 크라이언트는 알지만 황제는 모르는 자금.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나았지만, 그 사실을 황제 앞에서 주장할 수는 없었다.

‘좋지 않아. 좋지 않은데…….’

그렇지만 황제가 말한 대로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대체 이 기분은 무얼까.

꺼림칙함을 넘어, 무언가 불쾌하기까지 한 이 기분은.

길리언은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얼굴을 굳혔다.

* * *

“영애. 크라이언트 저에서 영애께 편지가 왔답니다.”

크리스티가 생필품들을 챙겨 올라오는 길에 전해 받았다며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엘렌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편지를 받아 들었다.

봉투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 제법 두툼했다.

‘한 장이 아닌 것 같은데.’

봉인을 뜯자 그 안에서는 따로따로 접힌 편지지 두 장과 두툼한 뭉치가 나왔다.

<엘렌. 네가 당부했던 것들은 다 잘 처리했단다.

하나는 직접 와서 확인을 했다니 너도 잘 알 것이고, 하나는 나도 명단을 이제야 추려서 이렇게 네게 편지를 보낸다.

피터 알베슨과 폴 발렌틴, 레이첼 이든 세 사람의 이력을 동봉한다. 최종 결정은 네가 하렴.

PS. 엘시어가 네 편지를 내게 부쳤더구나. 함께 동봉해 보낸다.>

이전에 제가 부친에게 부탁해 놓았던 주치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르본 영애의 심한 외상을 즉각적으로 소리소문없이 돌봐 주려면, 그런 이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 언질을 주었던 부분이었다.

‘피터 알베슨. 딱히 기억에 있지 않아. 큰 문제도 큰 공로도 없던 사람이겠지. 폴 발렌틴, 이 작자는 제대로 병증을 치료하기보다 마약성 진통제를 남용하는 기질이 있다고 들었다. 좋지 않아. 아마 어느 귀족가의 수술을 집도했다가 결국 환자가 사망해 끝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그녀라도 평소 관심에 두지 않던 뜬소문들까지 완벽히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당시는 그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지라, 대충 ‘귀족파 녀석이라니, 그거참 꼴좋게 됐군.’ 하는 생각으로 넘겼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레이첼 이든. 이 여자는 기억나.’

의원인 아버지 밑에서 잘 배웠지만, 여자 의원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없어 그저 그런 취급을 받던 이였다.

그래서 알음알음 돈 없고 가망 없이 급한 환자만 보았었는데, 그 ‘가망 없는 환자’에 가네트 백작가의 백작 부인이 해당됐던 게 그녀의 전환점이 되었다.

‘환경이야 우리가 갖춰 주면 돼. 주치의는 이든으로, 요구하는 시설은 최대한 맞춰 주도록. 물론 저택과 영주성 모두.’

엘렌은 그렇게 아버지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고는, 아마도 엘시어의 것일 남은 한 장을 열어 보았다.

<누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누님의 소식이 좀 들려오길 바라고 있는데, 세상이 조용하니 요즘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누님, 어쩌다 보니 소르본 영애와 친해졌습니다. 이름은 메이입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입니다.

메이 소르본의 룸메이트인 마리나라는 친구와도 안면을 텄습니다. 두 사람 모두 페리윙클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협조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님, 제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런 것들, 페리윙클이 벌이는 한심한 짓이라고만 치부하며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겠지요. 그 점에서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역시 누님이세요.

어쨌든 그리하여 저는 제 나름 노력을 해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매일매일 페리윙클 자식에게 물을 먹일 것을 생각하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아, 이 마리나라는 친구는 만일의 사태에 우리 가문에서 책임을 졌으면 합니다. 우리 영지가 고학력의 인력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내칠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럼 누님께서도 어서 쾌차하시길.>

“……아, 이 녀석이.”

엘렌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동생분이신가 보네요. 원래 동생들이 사고를 잘 치죠.”

사근사근한 말투로 웃는 그녀의 말에, 엘렌은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방지축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날뛰기가 일쑤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네요.”

제 건강이 제일 우선인데.

‘그런 것마저 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엘렌은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엘시어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고생했구나. 네가 있어 든든하다.

하지만 엘시어,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는 네 판단을 듣고 노파심에 이 말을 남긴다.

네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이란다. 모든 건 네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누나 말은 어긴 적이 없는 너이니, 믿으마. 부디 섣불리 행동하지 말려무나.>

엘렌은 다 쓴 편지를 각각 가문과 아카데미에 부쳐 줄 것을 부탁했다.

‘이제 아발란쉬 후작의 밑 작업은 됐어. 사고가 일어나기만 기다리면 되겠지.’

황태자의 전언에 따르면 황제도 크렘벨을 내치는 데 동의했다고 한다.

‘축출은 아발란쉬 후작이 완벽히 포섭된 뒤에나 이루어지겠지만, 어쨌든 당장 있을 이혼 법정에서는 내 편을 들어 주겠지.’

엘렌은 소파보다는 딱딱한, 그렇기에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휠체어의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안녕, 길리언.

드디어 네 앞의 나락이 보이기 시작해.

이 풍경을, 조만간 네게도 보여 주고 싶구나.

길리언 크렘벨, 이 가증스러운 찬탈자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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