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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38화 (38/128)

<38화>

“케이든 님께서 예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엘렌이 놀란 낯으로 물었다.

케이든은 격하게 당황해서는 말했다.

“아, 나는, 그러니까―”

“어머, 사장님!”

사장님?

“이곳이 크라이언트의 소유였습니까?”

“아, 네. 아직 오래되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죠. 제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랍니다.”

그는 얼굴이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하필 들러도 크라이언트의 상점이라니!

“하하……. 몰랐습니다. 영애는 드레스뿐만 아니라 주얼리에도 관심이 많았군요.”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려운 조합이니까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아, 이 신사분께서는 사업가를 위한―”

그를 응대하고 있던 점원이 그의 주문에 대해 말하려 하자, 케이든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그대, 그대가 외출을 했다기에, 보고도 할 겸 시정 조사도 할 겸 나왔습니다.”

“아.”

엘렌이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엔 구시가지를 들렀으니, 그렇군요. 이번엔 이쪽인가요.”

그녀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제가 안내자로 붙어도 괜찮으실는지요? 이곳은 제가 잘 안답니다.”

“그대도 볼일이 있어 나온 것일 텐데 나 때문에 괜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에요. 마침 급한 일들은 다 해치운지라 여쭌 것이랍니다.”

“급한 일?”

케이든이 의아하게 묻자, 엘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전에 아버지께 부탁드렸던 일들이 어떻게 진척이 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해서요.”

“하기야, 대리만으로 일을 처리하기에는 답답할 때가 있지요. 그래도 이렇게 딱 맞닥뜨리다니 우연도 대단합니다.”

“음. 이쪽 거리가 저희 계열사들이 있는 곳이라서요. 아마 케이든 님께서 어딜 가셨든 마주치기는 했을 것 같네요.”

“……아.”

여기서 멈춘 이상 어딜 들어갔어도 엘렌을 만났을 것임을 깨달은 그가 낮게 탄식했다.

“그래요. 이렇게 된 것 그냥 그리합시다. 그대가 이끄는 대로 가 보지요.”

텄다. 깜짝 선물 고르기는 텄어.

그는 반쯤 체념해서는 말했다.

“이야기가 모이는 살롱이나 커피 하우스에 들러 볼 생각인데 괜찮습니까?”

“물론이지요. 카라밀로라고, 저희 가문의 살롱도 있답니다.”

“항상 가던 곳은 재미가 없지요. 어차피 하는 것 우리도 즐거운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크라이언트 소유의 가게로 가면 어찌 될지야 뻔했다.

‘분명 선물은 고사하고 이것저것 호화롭게 대접만 받다 나오게 되겠지.’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렇다면 근래 새로 생긴 마그놀리아의 디저트 가게는 어떠하신가요? 전부터 한 번 들러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곳인데.”

“좋습니다. 그리 가지요.”

그렇게 얼결에 동행하게 된 그들은 마차를 조금 달려 살롱 거리로 향했다.

“저곳이랍니다.”

엘렌의 안내에 따라 가게로 들어간 그들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널찍널찍하게 떨어져 있는 테이블들은 저마다의 소리로 북적이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 나는―”

점원의 응대에 케이든이 적당히 음료를 시키려던 때였다.

메뉴가 적힌 팸플릿을 펼쳐 보고 있던 엘렌이 말했다.

“디저트 메뉴 전부. 음료는 여기 스페셜 전부.”

팸플릿의 한편을 손가락으로 쭉 내리며 주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든이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과하지 않습니까?”

“케이든 님 입맛에 뭐가 맞을지 모르니까요. 어차피 저는 오늘이 아니라도 전부 먹어 보기 위해 또 왔을 거랍니다.”

엘렌의 대답에 점원은 저 주문이 진심이었구나, 하는 얼굴로 그녀의 주문을 받아 적었다.

“디저트 메뉴 전부, 음료는 스페셜 메뉴 전부. 각 한 개씩이십니까?”

“두 사람이니 2인분으로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디저트 메뉴, 음료 스페셜 메뉴 각 두 개씩. 여기 주문 확인해 주시고, 메뉴는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주문한 양이 워낙에 많았던 탓에 한 번에 내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렌은 그러라 말한 뒤 팸플릿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아, 메뉴에 대한 설명들을 읽고 있답니다.”

엘렌은 케이든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저는 할 일을 할 테니, 케이든 님께서도 편히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저번처럼요.”

“아……. 그러지요.”

별생각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케이든은 괜히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저번에는 이런저런 대화도 제법 나누지 않았었나.’

실없는 장난 같은 말들도 오가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어째 이 여자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저번보다 더 서먹한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가 차근차근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두 개씩 올라오던 접시들이 그들의 앞부터 채우다가, 종내에는 테이블을 한가득 메우고 말았다.

“케이든 님께서도 드셔 보시고 평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평이 필요합니까?”

“필요하달까, 도움이 되지요. 시식단 한 명만큼의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아, 그건 확실히.”

그는 태연히 비용을 논하는 그녀의 말에 픽 웃었다.

엘렌은 맨 왼쪽에 놓인 음료부터 신중히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부터는 아주 연구 삼매경이었다.

이따금씩 ‘이건 무슨 과일을 넣은 거지?’, ‘상큼하니 괜찮은데.’, ‘이게 향신료를 첨가해 만든 거라고?’ 등의 혼잣말을 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또는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거나.

‘아주 정신이 쏙 빠졌군.’

항상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로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던 그녀였는데, 오늘 이러고 있는 것을 보니 철두철미한 계략가라기보다 디저트를 좋아하는 소녀에 가까워 보였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예?”

“아, 혼잣말입니다. 나도 이 차에 무엇이 들어갔는지가 궁금해서.”

그는 그리 말하며 엘렌이 마시던 것과 같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셔 보였다.

‘디저트를 먹으면서도 사업 생각만 하는 걸 보면 천생 사업가 같기도 하고.’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조용히 음료를 마시고 있던 케이든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 * *

크렘벨 공작저의 집사 제임스는 오늘도 한숨을 쉬었다.

가문으로 온 우편물 사이에서 익히 아는 문장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황실에서 편지가 날아들 때가 아닌데…….’

그는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제발 안 좋은 일은 아니길.

그는 가주가 당장 확인해야 하는 것들만을 추려 집무실로 가지고 올라갔다.

똑똑.

“주인님. 확인하셔야 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도록.”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길리언이 고개만 까딱하며 말했다.

“황실로부터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닫고 들어온 제임스가 곧장 황실의 편지부터 전했다.

“황실?”

길리언은 제임스가 내미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설마 진짜로 총격 사건의 용의자로 나를 조사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괜히 긴장이 된 길리언은 서둘러 봉투 속 내용물을 꺼내 펼쳐 들었다.

그런데 개봉한 편지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적혀 있었다.

“……내일 궁으로 오라고?”

황제 알현 명령.

황태자가 이야기했던 조사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길리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큭, 큭큭……!”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행사가 그따위로 끝나게 되었을 때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엘렌 크렘벨을 해하여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저를 조사한다든가 하는 결정을 쉬이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저희도 내가 필요할 텐데 함부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만약 자신이 진범이었다고 하더라도 망설였을 것이다.

‘결국 황태자는 황제의 신임을 사지 못한 거다. 나를 쳐 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서신이 설명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그리 선언했던 것처럼, 상황에 유감을 가지고 있거나 그저 처벌이 목적이라면 다른 통보 없이 조사를 진행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불렀다.

그 말인즉, 단순히 이 상황을 흘러가게 두기만 하는 것은 황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파고들 여지가 있다.’

길리언은 그리 생각했다.

제 부친이 자신의 바람과 달리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맞닥뜨린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내일 가능하다면 황태자와 마주쳤으면 좋겠는데.’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책상 서랍 속에 던져 넣었다.

* * *

다음날, 황제의 알현실.

황제의 호출을 받은 문제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폐하. 크렘벨 공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길리언이 도착한 것을 본 시종이 안에 기별을 넣었다.

“들라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탄탄한 어깨와 날렵한 근육을 가진 사내가 당당히 들어왔다.

“제국의 광영 이스타지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리언은 고개를 숙이며 슬쩍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짐이 공을 불러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이라 생각하네.”

“…….”

길리언은 일단 대답을 유보했다.

일단 황제가 뭐라고 하는지에 따라서 적당히 맞춰 줄 요량이었다.

“최근 공에 대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많다네. 처음 몇몇 가지야 짐이 무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별말 않고 넘겼지. 하지만 이번엔 달라.”

오늘따라 황제의 서론이 길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적당히 사건을 넘기려 할 줄 알았는데, 왠지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짐의 보호 아래 있는 두 가문이 싸우고 있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모두 보호할 책임이 있지.”

“……염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폐하.”

길리언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기색을 살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뭘까.’

“어쨌든, 그래서 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네.”

그는 황제가 무슨 말을 꺼낼지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결정하게. 나는 공이 크라이언트가의 요구를 수용하여 이혼하길 권하는 바이네.”

‘……이혼?’

길리언은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를 의심하며 물었다.

“이혼이라니, 진심이십니까?”

“그렇다네.”

그는 정말 억울해하며 외쳤다.

“폐하. 아무리 크라이언트가 억지를 부린다지만 갑자기 무슨 연유로……!”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폐하. 전 정말로 그런 일을 사주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을 제가 왜 사서 하겠습니까!”

길리언이 소리쳤다.

그 여자를 해하려 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이리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 진실은 이 결정과 관계가 없다네. 중요한 것은 크라이언트의 감시하에 짐이 자네 가문의 내사를 털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들은 공에게 앙심이 있다는 것이지.”

크렘벨가의 내사.

갑자기 황제가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길리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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