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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20화 (20/128)

<20화>

한바탕 외치려던 스파니엘의 팔을 엘렌이 잡아챘다.

엘렌은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페리윙클 부인.”

“말씀하세요.”

“소문이야 항상 잘 모르는 이들이 제 구미에 맞게 만들어 내는 것이니, 부인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을 수도 있지요.”

네가 그러길 바라니까 그런 소리나 지껄이는 것 아니냐.

차분히 비꼬는 엘렌의 말에 페리윙클 부인의 낯이 붉어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페리윙클 영식께서 아카데미의 낙제생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갑자기 부인께서 밀러의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거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싶어서요.”

엘렌이 태연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페리윙클 부인의 뺨이 파들,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건 또 무슨 행동인지 모르겠군요.”

“어머, 부인께서 일러 주신 바를 잘 배워 실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엘렌이 입가를 부채로 살짝 가리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정확히는 기초 교양 과목인 제국의 역사 낙제생이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나요? 1학년 공통 과목을 2학년이, 그것도 재수강으로도 통과하지 못해 교수 재량으로 특별히 재시험을 쳤다던데. 그렇다면 확실히 아카데미의 낙제생은 아니군요. 어쨌든 진급은 할 테니까요.”

“그건…… 그 아이의 시험지에 문제가 있었던 탓에……!”

“아하, 그렇군요. 영식 한 분께서만, 시험지에 문제가.”

엘렌은 시종일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참. 소문은 아니 땐 굴뚝에 나기도 하나 보군요.”

엘렌의 얼굴에 오늘 연회장에 들어와 보인 것 중 가장 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페리윙클 부인은 황당함과 분노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와중 말을 더듬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 하고픈 말을 해 준 것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오세먼 남작 부인이었다.

“아직 크렘벨 부인께서는 슬하에 자녀가 없으셔서 어미의 마음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오세먼 남작가.

크라이언트와 비슷한 과정을 밟는 중에 있는 가문이었다.

가진 재력 덕에 제 수준보다 높은 이들과 어울리게 된 가문으로, 귀족파의 핵심 돈줄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라 불리지만 그것은 귀족파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난 그대 같은 이와 안면을 튼 적이 없는데.”

너 정말 한미한 가문 출신이구나.

엘렌이 그 소리를 요령 좋게 돌려 말하자, 오세먼 남작 부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렘벨 공작 부인. 릴리 오세먼입니다.”

“아, 오세먼.”

이렇든 저렇든 엘렌의 현재 지위는 공작 부인. 누군가의 소개도 없이 말을 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공격적인 언사라면 더더욱.

오세먼 남작 부인은 그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듯싶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먼저 해야 했는데. 죄송하군요.”

“괜찮습니다. 아마 들었어도 잊었을 것 같아서.”

오세먼 남작 부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자 페리윙클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 내가 괜찮은 의사라도 알아봐 줄까요? 아무래도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 매일같이 보는 드레스의 유행까지도 잊은 모양인데, 내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다면 저는 괜찮은 의상실을 알아봐 드릴 수 있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으니 상품의 질은 장담해 드릴 수 있지요.”

오세먼 남작 부인이 자꾸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자, 참다못한 스파니엘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장담은 무슨. 죄다 탈리아 하위 호환이던데.”

“뭐라고요?”

“아, 설마 모르고 계셨나요? 소속 디자이너들을 좀 더 제대로 관리하시는 건?”

“크라이언트의 탈리아와 비교하시는 건 곤란합니다! 저 남사스러운 디자인의 드레스를 지금 어디에……!”

빈정대는 스파니엘에게 오세먼 남작 부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엘렌이 정말 실망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세먼이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 안목 없음을 드러낼 정도라니. 실망이 크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안주인의 교양이 이리도 부족해서야. 잊는 게 아니라 애초에 기억할 필요도 없었겠어요.”

“크렘벨 부인!”

“계속 내 차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른 이들이야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부인은 안 되지요. 지금이라도 다른 말은 않는 게 낫지 않겠어요?”

릴리 오세먼은 분기에 찬 눈으로 엘렌의 차림을 훑었다.

지금의 유행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오프숄더 드레스.

칼라는 어디에 내다 버렸는지 죄 치워 버렸다.

대신 보이는 것은 일자로 뻗은 쇄골과 매끄러운 목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네크리스.

소매에는 또 뭘 그리 주렁주렁 달았는지 거기에 소모된 레이스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프 진 스커트의 라인은 아름다웠고, 밑단에 놓인 수도 고급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는 손목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브레이슬릿도 척 보기에 네크리스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보석은 일절 박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는 저 비녀까지도.

‘돈은 제법 썼고, 제작도 명장 중의 명장이 했어. 하지만 저런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의 드레스라니…….’

본인이 유행을 선도해 보겠다는 생각이라도 했던 걸까.

오세먼 부인이 내심 비웃으며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안목이 그리도 형편없나?”

“전하!”

‘전하?’

“유행도 모르고 선물한 내가 죄인이군.”

케이든이 대뜸 나타나 빈정거렸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오세먼 부인은, 뒤늦게 엘렌의 드레스가 황태자와 관련이 있었음을 알아차리고는 외쳤다.

“전하, 그, 그것이 아니오라……!”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놀란 것은 함께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렌이, 유감이란 단 한 자락도 찾을 수 없는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제 충고가 너무 늦었나 보군요. 미안해요, 페리윙클 부인, 오세먼 부인.”

“네, 네?”

페리윙클 부인은 제가 이렇게 대놓고 호명당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낯을 지었다가, 얼른 안면을 바꾸어 케이든에게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생각하신 그런 것이 아니옵고…….”

“체셔 경. 내가 지금 ‘나는 유행에 이어 화법에도 무지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은 게 맞나?”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굉장하군. 스승님께도 들어 본 적 없는 혹평이야.”

그러나 케이든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뱉어 냈다.

테리어드까지 케이든의 비아냥거림에 가세하자, 두 여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대들의 의견은 꼭 폐하께 아뢰도록 하지. 지명하신 디자이너가 형편없단 소리를 듣더라고 말이야.”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아니오라?”

“그것이…….”

다 잡아 놓은 먹잇감을 감상하듯, 케이든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들을 훑었다.

“……저희가, 견식이 부족해 몰라봤던 것 같습니다.”

오세먼 부인이 뼈마디가 하얘지도록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하.”

그녀는 사과와 함께 고개를 깊이 숙였고, 케이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무지로 인한 실수는 용서해 주는 것이 도리겠지.”

그 말과 함께 그가 고갯짓을 까딱해 연회장의 입구를 가리키자,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까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누군가의 작은 탄식이 울렸고, 그곳에서 등장한 인물을 본 그들은 말문을 잃고 말았다.

트라이아 공작 부인이, 그들이 유행도 못 따라오느냐며 신랄하게 비난했던 그 드레스를 입고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파티장의 열기가 여기에 모여 있는 느낌이네요.”

아쉴리 트라이아.

이제 열다섯이 되는 아들을 둔 중년의 부인.

공작의 지지를 업고 차기 공작 부인이 될 이를 선별할 권리를 가진, 황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힘을 가진 자다.

또각또각, 힘 있는 걸음으로 걸어온 그녀가 엘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가 첫 개시가 아니었을 줄이야.”

“안녕하세요, 트라이아 부인.”

엘렌의 인사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먼저 엘렌의 옆에 서 있던 케이든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궁금함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엘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렘벨 부인도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드레스의 디테일이 잘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가 엘렌의 드레스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물었다.

“……그건 탈리아의 작품인가요? 크라이언트에서 기존 디자인을 전부 파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저희 탈리아에 이 작품과 같은 라인의 드레스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이건 전하께서 선물해 주신 것이랍니다.”

엘렌이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아, 그러면 이것은 황실의―”

“네. 트라이아의 장인이자 현 황실 디자이너인 그의 작품이 맞답니다.”

“어머.”

작품이 트라이아 출신의 디자이너에게서 나온 것임을 명확히 짚어 주는 엘렌의 말에, 트라이아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소식이 참 빠르시군요.”

“아시다시피 크라이언트가 의류에는 관심을 제법 두었던지라. 저는 이리 훌륭한 디자이너를 길러 낸 트라이아의 문화 교육에 관심이 크답니다.”

아쉴리 트라이아.

그녀는 자신의 것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위신을 세운다는 명목하에 말도 안 되게 자비로운 일을 행할 때도, 반대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할 때도 있었던 인물.

그리고 트라이아령 내 문화, 교육 정책은 그녀가 참여하고 있는 분야였다.

“후후, 크라이언트의 눈에는 대성할 것만이 든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영광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그 영광은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트라이아의 것이 되어야 하겠군요.”

“어머! 이거 자칫하면 나도 홀려 들어가겠네.”

그녀는 띄워 주는 것이 싫지 않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탈리아에서 부인께 저희 제품을 조금 보내 드려도 될까요?”

“내게 말인가요?”

“네.”

“선물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던데.”

그녀가 웃음기 어린 눈길로 엘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별다른 것은 없답니다.”

엘렌은 페리윙클과 오세먼이 있는 곳으로 손을 펼쳐 보였다.

“그저 다른 부인들께서는 취향에 맞지 않는 듯하시어…….”

그리고 갑작스러운 흐름으로 이야기에 소환당한 그녀들의 얼굴은 곧장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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