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메이의 얼굴에는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이미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를 마친 사람처럼 아주 차분했다.
엘시어는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 라. 그건 페리윙클 때문인가?”
“……그래.”
그녀는 처음부터 이 크라이언트가의 도련님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엘시어 크라이언트 또한 밀러 페리윙클과 한판 벌인 것으로 유명하긴 했다.
그래서 처음에 그가 제게 아는 척을 해 왔을 때는, 저와 함께 밀러 페리윙클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러 가자든가, 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근 일주일 동안 한다는 일이라곤 그저 평화롭게 서로 안부나 묻고 운동이나 하는 것뿐.
페리윙클에 관한 말이 단 한 마디라도 나오는 순간 철저히 모른 척하리라 다짐했던 그녀는 아주 조금 멋쩍어졌다.
그리하여 오늘, 그녀는 이 대책 없는 학우에게 자신이 먼저 선을 그어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페리윙클이라.”
엘시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말했다.
“정말 사람 수치스럽게 만드는 놈이지.”
“……네게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그런 놈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그런 놈과 평생 아카데미 동기 소리를 듣고 살 걸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엘시어가 한껏 코웃음을 치자, 그 신랄한 말에 메이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킥, 그건 동감이야.”
그러고도 한동안 킥킥대던 그녀는 곧 웃음을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응원하지만, 어쨌든 내 말을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피곤해질 테니.”
“흥, 그래 봐야 제깟 게 누님에게 되겠나.”
“누님?”
“아, 그런 게 있어.”
엘시어는 설명이 귀찮아 적당히 말을 넘겼다.
한 번 도마 위에 올려놓았었기 때문일까, 달리는 내내 그들의 화제는 밀러 페리윙클이었다.
“하여튼 그건 가문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야. 얼마 전 대회장에서도 얼마나 가소롭던지.”
“대회장?”
“그 자식 그렇게 으스대 놓고는 예선에서 탈락했거든.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꼭 예선 탈락자라 불러 주겠노라 마음먹었지.”
“아, 그러고 보니 나도 한 가지 들었다. 이번 사교계에서 아주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던데.”
“그건 또 뭐야?”
“저번에 걔한테만 재시험 기회 주어졌던 것 있잖아. 페리윙클 부인이 그것 때문에 난처해했다더라고.”
메이는 잠시 그때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하며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그거 크렘벨 부인이 터뜨린 일이었네. 너만 페리윙클과 으르렁대는 게 아니었구나?”
“역시 누님이시네.”
엘시어가 뿌듯해하자, 그것이 또 웃겼던 메이는 픽 실소하며 말했다.
“누님과 사이가 좋은가 봐?”
“좋은 건가? 누이는 무서워. 사실 아버지보다 누이가 더 무섭지.”
“네가 말하는 것을 보면 알아. 좋은 거야.”
“그런가? 확실히 본인보다 남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지.”
엘시어는 별 반박 없이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너는 내 누님과 느낌이 좀 비슷해서. 아마 네 동생도 나와 비슷하게 너를 여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오, 최근의 크렘벨 부인의 행보를 보면 그건 내겐 과한 칭찬 같은데.”
“아니야. 난 별로 빈말은 하지 않아.”
“그래, 아까 밀러 자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그럴 것 같더라.”
메이는 아까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킥킥 웃었다.
“적어도 밀러 같은 형보다는 너 같은 누나가 낫겠지. 너의 용맹한 결투 이야기를 듣는다면 더더욱.”
엘시어가 은근슬쩍 그녀의 결투 이야기를 꺼냈다.
“아쉽게도 난 오빠도 있어서.”
“그게 설마 밀러 같은 놈은 아니겠지?”
“음, 부정은 못하겠네.”
“끔찍한데. 가문을 영락없이 네가 짊어지게 생겼어.”
“아, 그건…….”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말을 늘이던 메이가 말했다.
“아니. 난 한계가 있으니까.”
그녀의 말을 듣던 엘시어가 무슨 선문답 같은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 주는 건?”
그의 뚱한 물음에 메이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난 기사가 되고 싶어. 크렘벨 부인처럼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도 물론 멋지지만, 사람마다 원하는 바는 다른 거잖아.”
그녀는 공원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말했다.
“이런 사람이 많진 않아도 나 하나뿐은 아닐 거야. 그런데 봐. 여학생 기숙사 쪽은 너와 나밖에 없을 정도로 한산해. 딱히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누구도 나오지 않지. 왜냐하면, 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
“능력을 발휘할 창구가 없어.”
과연.
엘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모두에게 교육에 대한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해서 등용문까지 활짝 열린 것은 아니었다.
메이는 엘시어를 한 번 슬쩍 쳐다보았다가, 무언가를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어쨌든 그래. 그러니까 네게 무슨 일이 닥쳐도 나는 도와주지 못해. 네가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이야기는 그런 뜻이야.”
“후계자로 쓸 수도 없는 널 위해 가문이 페리윙클과의 트러블을 감수하지는 않을 거란 소리군.”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서 마리나도 떼어 낸 건가?”
“……뭐?”
메이가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는 듯 반문했다.
“마리나. 너의 룸메이트인 평민 장학생. 맞지?”
“그래. 그런데 네가 그 애는 왜?”
“신기하지? 내가 같이 수업도 들어 본 적 없는 평민 여학생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래. 신기하고 궁금하네. 그 애 이름이 지금 여기서 왜 나온 거지?”
엘시어의 눈길에 메이는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 애를 데리고 뭘 하려고.”
“어감이 좀 좋지 않은데. 내 생각엔 그 애가 날 데리고 뭔가를 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던데.”
“안 돼. 그 애는 보호해 줄 가문조차 없어.”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군.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너는 네 가문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고.”
“…….”
“미리 말하지만, 그 애가 스스로 날 찾아온 거야. 그리고 난 다행히 그 애와 목적이 같고, 그걸 실행시킬 수 있는 환경도 갖추고 있지.”
“그러니까 뭘 하려고!”
마침내 메이가 짜증을 냈다.
“뻔하지. 페리윙클한테 한 방 먹여 줘야지.”
“……너, 애초에 페리윙클하고 대적해 볼 심산으로 내게 왔구나.”
“아까도 얘기했잖아?”
“네가 언제.”
“그러니까, 동기라는 게 수치스럽기 그지없다고 말할 때.”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메이가 허, 하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래도 마리나는 안 돼. 만일의 경우 너희 가문이나 네가 그 애를 가족처럼 지켜 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야. 심지어 진짜 가족도 내팽개치려는 이곳에서.”
“미안하지만, 그 결정은 마리나라는 친구가 해야지.”
“……하.”
기계적으로 뛰고 있던 메이의 발이 멈췄다.
엘시어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반역 같은 대죄도 아니고, 기껏해야 귀족들 간의 자존심 싸움이야. 그 애 하나 안 다치게 감쌀 수 있는 힘은 있어.”
페리윙클은, 누님도 벼르고 있는 중이니까.
엘시어의 말에 메이가 반문했다.
“……크렘벨 부인이?”
“그래.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봐.”
“조용히 해.”
엘시어가 놀리듯 말하자 메이가 쏘아붙였다.
“따라다니려면 알아서 해. 하지만 난 분명히 말했어. 나중에 한 방 먹이게 되더라도,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걸.”
“그건 이미 알아서 하고 있고. 협조한다는 소리로 들으면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 안이라면.”
“잘 생각했어.”
엘시어는 여느 친구들에게 하듯 메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메이 소르본.”
엘시어는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누님에게 부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 * *
케이든은 터덜터덜 황제궁을 향해 걸었다.
오늘 그가 맡은 임무는 간단했다.
바로, 크렘벨 가문의 이혼에 대해 부황의 협력을 얻어 내는 것.
[감히 황실의 행사에서 일을 벌이다니! 어떤 놈들인지 간덩이가 처부은 게 틀림없다!]
이번 황실 행사에서의 총격 사건을 듣고는, 황제가 온 궁이 울리는 고함과 함께 잉크병을 내던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내 자작극이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먹은 게 모두 얹힐 것만 같아, 케이든은 괜히 손가락 사이를 꽉꽉 눌렀다.
젠장. 아닌데. 나도 당한 건데.
그러나 사고가 일어날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분명히 무언가 일을 벌여도 좋다고 허락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면 결국 제 묵인하에 벌어진, 제 책임이 있는 사건은 맞다는 이야기가 된다.
케이든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래…… 계획과 실행을 영애가 했으면 뭘 하나. 어쨌든 나도 같이 벌인 일인 것을.’
됐다. 그냥 어서 해치우기나 하자.
케이든은 체념했다.
황제궁에 도착한 그는 시종을 통해 방문을 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황은 금방 시간을 내주었다.
“부황 폐하, 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가 왔습니다.”
하지만 케이든의 부친이자 황제인 헤지스는, 인사는 대충 받는 둥 마는 둥 한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아직 보고할 때는 아니지 않느냐? 시간이 이른 걸 보니 무언가 다른 소식인가 보지?”
“예. 그렇습니다.”
케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아버지.”
“그래.”
“이번 총격 암살 사건 말입니다.”
“그래.”
“그 사건…… 사실 자작극입니다.”
“……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황제 헤지스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제 아들을 보더니 곧 펜을 던지며 외쳤다.
“이 미친놈이!”
* * *
“……제대로 설명을 드리려면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케이든은 그간 있었던 일을, 부황이 납득할 만한 모양으로 잘 다듬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자신은 암행 중 불법 도박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사하던 중, 제보 하나를 확보해 해당 조직의 연결 고리가 템트 하역장으로 뻗어 나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하역장을 급습했더니 그곳에서 허가받지 않은 화약과 총이 나왔다.
“하역장 수색에 대해서는 보고해 드린 바가 있으니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가장 중요한 화약과 총기는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만, 다른 불법 유통되고 있던 일반 무구에서는 꼬리를 잡았습니다.”
“어디냐?”
“……크렘벨이었습니다.”
“크렘벨. 그렇구나.”
헤지스가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