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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7화 (17/128)

<17화>

이스타지오의 황제, 헤지스 이스타지오는 정말 화병이 날 것 같았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부터 불안했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

[태자 전하께서 지금 템트 하역장에 계신답니다!]

[뭐? 왜!]

[그것까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치안대를 불러서 온 동네를 휘젓고 계신다고…… 심지어 호위는 체셔 경과 코엔하임 경 단둘뿐이랍니다!]

[이…… 이 자식이!]

남의 가문 장남들은 듬직하니 가문과 제 식솔들을 책임질 재목들로 성장해 간다는데, 어째서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제 장남은 그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는가.

기가 막힌 황제는 곧 황태자에 대한 긴급 소환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부자지간은 작은 소동 끝에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 이 자식아, 쿨럭, 쿨럭!”

“폐하, 고정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미령하신 옥체가 더 상하십니다.”

“그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야! 어찌 이리 사고를 치고 다녀!”

“폐하. 사고라니요. 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일이라서 내게까지 숨기고 몰래 튀어 나갔느냐?”

“보고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던 문제라 어쩔 수 없었지요. 결단코 제 일신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헤지스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삿대질을 하려던 손을 의자의 손잡이로 내리고는 말했다.

“그래, 어디 설명이나 해 보거라. 수상한 것들을 좀 잡아냈다고?”

“예, 폐하. 일단 이것을.”

케이든은 간단히 정리해 온 보고서를 내밀었다.

“저는 밀수에 관한 제보를 받았고, 시간이 촉박하여 어쩔 수 없이 직접 확인을 하러 갔습니다.”

헤지스는 빠른 속도로 보고서를 훑어 내려갔다.

그가 읽고 있는 페이지를 흘끗 본 케이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량의 화약을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팔랑팔랑 보고서를 넘기던 헤지스의 손이 멈췄다.

“어디서 조금 빼돌렸다고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습니다. 숨겨진 초석 광산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안이 중하구나.”

“예. 다른 물품들도 조금 더 조사를 해 보아야 명확해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깊게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다. 네게 전권을 주마. 그나저나, 제보를 받았다고?”

“……예.”

“그 정보원을 통해 조사를 할 생각이냐?”

“물론 제보자도 활용해야겠지만, 그보다는 저희 정보망에 무게를 더 둘 생각입니다.”

“그래. 정답이다.”

헤지스는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이번에는 결과가 좋았으니 이리 끝난 게다. 알고 있지?”

“예.”

“넌…… 너를 잘 살펴야 해. 이제 무슨 말인지 모를 나이가 아니지 않느냐.”

“……예.”

그 순간 부자가 떠올린 사람은 같았다.

케이든 이스타지오의 생모, 릴리아 이스타지오.

독살당한 전 황후.

“그런데 폐하.”

“더 할 말이 남았느냐?”

“예. 이번 공후 회의 말입니다.”

공후 회의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헤지스가 갑자기 그 얘기는 또 왜 꺼내느냐는 듯 얼굴을 팍 찌푸렸다.

“슬슬 물의 저장 상태도 확인을 좀 하고…… 노후한 둑과 수로를 정비했으면 합니다.”

“갑자기?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느냐?”

“올해 가뭄이 심할 것이라 예측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뭄이라…… 그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면 꽤나 피곤해지겠구나. 믿을 만한 정보로 보느냐?”

“…….”

확답을 요구하는 황제의 말에 케이든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도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대가뭄이 있으리라 호언장담한 것은 엘렌 크라이언트였지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에 그 정도의 돈을 낭비한다? 그건 제아무리 크라이언트라도…….’

그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왠지 그녀의 말이 빗나간다는 상상이 잘 안 된단 말이지.’

엘렌 크라이언트의 거침없는 기세는 그에게 괜한 기대를 주었다.

다른 사람이, 설령 그것이 그의 수족인 코엔하임 경이더라도, 이런 말을 그들이 했었다면 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리 과감한 행동을 보이진 못했을 테니까.

그가 뜸을 들이자 황제 또한 한 발자국 멀리 비켜서서 말했다.

“되었다. 재해가 예측됨을 듣고도 대비를 안 할 수는 없지. 너도 그것이 신경 쓰여 말을 꺼냈을 테고.”

“…….”

“가능한 선에서, 올해 진행했어야 하는 사업들은 최대한 신경을 써 보마.”

그리 말한 헤지스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쯧, 거 바로크 후가 딴죽이나 걸지 않으면 좋겠다만.”

“그야 항상 그렇지 않았습니까.”

케이든이 빈정댔다.

“내 그 말에는 심히 동의한다만, 내 입장에서는 너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 제발 좀 자중하도록 해라.”

“폐하,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러자 헤지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심한 건 네 녀석의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행동이니라!”

* * *

크렘벨 공작저, 공작의 집무실.

오늘도 어김없이 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길리언은 뻐근해지는 목을 풀어 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점심께다.

오늘 저녁에는 작업장들에 대한 보고서를 읽을 수 있겠군.

그리 생각하며 길리언이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그의 귓가에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각하!”

목소리를 들으니 외부에 심어 놓은 그의 부하 중 한 명인 듯했다.

저렇게 큰 목소리로 시끄럽게 굴다니.

그 행동에 길리언은 얼마 전 제 집무실에 들이닥쳐 터무니없는 종이 쪼가리를 던지고 간 여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미간에 꾹 힘을 주었다.

“들어오도록.”

벌컥, 문이 열리고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이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산하의 작업장들을 관리하라 지시해 두었던 부하였다.

“무슨 일이지?”

그런데 부하의 얼굴이 심상찮았다.

그 낯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기색을 읽어 낸 길리언은 머뭇거리고 있는 부하를 재촉했다.

“빨리.”

“그것이…….”

한 번 마른침을 삼킨 부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템트 대운하의 접선처가…… 발각되었습니다. 황태자가 직접 인력을 이끌고 와 주변을 봉쇄한 뒤 조사를 시작했고, 그곳에 있던 것들은 모두 폐기하지도 못한 채 물건이고 사람이고 모두 황태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뭐?”

길리언은 펜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뭐라고?

“다시 말해 봐.”

“그것이…….”

쾅!

그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이 그대로 책상 위를 내리찍었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내리치고 만 그는, 곧이어 느껴진 무언가 날카로운 통증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망가진 펜촉과 제 손에 살짝 맺힌 피가 보였다.

“다 빼앗겼다는 게, 설마 화약, 총…… 뭐 그런 것까지 포함된 건 아니겠지?”

“그것이…… 아마 일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그걸, 그걸 들켰다고? 심지어 빼앗겼어?”

더욱 기분이 상하고 만 그는 책상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닥으로 쓸어 던져 버렸다.

와장창!

길리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너희는 꼬리를 물린 것도 모르고 뭐 한 거야, 대체!”

“……죄송합니다.”

“압수당한 품목이 무엇인지, 얼마나 빼앗겼는지! 그것부터 제대로 알아 와, 당장!”

“예, 예!”

벌벌 떨며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는, 이러다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젖어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 * *

“……자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공후 회의.

이스타지오 제국의 중대사들을 결정하는 최고 회의 기구다.

황제는 서류 바구니에 놓인 수많은 종이 뭉치 중 가장 위에 놓인 것을 집었다.

“오늘의 첫 안건은 저수지와 둑에 대한 것이로군.”

그 소리를 들은 케이든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확실히 그런 정비는 봄철에 마쳐 놓는 것이 좋지요.”

가장 처음 반응한 것은 황제파 중의 황제파, 세드릭 포트 후작이었다.

그는 군병과 관련된 산업을 귀족파에게 오롯이 넘기는 것만은 안 된다 주장하며, 흑자를 보고 있는 사업의 이윤을 모조리 적자를 보고 있는 총기 개발에 투자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봄철 공사 물론 좋습니다만, 그 예산은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자유분방하다 못해 조금 무례하기까지 한 말투가 포트 후작을 지적했다.

그는 드웨인 트라이아 공작으로, 귀족파의 핵심 세력 중 하나였다.

“어디서 튀어나오겠습니까. 그간 공작께서 걷어 두신 세금에서 튀어나오겠지요.”

포트 후작이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박은 또 다른 곳에서 나왔다.

“각 영지가 충당한다? 그렇다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니 여기서 굳이 의논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헤모니 바로크 후작이 말했다.

그는 실질적인 귀족파의 수장으로, 현 황제의 유일한 부인인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의 부친 되는 이였으며, 그녀 소생의 크레센트 황자와 이클립스 황녀의 외조부 되는 이였다.

“슬슬 노후한 시설들을 보수할 때가 되었지. 어디든 문제가 생긴 후면 늦네. 전국적으로 정비를 할 필요성이 있어.”

이 꼬장꼬장한 늙은이 같으니!

황제가 이를 갈며 쐐기를 박았지만, 바로크 후작은 역시나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 작년 말에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다가 갑자기 이리 사업을 추진하시면 여러모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포트 후의 말대로 귀족들의 세율을 올려 사업 예산을 충당하실 작정이시라면, 아무리 저희가 폐하의 은총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합니다.”

그 말에 황제는 벌써부터 열받는다는 듯 목덜미를 주물렀고, 이 안건을 낸 당사자인 케이든은 짜증을 숨긴 채 미소 지은 낯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자 이스타지오의 피를 이은 젊은 공작, 길리언 크렘벨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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