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다음날 엘렌은 시녀들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젯밤 들어오시지 않은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마리아가 조금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이…… 침소에 들기는 하셨습니다만, 주무시고 계신 것을 괜히 깨우지 말라 말씀하시어.”
그 말인즉 황태자 차원에서 입막음을 했단 소리다. 그러면 그녀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 제가 전하를 찾아뵈어도 될는지 연락을 넣어 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신은 ‘지금은 업무 중이니 어렵고, 자신이 찾아갈 때까지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지내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전하께서는 언제 업무를 끝내시는지요?”
“통상 석식 전후로 끝내십니다.”
마리아의 답변에 크리스티가 말했다.
“석식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으니, 일단 지금은 하시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떠신가요?”
“저도 그것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황실 서고는 들러 봄직한 곳이지요.”
시녀들이 번갈아 가며 이런저런 제안을 던졌다.
엘렌은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이대로 오늘 한나절을 내다 버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입궁 허가만이라도 받아야겠군요.”
“입궁 허가 말씀이십니까? 실례지만 어떤 분의…….”
“전하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를 잠깐 뵐까 해서요.”
엘렌이 대수롭잖게 말하며 곧장 휠체어의 바퀴를 굴렸다.
“무리하지 마시지요.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행차를 만류할 타이밍을 놓친 시녀들은, 저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휠체어를 밀었다.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케이든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또? 이번엔 누구인가?”
“크라이언트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거든 나중에 보자고 전하게. 아니, 아까 그리 전하지 않았었나?”
“전했습니다만, 그렇다면 크라이언트 백작의 입궁 허가만이라도 내 달라며 찾아오셨습니다.”
“백작의?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그 자리에서 서랍을 열어 필요한 서류를 꺼낸 뒤, 쓱쓱 크라이언트 백작의 이름과 자신의 서명을 적고는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자. 가져다주게.”
“직접 드리지 않으시고요?”
“그래. 자네가 가져다줘.”
저거 낌새가 이상한데.
시종장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군말 없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집무실 밖에는 시녀를 대동한 엘렌이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요청하신 허가서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서류를 받아 드는 엘렌의 표정이 미묘했다.
딱히 얼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녀를 보내 받아도 충분한 이런 서류 한 장에, 굳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면서까지 본인이 직접 움직였다.
분명 짧게나마 얼굴을 보고 할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전하께 오늘은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상관없으니, 편하신 시간에 연락을 주십사 꼭 말씀을 전해 주세요.”
“허허, 알겠습니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시종장은 엘렌을 돌려보낸 뒤 곧장 집무실로 돌아와 물었다.
“……전하.”
“왜.”
“언제까지 피하실 요량이십니까?”
“무얼 피해.”
“크라이언트 영애 말입니다.”
시종장의 질문에 케이든은 태연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피하기는. 정말로 바빠서 그래. 자네도 계속 보았지 않아.”
그가 바빴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황실이 주도하는 행사에서 사건이 터졌고, 이에 대해서는 엄중히 다루겠다고 본인이 직접 선고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모든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만 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그는 이런저런 보고와 지시의 급류에서 허우적대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
“직접 손님으로 모셔 와 극진히 살피라 손수 명령까지 하시고, 식사, 옷, 여가, 치료 등 생활 전반을 꼼꼼히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정성을 들이시면서 얼굴은 보시지도 않다니요. 설득력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
“자네는 내가 설득할 대상이 아니니 괜찮아.”
케이든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켰던 시종장이다.
그는 아랑곳 않고 제가 해야 할 말을 했다.
“전하. 딱 한 가지만 첨언하겠습니다.”
“…….”
“회피가 너무 길어지셔서는 안 됩니다. 아시지요?”
“그러니까 피하는 게 아니래도!”
저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없음을 피력하는 그의 말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찔렸던 케이든이 냅다 소리쳤다.
* * *
태자궁, 그 이름도 유명한 장미의 방에 손님이 들었다.
부름을 받은 것은 크라이언트 백작.
현재 방에 머무르고 있는 여인의 부친 되는 이였다.
“엘렌!”
“아버지, 오셨어요?”
“말도 마라.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느냐? 혹여 네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아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
다니엘이 눈썹을 하늘까지 치켜세우고는 그녀를 향해 야단을 쳤다.
“죄송해요. 하지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멀쩡하긴! 휠체어에 앉아서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라니, 양심을 어디에 팔아 치웠는지 궁금해질 지경이구나!”
“음. 비싸게 팔았죠.”
배시시, 엘렌이 웃자 다니엘은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웃는 얼굴 봤으니 되었다. 그래, 다른 일은 없고?”
“아, 그거 말인데요.”
엘렌은 다니엘에게 그간 염두에만 두고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꺼내 놓았다.
“일단 정보망을 한 번 정비해 주세요. 국내는 물론이고, 트리발로스까지요.”
“트리발로스? 타국까지 말이냐? 그곳에는 우리 회사 지점도 없는데.”
“미래를 위한 투자의 개념에서 말이에요. 확장해야죠, 아버지.”
“그래……. 일단 알겠다. 그리고 다른 건 없느냐?”
“하나 더 있어요. 외과 수술에 능한 의원을 찾아 주세요. 우리가 수배할 수 있는 최고의 의원으로, 얼마가 들더라도요. 반드시 우리 가문 주치의로 들이셔야 해요.”
“갑자기 이번엔 의원이란 말이지? 허허, 난 도통 네가 무슨 생각인지 짐작을 못하겠구나.”
다니엘이 굽히고 있던 등을 펴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딱히 무슨 생각이라기보다…… 그저 유비무환이라는 생각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엘렌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다니엘이 코웃음을 쳤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지금 네 눈을 보고도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후후, 믿지 않으시면 별수 없고요.”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거짓임이 들통났음을 아는 거짓말.
하지만 그럼에도 두 부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웃는 낯의 딸이, 살아 계신 아버지가.
그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웠기 때문이다.
* * *
크라이언트 백작이 돌아간 후 며칠이 지났다.
오늘도 집무실에 앉아 있던 케이든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종장의 눈길을 피해 서류에 눈을 박았다.
시종장이 그러는 이유야 뻔했다.
어제도 엘렌이 만남을 요청해 왔지만, 나중을 기약하는 말만 남긴 채 그는 또 그녀를 돌려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엘렌을 마주할 수가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로서도 자신이 이리 우유부단하게 무언가를 질질 끌게 될 줄은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짓은 그동안 많이 해 봤다지만 이렇게까지 긴장을 한 적은 없었는데.’
그는 제 두 손을 괜스레 비볐다.
사실 이유라면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본능적으로 깨달은 게다.
여태껏 겪어 온 해프닝들과 달리, 지금 이 여자와의 관계는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결정적인 한 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더니, 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 온 건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두려움에 자꾸 멈춰 서게 된다.
여기서 무언가를 더 잘못하지는 않을까. 혹여나 그녀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일이 이렇게 되니 제 패를 버릴 결심을 하는 데 얼마나 독한 마음이 필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경우, 그녀와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문이 긴 시간과 거액의 돈을 바쳐 얻어 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리했다.
엘렌 크라이언트. 그 여인도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쳐 그리도 단단해진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식을 모두 긍정해 주기엔…….’
케이든은 또다시 시작된 고민에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 밖에 나기 싫다면, 이대로 그녀가 하는 일에 입을 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정말 간절히 원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그녀의 행동이 모두 옳다며 박수를 쳐 줄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너무나도 필요하고 간절했기에 더더욱 긍정해 줄 수 없었다.
‘이번 일은 지나치게 무모했어. 조금만 운이 없었어도 금방 시체가 됐을 거다.’
말에서 떨어지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런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케이든은 괜히 제 어깨를 쓸어내리며 꽉 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번처럼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녀가 제게서 떠나가기라도 하면?
그녀가 길리언이란 패를 내던졌듯, 자신이란 패 또한 내던져 버리기라도 하면.
‘이 상태가 길어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펜촉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아, 제기랄. 그러니까 왜 그렇게 아파하냐는 말이야. 그리 대담하게 사고를 칠 거면 최소한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라도 하든가!”
케이든이 혼자 중얼거린 소리에 시종장이 물었다.
“크라이언트 영애 말씀이십니까?”
“그래. 도무지 결정을 할 수가 없군. 한낱 애송이가 된 기분이야.”
케이든은 결국 안구 사이만 맴도는 활자들을 포기하고 펜을 한쪽에 던졌다.
역시 지금이라도 보러 갈까.
그녀의 무사한 낯을 확인해야, 그리고 이 대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영애는 어떻던가?”
케이든의 물음에 시종장이 지긋지긋하단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기상, 조찬, 오찬, 만찬, 취침. 다섯 번이면 아주 규칙적인 숫자 아닌가.”
“그리고 지금은 겨우 정오이지요.”
“하지만 진료 시간이잖나.”
“그럼 의원을 불러다 직접 물으시지요.”
“……그래야지 안 되겠어. 의원에게 진찰 후 내게 오라 전하게. 아, 영애의 시중을 맡은 시녀도.”
“…….”
시종장이 안쓰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