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렇게 시간이 지나, 황실 주관의 승마 대회 전날인 오늘.
올해로 열일곱이 된 소년 엘시어는 날이 밝자마자 아카데미를 뛰쳐나왔다.
아카데미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누님!”
“엘, 체셔 부인께서는 집 안이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단다.”
우당탕, 달려오던 엘시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보다 누님, 이혼이라뇨. 제가 들은 것이 사실입니까?”
“아버지께서 네가 학우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다닌다며 걱정하시던데. 사실이니?”
엘렌 또한 동시에 질문을 던지자, 아직 열일곱에 불과했던 소년 엘시어는 발끈해서 외쳤다.
“아니, 누님. 그건 학우가 아닙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서 무언가를 배울 생각은 없이 타인을 헐뜯기만 하는 이들을 제가 존중해야 합니까?”
“존중할 필요는 없지만 참을 필요는 있지.”
네가 친 사고의 수습은 아버지께서 하시잖니.
그녀가 철없는 동생을 타박했다.
“아니, 그것들이 같잖은 실력으로 먼저 아버지를 들먹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아버지를 욕보이는 말을 듣고도 참아야 한단 말입니까?”
엘시어는 금방 흥분해서는 씩씩대며 외쳤다.
누이는 내 편을 들어 줘야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리고 있는 그는 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누이의 말에 속이 상했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것 또한 아버지를 욕보이는 일이란다. 그러니 머리를 쓰렴, 엘.”
엘렌은 한숨과 함께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검을 쓰려거든 제대로 교수님께 청해서 입회인을 둔 뒤 결투를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검 말고 다른 것을 써야지.”
“다른 것이라니요?”
“내가 들었던 것은 네가 페리윙클가의 영식을 쥐어팼다는 이야기였지. 페리윙클이라 하면 쓸 것이야 차고 넘치지 않니. 아, 그래. 소르본 영애와는 안면이 있니?”
“안면은 딱히……. 하지만 누구인지는 압니다. 왜 그러십니까, 누님?”
“내가 알기로 두 사람 사이에는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결투가 있었을 텐데. 나라면 그것을 이용하겠구나.”
밀러 페리윙클.
엘시어와 싸웠다던 그 공자는 엘렌도 알고 있던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얼마 전 황궁 연회에서 그의 소식을 운운하여 페리윙클 부인의 입을 닫게 만들었을 만큼, 그 이름은 유명했다.
여자 문제로 결투, 말을 못 가려서 결투.
그는 항상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니는 이였고, 소르본 영애가 엮인 일은 그가 아카데미에 있을 적 벌인 일이라며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였다.
일의 발단은 별것 아니었다.
그저 그가 듣는 수업에 소르본 영애가 있었고, 그녀는 제법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이었으며, 그것이 검술 교양 수업이었던 것뿐이었다.
여러모로 아카데미의 말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밀러 페리윙클은 그 모든 수업에서 역시 말석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남성이 유리한 검술 교양 수업에서까지도 소르본 영애보다 아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나이대의 사춘기 소년들은 으레 자존심에 불타오르고는 한다.
그는 ‘어차피 관료로는 일하지도 못하는 게 신랑감이나 알아보러 와서는 아카데미의 성적을 도둑질 해 간다’며 빈정댔고, 소르본 영애는 자신의 명예를 건 결투를 신청했다.
결과는 물론 밀러 페리윙클의 패배였다.
검술 교양 수업은 스몰 소드를 사용했고, 속전속결의 퍼스트 블러드 룰을 따르는 결투는 소르본 영애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런 소동은 각 개인의 일만으로 마무리 지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이후 이어진 것은 가문 간 권력 관계를 이용한 괴롭힘이었다.
그녀는 학업을 지속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좋지 않은 소문들이 따라붙었고, 성적도 떨어졌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소르본 영애가 검술 대련 중 고의적인 상해를 입고 만 것이다.
그녀는 왼쪽 뺨에 지울 수 없는 자상을 얻었고, 그녀의 얼굴 절반은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두 가문 사이에 어떤 대립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소르본은 그러지 않았다.
권세가인 페리윙클에 항의해 봤자 비웃음이나 살 게 뻔하다고 판단한 백작이, 잃을 것만 즐비한 자존심보다 당장 혼삿길이 막힌 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르본 영애는 혼인 대신 평생 가문에 봉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
그러나 백작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인이 혼인하지 않고 가문에 남는다고 하여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줄 가문 따위, 적어도 그들의 사회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 대외적으로 시끄러운 소문이 돌길 원하지 않았던 페리윙클이 사과의 의미로 그녀의 혼사를 직접 주선하겠노라 제안을 해 왔다.
그들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귀족파로 전향해 조용히 일을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파에 남아 혼인 시장에 내놓을 수도 없는 딸을 부둥켜안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이기보다 가주이길 선택했던 소르본 백작은, 페리윙클의 손을 잡길 택했다.
그렇게 사건은 묻혔다.
메이 소르본의 이름은 아카데미에서도 사교계에서도 사라지게 되었고, 남은 것은 밀러 페리윙클이 자랑스레 던지고 다니는, ‘주제도 모르는 계집의 혼사를 책임져 준’ 저희 가문에 대한 찬사뿐.
그리고 엘렌은 그 결말에 굉장히 분개해했던 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아, 그 결투 말이지요. 누님께서는 그것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나니까. 그보다 혹시 소르본 영애는 아직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니?”
“누가 자퇴를 했다면 소문이 돌았을 텐데, 없었던 걸 보면……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누님.”
“수업 중 사고가 있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고?”
“네. 그런 공지는 없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너는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면 소르본 영애와 페리윙클 영식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증인을 확보해 두렴. 영애와 친해져도 좋고, 어렵다면 그 수업을 같이 들은 학생들이라든가, 기숙사의 룸메이트라도.”
“네. 알겠습니다, 누님. 그런데 그걸 확보해서 무얼 하시려고요?”
“무얼 하긴.”
메이 소르본의 외숙부인 아발란쉬 후작은 아직 후계자가 없는 유일한 후작이며, 조카 사랑, 그것도 메이 소르본을 끔찍이 여기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아발란쉬 후작이 소년들의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의구심을 가진 것은, 그녀의 혼사가 지나치게 빠르고 이상하게 추진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다 정리되고 난 뒤였다.
엘렌은 공교로이 맞아떨어진 상황에 제법 기꺼워하며 말했다.
“다른 것을 어떻게 쓰는지, 내가 손수 가르쳐 주어야지.”
그녀의 말에 엘시어는 제가 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당초의 목적을 새까맣게 잊고 흥분해서는 외쳤다.
“역시 누님께서도 그놈은 조져 놔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썼다간 너도 그 대상에 포함될 줄 알려무나, 엘.”
엘렌이 핀잔을 던졌다.
* * *
황실 승마 대회 당일이 되었다.
엘렌은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테리어드와 함께 회장에 도착했다. 물론 옆에는 신나서 재잘대는 엘시어도 함께였다.
말을 끌고 들어오는 그녀를 대회 주최 책임자인 케이든이 반겼다.
“아, 크라이언트 영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그렇지요. 그보다.”
그가 멀리 한편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오늘은 가능하면 나와 함께 있지요.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체셔 경이라도 옆에 둘 수 있도록 하고.”
그가 가리킨 곳은 크렘벨을 비롯한 공후들의 천막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요는 길리언의 난입을 막기 위해서 신경을 써 주겠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 이쪽은 제 동생 엘시어랍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지요.”
그녀는 엘시어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엘. 인사드리렴.”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라이언트의 엘시어라고 합니다.”
“동생이 누나를 많이 닮았군요.”
연한 금발에 제비꽃빛 눈동자를 가진 똑 닮은 얼굴 둘이 나란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저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빼닮았다고 하시더군요.”
“백작 부인께서 굉장한 미인이셨나 봅니다.”
“초상화를 보니 과연 그러시긴 하셨습니다만, 그보다도 일단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엘렌이 제 가슴팍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것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다, 결국 케이든이 먼저 웃었다.
그러자 곁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뚱한 얼굴로 끼어들며 말했다.
“전하, 저는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아, 그래. 잘 놀다 가게.”
“정말 너무하십니다!”
“너무한 건 자네 목청이야!”
케이든이 눈살을 팍 찌푸리며 귀청이 터지겠다 투덜거렸다.
그들의 뒤편에서 체셔가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마차로 그들의 뒤를 따라온다더니 이제 도착한 모양이었다.
“스위니! 왔구나.”
“응. 아, 전하. 체셔의 스파니엘이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영애. 재밌게 즐기다 가시지요.”
“말씀 감사합니다.”
케이든이 백작 내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자, 스파니엘은 엘렌이 있는 방향으로 슬쩍 다가왔다.
“저쪽에 페리윙클이 와 있더라. 물론 오세먼도.”
“그래?”
“황실 연회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도 뻔뻔히 얼굴을 들이밀러 오다니,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해.”
“뭘, 새삼.”
엘렌이 별 반응 없이 넘기자, 스파니엘은 넌 애가 너무 무덤덤하다며 한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엘시어를 불러 말했다.
“엘, 페리윙클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알았지?”
“스위니 누님, 애초에 그 자식은 저한테 안 됩니다.”
일단 걘 몸치라고요!
엘시어가 그런 놈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라 으스대며 외쳤다.
“둘 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오늘 나 어때?”
엘렌이 제자리에서 몸을 반 바퀴씩 돌리며 제 앞뒤를 보여 주었다.
“아주 멋져. 말을 타지 않는 나도 한 벌 정도는 맞춰 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눈에는 잘 띄고?”
“물론. 초원 위의 붉은색이라니, 아주 독보적이지.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오늘 네가 그걸 입고 우승해서, 그 승마복을 내게 선물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잘 소장하고 싶거든.”
“아쉽게도 그건 무리겠는걸.”
그렇게 두 사람이 실없이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부터 소란이 일자, 테리어드가 바깥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크렘벨 공이 왔군요.”
왠지 웅성웅성 시끄럽더라니, 회장에 길리언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는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 오던 길리언과 엘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싸늘함과 분노만 내비칠 줄 알았던 그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른 강렬한 안광을 뿜으며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