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6화 (16/128)

<16화>

“가져왔습니다.”

모리스가 두툼한 장부 두 개를 내밀었다.

“고생했다. 생각보다 빨리 다녀왔군.”

“그 친구가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빨랐습니다.”

“장부는 제게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모리스가 건네는 장부를 받아 든 엘렌이 감탄하며 말했다.

“급하게 받은 자료인데도 제가 따로 할 일이 없군요. 봐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네요.”

그녀는 휙휙 빠른 속도로 종이를 넘기다, 특정 지점에서 멈춰 기록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다른 장부를 펼쳐 무언가를 대조해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기, C구역으로 가죠.”

* * *

떨떠름한 얼굴로 양산을 든 케이든이 물었다.

“……내가 비서 역할을 하는 것은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비서 역은 일선에서 움직여야 하니까요.”

엘렌이 딱 잘라 거절하자 테리어드가 옆에서 거들며 말했다.

“맞습니다, 전하. 엘렌과 같이 제 뒤에 계셔야 합니다.”

“그게 걱정이라면 자네는 그 호칭부터 고치지.”

“아, 예, 알겠습니다. 자네는 안전하게 뒤에 있게.”

“…….”

“사람이 오네요. 집중해 주세요.”

불만스러운 얼굴로 테리어드를 노려보던 케이든은, 엘렌의 일갈에 마지못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메이플 상회분들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테리어드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자, 비교적 앳된 낯의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창고 임대 겸, 그…… 흠흠. 물건을 살피러 오셨다고요?”

“예.”

“하하, 그러시군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그리 말한 남자는 쾌활한 낯으로 그들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나 말한 바와는 달리, 남자는 출발할 생각이 없는지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엘렌은 한숨을 푹 내쉬고,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테리어드에게 건넸다.

“이걸로.”

“……?”

갑작스레 엘렌이 무언가를 건네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던 테리어드는, 손에 금화의 감각이 잡히자마자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고는 얼굴을 굳혔다.

경멸하는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한 그가 입을 열었다.

“……받으시지요.”

“아이고, 뭐 이런 것을 다.”

남자는 그 주머니를 얼른 받아 자신의 품속에 숨기고는, 신나는 얼굴로 그들을 이끌었다.

“어디부터 보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A구역은…….”

“C구역으로 가지.”

“아, C구역 말씀이십니까?”

안내자의 반문에 잠깐 케이든의 눈치를 본 테리어드는, 케이든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안내 부탁드리지요.”

“아이고, 물론입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앞장섰다.

경쟁사의 수입품을 미리 염탐하러 온 상인들이라는 설정이었던 그들은, 안내에 따라 C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창고에 적재된 화물들을 하나씩 열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여기는 로제 상회의…….”

“저쪽은 브로슈의…….”

안내자로 붙은 남자는 상세히 구역을 알려 주었고, 엘렌은 그중 제가 아는, 귀에 익은 이름들을 골라 상자를 열도록 지시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아, 아니! 거기 뭐 하는 거야!”

저 멀찍이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튀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남자는, 시야에 엘렌 일행의 구체적인 행색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헉헉, 실례지만, 무엇을 하시는 중이신지요? 오늘 별도의 화물 검사에 대해서는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그래? 자네의 소식이 늦었다니 유감이군. 계속 뜯게.”

엘렌의 말에 테리어드와 안내자는 계속해서 상자를 뜯었고, 이 구역의 담당자로 보이는 남자는 기겁하며 외쳤다.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검사관이 아닌 자가 이러는 것은 불법입니다!”

“아, 그래?”

엘렌이 싸늘한 눈초리로 반문한 뒤, 남자가 등지고 있는 쪽의 창고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저쪽. 열지.”

테리어드가 재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가 손에 잡히는 상자를 뜯었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이것 봐라?”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케이든과 엘렌이 있는 곳을 향해 크게 외쳤다.

“검입니다! 제조된 대장간의 마크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쐐기를 박는 외침이 울리자, 계속해서 신분증을 요구하던 남자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케이든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테리어드의 앞에 놓인 상자에서 검을 꺼낸 그는, 진짜로 대장간 마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불법은, 이런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는 직접 제 앞에 있는 상자를 하나 더 뜯었다.

“하, 잭팟이군.”

“설마 이거, 화약……!”

케이든이 냉소적인 얼굴로 짓씹듯 내뱉은 말에, 남자는 시체 같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 돼……. 과장, 과장님!”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두 걸음 뒷걸음질 치던 남자는, 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을 누군가를 외치며 냅다 달려 나갔다.

“당장 신호탄 올리고, 여기 전부 다 열어.”

케이든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 * *

신호탄을 본 코엔하임 경 모리스의 행동은 상당히 빨랐다.

덕분에 치안대가 도착하는 것과 담당자가 부르러 달려간 이가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봐, 당신들 뭐야!”

황급히 달려오는 이를 보고 처음에 엘렌 일행의 안내를 맡았던 남자가 속삭였다.

“저분이 운항과장님이십니다.”

엘렌 일행이 평범한 상회 사람들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제가 뇌물을 받아먹은 것에 대해 싹싹 빌면서 오늘 일에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해 왔다.

“당장 소속을 대게! 어디서 굴러온 것들이 감히 허가도 없이 이런 일을 벌여!”

운항과장이 벌게진 얼굴로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찍이서 코엔하임 경 모리스와 수도 치안대장이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아이고, 전하! 이런 곳까지는 어찌 나와 계십니까!”

“아, 마침 제때 왔군.”

케이든이 그들이 오는 방향을 보고는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치안대! 지금부터 이곳 화물들을 전부 재검한다! 다 뜯어!”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방금까지 달려오느라 벌겋게 상기되어 있던 과장의 낯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저…… 전하?”

“내가 누구냐고 묻더니, 이제는 아는가 보군.”

“저, 정말, 전하…….”

그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무허가에는 그리 대응하는 것이, 제 주어진 역, 역할인지라……!”

“네가 네 역할에 충실했는지는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전하……!”

케이든은 운항과장의 눈빛을 무시하고 그를 지나쳤다.

차곡차곡, 수많은 궤짝과 장부들이 쌓여 갔고 포박된 인원도 늘어갔다.

나온 것들은 다양했다.

처음 발견해 낸 무기나 화약을 비롯하여, 대규모 보급품으로 보이는 옷, 장비, 공구…….

별 게 아니라면 아니고, 신경을 쓰려면 아주 뒤가 찜찜한 그런 것들.

무단 외출을 들키게 된 것은 뼈아프지만―치안대에 자신의 외출을 알린 탓에― 그래도 직접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고, 케이든은 생각했다.

처음 머스킷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설마’ 하는 생각과 ‘저 여자가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하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정말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화약이 발견됐다.

‘이건 정말로 크렘벨 정도가 아니고서야…….’

숨구멍이 답답하게 죄어 오는 듯한 느낌에 그는 목에 매인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는 품목이다.

모든 생산과 유통을 국가에서 도맡아, 국가를 위해서만 생산, 이용한다.

그런데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화약이 등장했다는 것은―

‘……신고되지 않은 초석 광산이 있다는 거지. 그걸 찾아야 해.’

케이든은 어지럽게 떠오르는 앞일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했다.

‘광산을 굴리려면 필요한 필수 인력들이 있다. 그것까지 숨기지는 못해. 먼저 그렇게 의심 지역을 선별하고……. 아, 배합률 분석도 의뢰해야 해.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목을 죄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어쩐지 숨이 가빠 오는 느낌에 근처 기둥에 몸을 기댔다.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자, 옅은 금발을 단정히 틀어 올린 여인이 보였다.

엘렌 크라이언트.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

멀찍이서 분주한 사람들을 보고 있던 그녀는, 어째서인지 자신만큼이나 무언가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는 대체 뭐가 답답해서 그런 얼굴이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이었다.

마치 저만 남들과 다른 흐름 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

‘네가 증명하길 원했고, 직접 선별하기까지 한 무대 아닌가.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렇게도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나.

그는 괜스레 저려 오는 손바닥을 숨기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여자는 항상 상처받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감추곤 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속내는 명확히 읽혔다.

이를테면 그녀가 얼마나 길리언을 사랑하는지, 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

‘그랬던 여자가 지금은 무엇 때문에…….’

케이든의 시선이 허무한 눈으로 하역장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엘렌의 뒷모습으로 따라붙었다.

하, 헛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낯.

알 수 없는 웃음.

그리고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변화.

알 수 없는 여자의 알 수 없는 행태를, 그는 그렇게 계속 관찰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그녀가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을 때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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