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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9화 (19/128)

<19화>

시간은 순조로이 지나 어느덧 황궁 연회 당일이 되었다.

엘렌의 맞은편에 앉아 연신 흐뭇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도 잘 소화하는구나. 열심히 고른 보람이 있어.”

“무엇을 골라 왔어도 난 소화했을 거예요.”

엘렌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툭 대답하자, 테리어드가 큭큭 웃으며 긍정했다.

“맞아. 그래도 이 붉은색은 정말 잘 어울려서 한 소리야.”

그리 말하며 웃는 그는, 확실히 오늘은 기사보다는 귀족 도련님과 같은 태가 났다.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 넘긴 결 좋은 밀빛 머리와 눈동자에 맞춘 듯 갖춰 입은 봄빛 예복이 제법 멋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테드, 근 몇 년 동안은 연회에 제대로 참석도 하지 못했죠?”

“응? 뭐, 그렇지. 누군가는 근무를 서야 하니까.”

“그렇군요……. 미안해서 어쩌죠.”

“미안해? 무엇이?”

“제 탓에 파티를 즐기지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다른 영애들과 환담도 즐기고 해 봐야 할 텐데…….”

그러자 테리어드가 떨떠름한 듯 미묘한 얼굴을 했다가, 곧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직은 그런 곳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 그러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엘렌이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함을 버리지 못한 듯하자, 테리어드가 손까지 내저어 가며 웃어 보였다.

“아서라. 어련히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 오늘은 네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내겐 가장 중요해.”

“……고마워요, 테드. 진심이에요.”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왜 찾아왔냐며 타박하기보다는 반겨 주는 게 좋겠어.”

“그건, 황실 기사가―”

“그래, 그래. 황실 기사인 내가 잘못했다. 그보다 화장 망가지겠어.”

테드는 쿡쿡 웃으며 엘렌을 놀렸고, 엘렌은 한마디를 더 하려다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귀족들의 5월은 소비와 유흥의 달이다.

5월이 되면 그들은 수도에 모여 사교 활동을 즐겼고,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연회는 언제나 황실이 주최했다.

그 황실 주최 파티가 끝나고 나면 수도에 저택을 가진 가문들이 각각 파티나 행사들을 열기 시작하는데, 그 기간을 흔히들 ‘사교 시즌’이라 표현하고는 했다.

오늘은 그 사교 시즌의 포문을 여는 황실 연회의 날이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야회복들을 차려입은 남녀들이 하나둘씩 황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문 예복 차림의 테리어드가 씩 웃으며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제 손을 붙잡고 내리시지요, 레이디.”

“감사히.”

테리어드는 엘렌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그녀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너무 아이 취급하는 것 아니냐며 엘렌이 가볍게 눈을 흘기자, 그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알겠으니 이만 가자고 그녀를 이끌었다.

오늘 테리어드는 그녀의 에스코트 역을 맡았다.

그것은 파티장에서의 길리언의 접근을 최대한 막아 주기 위한 황태자의 인선으로, 분명 그녀를 생각하면 좋은 선택이었지만, 그 당사자에게 어떨지를 생각하면 그녀는 마냥 고마워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황실 기사가 그 혼자만은 아닐 텐데 어째 파티 때는 항상 근무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걱정하던 체셔 부인을 기억했던 엘렌은, 오늘 그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아주 미안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테리어드는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었지. 후계도 스위니의 아이를 데려오자고 했었고…….’

정말로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걸까?

엘렌은 흘끗, 테리어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엘렌을 내려다보았다.

“들어가자.”

그가 부드러이 웃으며 엘렌을 이끌었다.

고민되는 것들이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이 순간의 온기가 너무나도 따듯했다.

다만, 입장하는 순간까지는.

“……어머, 크렘벨 공작 부인이 오늘은 크렘벨 공작과 함께하지 않았네요.”

“저번에도 혼자 오셨었는걸요. 마음 아프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입장도 따로 하는 데다 옆엔 체셔 경이라니…….”

익숙한 악의.

테리어드는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듣지 마, 저런 소리.”

머리 위에서 울리듯 들려오는 소리에 엘렌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요. 틀린 말도 아니고. 들어 두면 다 쓸 데가 있답니다.”

엘렌은 어째서인지 정말로 거리끼지 않는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걱정되었던 테리어드가 자꾸 그녀를 곁눈질하자, 엘렌은 사서 걱정한다며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려 주었다.

“엘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은 스파니엘 체셔로, 체셔 경 테리어드의 여동생 되는 이였다.

“스위니! 오랜만이야.”

“오, 그 사탕 같은 애칭은 제발 삼가 주길 바라.”

그녀는 그딴 걸 애칭이라고 지어 놓은 저 머저리를 왜 널 보러 오자마자 함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었다.

그에 발끈한 테리어드가 무어라 한소리를 하려 했으나, 옆에 있던 코엔하임 경 모리스의 눈치에―그는 스파니엘 체셔의 약혼자이다― 다정한 체하며, 제 여동생에게 들러붙는 친우를 벌레 보듯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제법 시끌벅적한 광경이었지만, 엘렌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그저 아름다웠다.

살아 숨 쉬는 친우와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하는 오라비,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

이들은 모두 사교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흔히들 표현하기로는 울타리 안쪽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엘렌의 기억 속 그들의 마지막을 들추라면 이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사망’.

이 두 사람은 길리언 크렘벨의 반란 당시 끝까지 황태자를 위해 그 곁을 지킨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죽음들을 제 사랑을 위해 외면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친우가 실신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에도, 이후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자결했을 때마저도.

슬퍼서 눈물이 흐르고, 견디지 못해 울부짖고, 마침내는 그 상실이 제 몸을 갉아먹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녀는 끝내 그 모든 것을 외면했다.

겨우 그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어쩌면 이전 삶의 결말은 그 모든 외면에 대한 대가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엘렌은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런데 드레스 꼴이 저게 뭐죠?”

“그러게요. 목덜미를 저렇게 훤히…… 어휴, 남사스러워라.”

“크렘벨의 이름에 완전히 먹칠이로군요.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어쩌면…….”

“그래도 저 섬세한 금박과 레이스를 보세요.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걸까요?”

“섬세하긴요. 얼마 전에 트라이아 부인께서 착장하신 드레스는 보셨나요? 그 드레스야말로…….”

제멋대로 떠드는 소리들.

그들은 이전부터 그랬다.

타인을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것으로써 제 가치를 증명하려 드는 자들.

그런 의미에서 ‘졸부 크라이언트’라는 말은 그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가십거리 중 하나였다.

전에는 다른 이들처럼 제 부인을 보듬어 주지 않는 길리언이 야속했더랬다.

제가 조금 더 잘하면 될까, 언젠가는 저를 돌아봐 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소리를 엘렌은 미소 띤 얼굴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어머, 페리윙클 부인. 대화가 참 흥미롭군요. 그 이야기, 제게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엘렌이 대뜸 끼어들어 오자, 몇몇 여인이 당혹에 젖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대놓고 말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엘렌.”

함께 있던 테리어드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엘렌이 괜찮다며 손만 한 번 휘젓고 걸음을 옮기자, 스파니엘이 그에게 눈치를 한 번 주고는 엘렌의 곁에 따라붙었다.

엘렌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페리윙클 백작 부인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어머, 어쩜. 크렘벨 공작가의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어 말씀드려요.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랍니다, 크렘벨 부인.”

“아……. 워낙에 목소리가 크셔서 광장 토론이라도 즐기시는 줄 알았는데요. 부인들끼리의 사적인 대화였다면 미안하게 됐군요.”

엘렌은 제발 들어 달라는 듯 커다랬던 그들의 목소리에 대해 언급했다.

‘레이디의 덕목’이라는 것을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적인 대화에 목소리를 키우는 것 또한 레이디의 덕목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던 탓이다.

그것을 아는 페리윙클 백작 부인이 기분이 상했는지 쏘아붙였다.

“사적이랄 것까지는 없었답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물어보셨지요? 저희가 들은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아하. 소문.”

“마침 여기에 당사자가 계시니, 여쭈어도 될까요? 헛소문이라면 하루빨리 종식시킬 수 있도록 응당 도와 드려야 하니까요.”

“물론이죠. 말씀해 보세요.”

“제가 들은 것은 부인과 크렘벨 공의 이혼설이랍니다.”

그들은 이혼설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무언가 또 크렘벨 부인이 공작에게 홀대를 받았겠거니, 그 탓에 아랫것들에게서 이야기가 새어 나왔겠거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엘렌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다니 제가 따로 설명할 필요를 덜었군요. 맞습니다, 이혼.”

“……네? 뭐라고요?”

“어머, 제가 이렇답니다. 연세를 고려해 드렸어야 했는데.”

엘렌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크렘벨 공과, 이혼, 한답니다.”

이혼.

그들은 그 단어에 모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조용해졌다.

“공께서 서명만 하시면 끝나는 일인데…….”

대체 왜 도장을 찍지 않으시는 건지.

엘렌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이혼이라, 혹 말씀하신 주객이 바뀐 건 아닌가요? 제가 듣기로는 이혼 통보를 받으셨다고 했는데.”

“페리윙클 부인!”

페리윙클 부인이 대놓고 엘렌을 공격하자, 엘렌이 적당한 수준에서 잘 대처하는 듯해 입을 다물고 있던 스파니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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