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원래 모든 안건을 전년에 미리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일이라는 게 융통성이 조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수준이 아니니 하는 말입니다.”
“아, 미안합니다. 재정 상태는 영지마다 다른 것인데.”
“……영지 재정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인지 제게도 좀 가르쳐 주시지요.”
길리언 크렘벨과 바로크 후작의 설전이 이어지자, 계속해서 빙글빙글 웃고 있던 케이든이 끼어들었다.
“……제게도 발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리해라.”
황제가 네 똥은 네가 치우라는 듯 얼른 허락했다.
“보수 필요성이 있다고 인지된 영지들에는 무사히 공사를 끝마칠 수 있도록 정도에 따라 지원금을 책정해 보내시면 될 듯합니다.”
“흠……. 지원금이라. 어느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
“최대 5할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자 트라이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예정에 없던 사업이잖습니까. 5할이라 하더라도 가용 자금이 얼마인지에 따라 감당하기 어려운 영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최대 7할까지는 해 주셔야 합니다.”
“5할과 7할이라니, 편차가 너무 크군.”
헤지스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케이든이 트라이아 공작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는 말했다.
“피해 다발 지역과 마지막 보수 이후로 5년 이상 지난 곳들을 대상으로 잡아 최대 5할이지만, 대상을 줄이면 최대 7할도 가능은 할 듯합니다.”
“폐하. 그렇다면 일단 대략적 규모를 파악한 뒤 의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조사는 얼마나 걸리나?”
트라이아 공작의 낯에 화색이 돌자 괜히 기분이 나빠진 케이든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가급적 이달 안으로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분위기가 사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계속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던 아발란쉬 후작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황실에서 재정 부담을 덜어 주신다면 보수가 한결 수월할 것 같군요.”
‘저 할아범은 이제야 입을 여는군.’
그것이 못마땅했던 케이든은 결국 제 성질대로 살짝 초를 쳤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곳들은 적절성과 사용 여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케이든이 덧붙이는 소리에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이해가 스쳤다.
그에 바로크 후가 무어라 더 입을 열려 했으나, 이는 더 이상 말을 늘이고 싶지 않은 황제에 의해 금방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래, 그럼 바로 투표하지. 이의 있는가? 없겠지?”
겨우 이따위 것에도 반대를 하면 너희도 어지간한 좀생이다.
딱 그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황제는 정확히 3초를 기다린 뒤에 선언했다.
“그래, 통과. 이 이후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하지.”
황제는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귀찮은 일을 하나 해치웠다.
* * *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케이든은 대놓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망할 영감탱이들 같으니. 돈 얘기에 달려드는 꼴이 아주 못 봐 주겠군!”
“회의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풀리셨나 봅니다.”
그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리어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 하, 그 늙은이들 앞에 크라이언트 영애를 두어 봤어야 하는데.”
케이든이 중얼거리자, 테리어드가 기겁해서는 외쳤다.
“엘렌을 데리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왜.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전하!”
케이든이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한 방 먹고 당혹에 빠진 얼굴을 상상해 보라고. 진귀한 구경거리지.”
“엘렌을 그런 상상에 갖다 붙이지 마시죠.”
테리어드가 정색하자, 케이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쨌든 이번에는 영애의 공로가 컸어. 앞으로는 더욱 그럴 테고.”
그는 소파에 푹 주저앉아 고개를 등받이 너머에까지 젖히고 기대 누웠다.
“사실 황실의 귀보는 과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보다시피 기우였어. 영애의 말대로 내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야.”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테리어드가 얼굴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태자비의 반지를 내린 것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아까까지는 그리도 편을 들더니.”
케이든이 의외라는 듯 묻자, 테리어드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건 태자비의 물건 아닙니까. 단순히 아낀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물건입니다.”
“그리 생각하라고 내린 거야. 자네부터 그러는 것을 보니 적절한 조치였군.”
“전하, 하지만―”
“어차피 영애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뱉으면 그만이야. 공개하고 싶다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나중에 태자비를 들이실 때는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체셔 경.”
드물게 감정적으로 달려드는 테리어드의 모습에, 케이든도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난 내 어머니의 비극을 나 스스로 반복할 생각 따위는 일절 없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무겁게 떨어지는 테리어드의 사과에, 케이든이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알아 온 사이라지? 걱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나도 영애도 스스로의 앞길을 위해 결정한 일들이다. 내 결정은 끝났어.”
“예. 죄송합니다, 전하.”
“그래. 그럼 이제는 영애에게 보낼 적절한 선물을 생각해 보지. 아무래도 지원금이 기존에 논의했던 5할을 넘어설 것 같거든.”
케이든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테리어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 * *
“아버지, 일전에 제가 드렸던 카탈로그의 디자이너, 섭외해 두셨어요?”
“오냐, 퀸시 공방 말하는 게지?”
“그곳뿐만 아니라 올리비에 의상실 것도 드렸었잖아요!”
“올리비에에 있던 디자이너는 엊그제 인사까지 마쳤잖느냐.”
“그건 마리에였어요!”
오, 이런. 어째서 의상실 이름들은 하나같이 이다지도 개성이 없는 게냐!
다니엘이 냅다 욕을 갈겼다.
이제 다음 주면 사교 시즌을 여는 첫 연회가 열린다.
슬슬 초기 물량 정도는 거뜬히 준비되어 일이 궤도에 올랐을 타 의상실들과 달리, 기존에 생산하기로 한 디자인들을 전면 폐기하고 새로이 시작했던 크라이언트 상회는 아직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었다.
원래 이 시즌에는 어느 의상실이나 쪽잠을 자 가며 물량을 생산하기 마련이지만,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손이 급했던 크라이언트 상회는 반쯤 돌아 버린 듯한 전략을 내놓았다.
직공 여러분! 철야하세요!
수당은 따따블로, 판매액에 따라 성과급까지!
벌당 마진은 평소보다 조금 덜 남겨도 된다.
어차피 이번엔, 우리가 독점하다시피 드레스를 판매하게 될 테니까!
그녀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하루. 크라이언트 백작저에 익숙한 손님과 함께 소포가 하나 날아들었다.
들뜬 목소리의 샐리가 엘렌을 불렀다.
“아가씨!”
“무슨 일인데 그래?”
“세상에, 체셔가의 도련님께서 오셨어요.”
“테드가?”
황성에서 기사단 근무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크라이언트 영지까지 왔다고?
엘렌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려가는데, 옆에서 샐리가 함께 따르며 호감 가득한 목소리로―어머, 어쩜 저리도 훤칠해지셨는지!―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테드!”
“엘렌. 역시 집이라고 얼굴이 훨씬 낫구나.”
1층 홀에서 그녀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던 테리어드가, 제법 오빠처럼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렌에게 선물을 보낸다는 이야기에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던 그는, 막상 케이든이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하자 곧 당사자보다도 선물 고르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영애는 의외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보던데.]
[어울리기도 잘 어울리지요.]
[이건 어떤가?]
[화사하긴 한데…… 엘렌은 조금 더 강렬한 색상이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이건?]
[괜찮네요. 후보로 두지요.]
[아, 이 드레스에는 아무리 봐도 진주야. 시종장, 가서 진주로 만들어진 것들을 전부 가져오라고 해!]
그렇게 완성된 한 세트의 파티 드레스를, 성의를 보이려면 우편국보다는 그만한 위치의 사람을 직접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테리어드의 설득에 의해 그가 배달을 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어쩐 일로 왔어요? 황성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게 놀란 얼굴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는 살짝 쥔 주먹으로 웃음기 어린 제 입가를 살짝 가리고는, 푸흐흐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는 자주 왔었잖아. 놀라기보단 반가워해 달라고.”
“옛날의 사고뭉치 테드가 찾아온 게 아니니까 그렇죠. 황실 기사단 소속의 체셔 경.”
“예, 예. 영애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테리어드가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지적을 받아쳤다.
엘렌이 가늘게 눈을 흘기자, 얼굴에 남은 미미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그는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알았어, 알았어. 전하께서 네게 전해야 할 물건이 있으시다기에 부탁드려서 맡아 온 거야. 여기.”
짐 속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든 테리어드는, 그것을 엘렌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거야.”
“드는 모양새를 보면 서류 상자는 아닌 것 같고. 뭔가요?”
“서류 상자를 이렇게 포장해서 보내는 성격의 상사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테드, 난 지금 정말 바빠요.”
“알았어. 어서 열어 봐.”
열어 보라는 테리어드의 말에 되레 들뜬 샐리가 건네받은 박스를 열었다.
상자 안에 동봉된 것을 본 샐리가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작은 탄성을 뱉었다.
“세상에.”
상자를 열자, 가장 위에 동봉되어 있던 카드 아래로 작은 상자들과 잘 포장된 드레스가 보였다.
<그대에게 어울릴 듯하여 보냅니다. 황궁에서 뵙지요.
―케이든 이스타지오.>
“아가씨, 너무 예뻐요.”
샐리가 드레스를 펼쳐 들었다.
그것은 칼라를 치워 목과 어깨 라인을 드러낸 것이 인상적인, 엘렌이 겨냥해 준비한 황궁의 드레스였다.
“그래. 예쁘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그것을 확인한 엘렌은 진심으로 화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