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예. 제보자는 크렘벨의 반역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빠져나온 자였고, 그는 제게 크렘벨의 위험성을 알려 왔습니다. 하지만 제보자의 말뿐만이 아니더라도, 정황에 따라 전 크렘벨이 반역을 획책했다는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일반 무구와 한날한시에 발견된 화약과 총기라……. 확실히 수상하구나.”
“예. 만약 화약과 총기에 관련해서는 크렘벨이 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불법으로 도검류를 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견제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 동의한다.”
“그리하여 일단 보험 삼아 증거도 만들어 둘 겸 일을 쳐 봤습니다만…….”
“네가 언제 이런 걸 배워서 하고 있는지 신기하구나. 괘씸하긴 하지만 내가 딱히 입을 댈 게 없어.”
“감사합니다.”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끝이냐? 견제를 하겠다면서.”
“예. 지금 크렘벨과 크라이언트가 사이에는 이혼 문제로 깊은 골이 패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사고까지 일어났습니다. 황실과도 관련된 사건이니만큼 직접 개입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사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 헤지스가 가늘게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우리는 둘 사이에 개입해 이혼을 성사시키자?”
“그렇습니다.”
“그렇게 크렘벨과 크라이언트를 찢어 놓으면 자금줄을 끊어 놓는 셈이니, 확실히 임시방편은 되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크렘벨을 쳐 내면 공후 회의의 표가 하나 날아갈 텐데. 그건 어찌 복구할 셈이냐?”
“그것은…….”
역시 질문이 여기까지 들어오나.
케이든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아발란쉬 후작을 포섭할 겁니다.”
“네가? 어떻게?”
아발란쉬 후작의 포섭은 앞서 황제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일이었다.
[소르본 영애만 있으면 됩니다. 판은 만들어 놓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로 아버지를 납득시키기는 힘들지.’
자신이야 크라이언트 영애가 그간 어떤 식으로든 일을 처리해 오는 것을 보았으니 저런 어처구니없는 통보로도 그러려니 했다지만, 부황은 아닐 것이다.
케이든은 일단 말을 적당히 돌리기로 했다.
“폐하.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여기까지 온 아들을 좀 믿어 주시지요.”
하지만 황제는 날카로웠다.
“네 녀석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구나.”
“……예. 지금 말씀드린 모든 것은 현 크렘벨 부인 엘렌 크렘벨, 그러니까 크라이언트의 장녀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녀가 제보자였군. 내부의 고발자라……. 믿을 만하더냐?”
“제 믿음과 별개로, 지금 그녀와 손을 잡아 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지. 크렘벨과 척지지 않으면서 이혼을 중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대가로 건네줘야 할 것 아니냐.”
“그 부분은 말입니다.”
케이든은 또다시 높은 벽에 부딪힌 듯한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이걸 설명하면, 아버지께서는 믿어 주실까.
“그러니까…… 황실이 가지고 있는 마그놀리아 채권이 있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뭐? 그건 어찌 알았다고 하더냐?”
“당연히 국내 귀족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타국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며 말하는데…….”
케이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녀가 말하기를, 마그놀리아는 이번 트리발로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니 그 채권을 전부 넘겨주라더군요.”
“그럴 리가! 그들은 역사 깊은 왕국이다. 영토가 작다 하여 저력이 없는 나라가 아니야.”
“아버지. 그녀는 정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이것까지는 마저 보시지요.”
케이든은 제가 챙겨 온 것을 건네었다.
“……증서?”
“예. 만일 그녀의 예상이 틀렸을 경우, 채권 양도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를 그녀가 배상하겠다는 증서입니다.”
“세상에.”
헤지스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이 정도로 확신을 갖고 있는 겁니다.”
케이든 제발 여기서 넘어가 달라며 속으로 아우성을 쳤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증서를 훑던 헤지스가 굉장히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맨날 사고만 치더니 어째 참모도 너 같은 사람을 주웠구나.”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헤지스의 말에 케이든이 얼굴을 찌푸렸다.
“좋다. 네가 그린 판이 제법 나쁘지 않으니 어울려 주마. 크라이언트 백에게 나와 크렘벨가에 항의 편지를 보내 두라고 전해라.”
“예, 폐하.”
케이든은 생각보다 수월히 지나간 부황과의 독대에 뿌듯해하며 알현실을 나섰다.
‘이것으로 나도 겨우 무언가를 쥐여 줄 수 있게 되었군.’
그는 오늘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엘렌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엘렌이 아닌 방을 정리하고 있던 시녀뿐이었다.
“영애께서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주인의 부재에 케이든은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차례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외출이라고? 그 불편한 몸으로 그새 어딜…….’
그녀의 외출 목적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제 집무실로 돌아가던 케이든은 제 집무실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과 마주쳤다.
“전하. 크라이언트 영애께서 남기신 전언입니다.”
“전언?”
케이든은 시종장이 내민 작은 봉투를 얼른 받아 들었다.
<가문의 일로 외출합니다. 체셔 경과 동행하오니 너무 걱정 마시길.
PS. 지금은 공식적으로 전하께서 저를 보호하는 중이시니, 전하의 기사인 체셔 경이 있으면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케이든은 그녀가 추신으로 붙여 놓은 말을 읽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니까 저번처럼 괜히 득달같이 쫓아오지 말란 얘기군.’
“그래도 연락을 남긴 노력을 기특해해야 하는 건가…….”
“전하. 괜찮으십니까?”
“굳이 안 괜찮을 이유도 없지. 그건 왜 묻나?”
“그야…….”
전하께서 그 영애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시는지를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시종장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보다는 우회적으로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를 택했다.
“이렇게 된 것, 전하께서도 이것으로 이번 잠행 일정을 대신하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그건 무슨 소린가?”
“영애께서 공식적인 명분이 되어 주시니 말입니다. 마중 겸 세태 조사 겸 다녀오시지요. 그러는 김에 괜찮은 선물을 하나 골라 영애께 드리는 것도 괜찮겠군요.”
“……그거 괜찮군. 요 며칠 자네가 다시 보이는 중이야.”
케이든이 정말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시종장은 덜 자란 소년을 보는 듯한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바로 가야겠다.”
케이든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보게, 경.”
“예. 전하.”
달리는 마차 안, 코엔하임 경 모리스와 함께 거리로 나선 케이든이 물었다.
“여인에게 환심을 사려면, 그러니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려면 어떤 선물이 좋을까?”
“……그 여인이 관심을 두는 선물이 좋겠지요.”
“그걸 모르니 묻는 거잖나.”
모리스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크라이언트 영애라면, 그녀의 사업적 영감을 자극해 줄 수 있는 선물을 좋아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애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
모리스가 입을 다물자, 케이든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업적 영감이라…….”
전혀 모르겠는데.
케이든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일전에 보니까 그녀는 패션 쪽에 관심을 크게 두고 있는 것 같았는데.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 않나?”
케이든이 중얼거리자, 모리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도 그리 보이긴 합니다.”
“그러면 패션 쪽에서 영감이라는 것은 대체 어찌 얻는 거지?”
“…….”
“그래. 확실히 우리에겐 어려운 주제였어.”
케이든이 저희들은 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말했다.
“그러면 그쪽 업계를 찾아가 물어야겠지. 패션 거리로 가게.”
황태자의 지시에 마부는 채찍을 쳤다.
이랴, 이랴!
다그닥 다그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달렸다.
도심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바글거리는 인파 탓에 마차의 속력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케이든이 말했다.
“그냥 여기서 멈추게나. 저곳부터 들어가 봐야겠군.”
그가 가리킨 곳은 화이트와 골드 톤이 화사한, 고급스러운 타이틀의 주얼리 숍이었다.
“보석과 귀금속이라면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케이든이 제 턱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가지.”
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황태자 일행이 들어섰다.
가게의 내부는 밖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화사한 조명과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장식이 돋보여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크라이언트 영애와 잘 맞을 것 같은데, 분위기가.’
새로 입장한 손님을 발견한 점원이 깍듯한 태도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혹시 찾는 상품이 있으신지요?”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인에게 선물을 하나 하려 하는데, 사업가는 무슨 선물을 좋아할지 모르겠군.”
“어머, 선물용이시군요. 사업가시라면 보통은 심플하면서도 저렴해 보이지는 않는, 고급 원석을 사용한 제품들을 찾으시는데―”
케이든의 질문에 점원은 잰걸음으로 걸어가 진열장 안에서 상품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이런 디자인의 제품도 많이들 찾아 주신답니다. 보석은 나중에 따로 보셔야 하겠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보다는 단아한 멋이 있어서―”
갑작스레 쏟아지는 점원의 말에 케이든은 모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장신구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울리는 장신구가 있다면 그것도 좋지만, 무언가 사업적으로 영감을 줄 만한 물건을 찾고 있는데.”
케이든이 점원의 설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점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연인분께서 패션 사업 쪽에 계신가요? 그렇다면 흔한 디자인보다는 조금 유니크한 것을 찾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디자이너님들께서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하실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하고 있고, 매 분기마다 작품 전시회도 열고 있답니다. 이번 컬렉션을 보시겠어요?”
케이든은 정신이 조금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 룸으로 이동하던 때였다.
그의 시야에 흔하지 않은 조합의 세 사람이 들어왔다.
휠체어를 미는 시녀 한 명, 휠체어에 앉은 여자 한 명, 그리고 그 뒤에 선 호위 기사 한 명.
“……영애?”
“케이든 님?”
그러니까, 엘렌 크라이언트의 일행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