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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32화 (32/128)

<32화>

“예? 아,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늘어난 인대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만…….”

“이런 제기, 아니, 이만 되었네. 어서 다녀오게.”

냅다 욕을 갈기려는 황태자의 모습에 눈치를 보던 의원은, 이만 가 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신속히 자리를 떴다.

‘……젠장.’

케이든은 급격히 몰려드는 후회에 머리를 싸맸다.

아픈 사람에게 괜찮으냐고,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제 마음대로 화만 잔뜩 내고 나왔다.

‘통증이 제법 있었을 텐데. 그걸 미련하게 혼자 참고 있었다고?’

그는 죄책감에 젖었다가 화를 냈다가, 걱정으로 혼자 끙끙대는 등 누가 보면 제정신인지를 의심할 만한 태도로 천막 앞을 서성였다.

‘의원이 진통제는 주었을까? 지금이라도 가서 확인을…… 아니, 그렇게 화를 내놓고는 다시 들어가서 진통제 배달이라니.’

결국 굉장한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만 그는, 그제야 부친이 이런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이었음을 예견하고 조언했음을 깨달았다.

‘생각 좀 하고 살라 하시더니……. 아버지. 저를 생각 좀 하는 사람으로 키워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케이든이 제 풍성한 머리칼을 다 뽑아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헤집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먼저 사과를 하고 진통제를…… 아니야. 영애의 그런 무모한 행동은 문제가 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 그러다 정말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쩔 셈이냐고. 그런데 정말 못 견디게 아파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안색이 파리하던데…….’

제기랄!

그의 발길질에 한곳의 잔디가 터전을 잃고 뒤집어졌다.

누군가 저를 걱정했을 거란 생각은 정말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듯한 얼굴.

아마 크렘벨 저에 있던 내내 그런 취급을 받아 왔던 것이리라.

길리언 크렘벨은 확실히 무뚝뚝한 기질이 있는 남자였다.

다만 그것은 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서툰 것일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전말을 알고 나니 그의 짐작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나도 그녀도 모두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거지.’

애초에 그와 정이라는 것을 나누어 본 상대가 있기나 할까?

그나마 친우랍시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신에게 배반을 선물하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배우자가 이혼까지 결심하도록 만든 그인데.

저편에서 의원이 종종걸음으로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자네!”

“예?”

케이든의 부름에 천막으로 향하던 의원이 멈춰 섰다.

“혹 환자가 통증이 있다고 하거든 꼭 진통제를 같이 처방해 주게.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프지 않은 것도 중요하지 않아.”

“아, 예. 알겠습니다.”

“반드시일세. 반드시!”

의원은 어느 분의 당부이신데 감히 어기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저 의원이 그녀의 처치를 다 해 놓고 나오면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던 큰일을 하나 해결한 케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니 불편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사과와 배려는 별개의 문제지. 궁에 돌아가면, 아픈 사람은 잘 먹어야 하는 법이니 일단 식사는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이르고, 머무르는 방은 무조건 제일 좋은 곳으로 배정하라 전해 두자. 그러고 보니 몸에 좋은 약재가 어디 들어왔다고…….’

그녀의 부상이 신경 쓰인 케이든은, 제가 그녀의 신병을 책임지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대우를 해 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지금껏 그녀에게 준 도움이라고 해 봤자 그녀가 그에게 안겨 준 것들의 발끝도 못 미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부분에서라도 점수를 따 놓는 게 좋지 않겠나.

‘게다가 방금은 멍청하게 감정에 치우쳐서 화까지 내고 온 상태다.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해. 그렇지 않았다간…….’

길리언처럼, 나라는 패를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가슴속을 지나가는 서늘한 두려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케이든이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 하나를 불러 말했다.

“난 이만 회장을 정리하러 돌아가야 하니, 영애의 치료가 끝나면 자네가 책임지고 그녀를 보호하게. 제아무리 크렘벨 공작이라도 접근할 수 없도록 말이야. 알겠지?”

“예, 전하.”

“나를 제외한 누구도 통과시켜서는 안 되네. 다소 거칠게 막아도 상관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그럼 맡기겠네.”

그는 그렇게 몇 차례나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다시 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있는 황금빛 조각상과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수 붙여 눈부시게 빛나는 장식.

누가 봐도 황실 마차일 것이 분명한 그 안에는 붉은 승마복을 입은 여인이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엘렌은 아주 살짝, 당혹감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오더니 그녀를 들것에 실어 날랐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렇게 날라져 온 곳이 누가 봐도 황실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의 앞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이 마차는……?]

[전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올려 드릴 테니 꽉 붙잡으십시오.]

[예? 앗!]

심지어 그녀는 제 발로 마차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오롯이 그녀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르기는 힘들었을 테지만, 어쨌든 이것은 과했다.

그들에게서는 절대로 그녀의 발이 땅에 닿도록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편안해요.]

[발아래에 두실 쿠션이 필요하겠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그리 말한 남자는 엘렌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휑하니 가 버렸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목적지가 황궁이라는 것은 알았다. 황태자가 그렇게 대놓고 그녀의 신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황궁으로 오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태자궁일 줄이야.

태자궁 정문 앞에 도착한 그녀가 물었다.

“……제가 지금 태자궁에서 묵게 된다고 들은 게 맞는지요?”

“예. 전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아…… 네.”

엘렌은 정말이지 아득해졌다.

그렇게 사람 미안해질 정도로 화를 내고 나가서는 갑자기 이런 대접이라니.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가 스스로의 발로 땅을 디딜 수 없는 것은 태자궁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잘 관리된 휠체어를 한 대 가져온 그들은, 그녀를 그 위에 살포시 앉히고는 혹여 그녀가 스스로 바퀴라도 굴릴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준비해 둔 곳은 최상층, 장미의 방입니다. 혹 원하시는 다른 곳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준비해 주신 곳으로 가지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최상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무려 장정 셋이 그녀에게 달라붙었고, 휠체어째로 옮겨진 그녀는 곧 어마어마한 규모의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영애를 모실 아이들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아무나 한 명을 보내 말씀하시면 됩니다. 모쪼록 편안한 휴식되시기를.”

시종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드디어 그 폭풍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리아 애쉬힐입니다. 옆의 이 아이는 크리스티 윌튼라고 하지요. 편히 계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엘렌 크라이언트입니다.”

엘렌의 말에 마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목욕부터 하심이 어떠신지요? 영애께서 불편하실 테니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마리아의 말이 떨어지자 목욕물을 준비하기 위함인지 크리스티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엘렌을 욕실로 이끌었다.

엘렌은 휠체어에 실려져 가며 물었다.

“혹시 최상층에 여기 말고 다른 방들이 있나요?”

“그럼요. 바로 옆에 태자 전하의 침소가 있답니다.”

“……그 외에는 없나요?”

“예. 최상층에 있는 방은 전하께서 머무르시는 곳 외에 이곳뿐이랍니다.”

그 대답을 들은 엘렌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한 친절은 모두 어떠한 착각이 전제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머무르게 된 장미의 방은 역대 황태자비들이 썼던 장소라든가 하는 사실에서 유추된 착각 말이다.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아니, 황태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령을?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사용인들이 그리 행동했던 이유는 알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물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던 남자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를 태자비의 방에 묵는 손님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은 아직 이혼에 관한 소문만 무성한, 그러니까 아직 길리언과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저뿐만 아니라 그 또한 좋지 않은 소문에 휩쓸릴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조심성이 없는 행동에 엘렌은 하마터면 한숨을 내쉴 뻔했다.

‘하긴, 애초에 화를 냈던 것도 걱정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니…….’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원래 그랬다.

아주 옛날, 이제는 사라진 시간 속에서부터.

그동안 의외인 면모를 참 여러 가지로 보아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리 생각하니 어떤 의미로는 참 한결같은 이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엘렌은 케이든에게 전해야 할 용건 중에 ‘조심성 있는 태도를 기를 것’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오늘 그가 돌아오면 대회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도 물어봐야겠어. 아, 소르본 영애에 대한 언질도 해 놓아야 하는데…….’

이리될 줄 알았다면 정보망에 대한 정비를 조금 더 빨리 해 놓을 것을.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그동안 일이 몰아친 데다 길리언을 피해 다닌다고 미처 거기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사실이 못내 걸렸던 그녀는 지금이 정보망을 확장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목욕 후 갈아입은 옷은 아주 편안했다.

그녀가 거동이 불편한 환자임을 의식했는지, 전반적으로 황궁의 실내복 같지 않은 품이 넓은 옷이 마련되었다.

“두 분 모두 감사드려요.”

엘렌의 인사에 마리아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할 일인 것을요. 다른 필요하신 일은 없으신지요?”

“아, 혹시 전하께서 오시면 제게 알려 주시겠어요? 전해 드릴 말씀이 있는지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쪼록 편안한 시간 되시길.”

두 사람은 공손히 인사를 남긴 뒤 방을 나갔다.

그러나 그날 그녀에게는 그 어떤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긴 밤, 멀찍이 켜져 있던 호롱불이 꺼질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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