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위험한 곳일수록 제가 함께해야지요. 만일 제가 이곳을 벗어난 이후 누군가에게 발각된다거나, 함정에 걸린다면? 제가 전하를 팔아넘기기 위해 짠 판이 아니라고 믿어 줄 사람이 있을까요?”
“…….”
“그러니 같이 가야 해요. 제 신병을 담보로 제공하는 게지요.”
“너를 의심하지 않아, 엘렌.”
“알아요. 하지만 제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거예요. 염려 감사해요, 테드.”
딱 잘라 나오는 거절에 테리어드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곧장 가야 한다는 소리에 제 차림새를 점검하고 있던 케이든이 혁대에 매달아 놓은 검집을 더욱 단단히 고정하며 말했다.
“그래. 다소 제약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크라이언트 영애는 있어야 해.”
“예. 일단 저희는 화물 적재 장소도 모르니까요.”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케이든의 말을 거들자, 엘렌이 괜한 착각은 곤란하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건 저도 모른답니다.”
“예?”
생각지도 못했던 엘렌의 선언에 세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그중 코엔하임 경 모리스만이 별다른 동요 없이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영애께서는 별다른 대책 없이 그리 말씀하실 분은 아니시지요.”
그다지 근거랄 것은 없는 확신이었지만, 아마도 그의 약혼녀인 스파니엘 체셔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인 듯했다.
“그야 그렇지만……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전하께서 치안대를 이용해 수색하면 될 일 아닌가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케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가장 안전하고 빠른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내가 오늘 그대를 만나러 괜히 몰래 나온 게 아닙니다. 내 동선이 크레센트를 비롯한 귀족파에게 알려져서는 곤란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가 몰래 나와서 이런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저쪽한테는 좋은 먹잇감입니다. 최소한 치안대를 이용하는 건 무언가 실마리를 확보한 후, 그것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그럼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그건 지금 같이 고민해 봐야지요. 동업자니까.”
“아……. 처음에 제안한 치안대 안은 이미 걷어차인 뒤라서.”
엘렌이 딱히 생각해 둔 방법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케이든이 민망한 듯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전 들여온 물건들을 이렇게 운반 전 하역장까지 와서 확인해 본 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물품을 은닉한 배가 한 대일지 몇 대일지조차 모르고요.”
“정말로 방법이 없나…….”
케이든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런데 케이든의 말에도 별다른 대답 없이 골똘히 생각하던 엘렌이, 갑자기 고개를 탁 들며 그를 불렀다.
“전하.”
“뭔가 떠오른 게 있습니까?”
“……증거를 단 하나라도 찾는다면, 그다음부터는 전하께서 어떤 월권행위를 해서라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통관 쪽을 공략하죠.”
“통관?
“분명 그쪽에 끄나풀을 심어 놓았을 겁니다.”
엘렌은 머릿속에 있는 대강의 계획을 천천히 설명했다.
“그들은 부피가 작아서 숨길 수 있는 것만 들여오던 게 아니에요. 루트를 뚫어 놓고, 그곳으로 지속적으로 물품들을 날라 왔던 거죠.”
“설마…… 그대는 밀수 품목이 무언지도 알고 있습니까?”
“오늘 들어올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보통 운반하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요.”
엘렌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케이든을 향해 한 발 쏘는 시늉을 했다.
그 동작을 가장 먼저 알아본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경악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설마, 머스킷……!”
“네. 정답입니다.”
엘렌이 손동작을 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부피를 몰래 들여오려면 통관 쪽에서 비리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건 내부를 털면 금방 찾기 마련이죠.”
“그건 제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애.”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답지 않게 모리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아카데미 동기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평생 입막음이 될 정도로 막역한 사이는 아닙니다만, 충분히 회유할 만한 사람입니다.”
“외부인을 끌어들이자? 그건 좀 불안한데.”
케이든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괜찮아요. 그런 약속의 효력은 결국 대가로 지불할 금액이 결정하니까. 그 친구, 다른 특이 사항은 있나요?”
“별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아카데미 장학생 출신으로, 보통 평민 장학생들이 그러하듯 부양할 가족이 있고…….”
“장학생? 설마 걔 여기서 일해?”
모리스의 이야기를 듣던 테리어드가, 저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는지 갑자기 질겁하며 외쳤다.
“그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모리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걔는 좀…….”
“아뇨, 그거면 됐어요.”
엘렌은 자신의 소지품을 넣어 놓은 클러치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그것을 펼쳐 휙 서명한 뒤, 한 장을 탁 뜯어낸 그녀는 그것을 코엔하임 경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이거 받으시고. 그리고 테드는 무언가 할 말이라도?”
“아, 그…… 그 친구가 성격이 좀, 많이 활달한데.”
“괜찮아요. 제가 상대할 것 아니니까.”
엘렌은 태연히 말하고는 손뼉을 가볍게 짝짝, 쳤다.
“자, 그럼. 일이 이리되었으니, 이제부터 전하께서는 제 시종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뭐요? 시종?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케이든이 갑작스레 나온 소리에 얼빠진 얼굴로 묻자, 엘렌은 화사한 미소로 친절히 답변해 주었다.
“네. 경쟁 상단의 물품 내역을 염탐하러 온, 부유한 여성 상단주와 그 시종. 오늘의 콘셉트랍니다.”
* * *
“팀장님! 찾으시는 손님이 계십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남자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어, 그거 나도 보고 왔는데. 보아하니 높으신 귀족 같던데?”
“이야, 아카데미 출신이 다르긴 달라.”
“그러게. 자작 나리들이 밀어 넣은 애들은 말만 귀족이지…….”
팀장이라고 불린 것치고는 제법 젊어 보이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거 서럽게 그러지들 마십시오. 어디 출신이든 밑에서 구르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잘난 손님은?”
“일단은 회의실로 모셨습니다.”
“전에 서랍에 넣어 둔 찻잎 있지? 차는 그걸로 준비해 와.”
“예, 팀장님.”
아카데미에서는 평민이라고 희귀 생물 취급, 사회에서는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희귀 생물 취급.
그런 제 위치가 신물이 났던 단델리온은, 대체 여기까지 찾아온 그 잘나신 귀족 나리가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속으로 이를 갈며 회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허어?”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확인한 단델리온은 이건 또 의외라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뱉었다.
“오랜만이야, 데니.”
그를 찾아온 것은 코엔하임 경 모리스. 그의 아카데미 동기였다.
“이렇게 막무가내 행차를, 그것도 네가 할 줄은 몰랐는데.”
“급하게 와서 미안하다. 그나저나 시간은 좀 괜찮나?”
“얼마나 뺏을 생각이기에 그런 것부터 물어봐?”
“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만큼?”
“뭐?”
단델리온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제 샛노란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아마 태자 전하의 기사였지……. 돌겠군.”
“부탁하지.”
“제기랄, 이래서 귀족 놈들이란.”
그는 회의실 한편에 정리되어 있던 얇은 모포를 던져 주며 말했다.
“이거 필요하면 쓰고, 일단 따라와.”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문을 나선 뒤, 방향을 홱 꺾더니 그대로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자, 그래서 뭔데?”
신경질적으로 묻는 물음에, 모리스는 재빨리 용건을 내뱉었다.
“하역장 물류 창고 쪽 조사가 좀 필요해. 밀수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아는 게 있나?”
“야, 내가 운항과에 있긴 하지만…… 아오, 그쪽은 내 업무 아니란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얼씨구, 정보는 알아서 빼 달란 거네.”
단델리온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팍 쓴 채 째려보자, 모리스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재차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네가 최선이었어.”
“그래, 그러셨겠지.”
모리스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남이 곤란할 만한 일은 일절 하지 않았던 남자다.
그러니 아마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일 게다.
단델리온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말했다.
“됐다. 그래서 빼다 주면 뭐 해 줄 건데? 너와 달리 한낱 평민에 불과한 내가, 굳이 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봐.”
“음…….”
잠시 망설이던 모리스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돈……은 좋아하나?”
“응? 갑자기 무슨 당연한 소릴 해.”
단델리온이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되묻자, 모리스는 곤란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아, 이게 정말 정답일지를 확신할 수가 없군.”
“뭔데?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돈이야? 얼만데?”
“음, 정확히는 얼마라기보다…….”
모리스가 품을 뒤적여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거다.”
그가 건넨 종이를 앞뒤로 뒤집으며 살피던 단델리온은, 그것이 금액란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어음임을 알아차리자 이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뭐야. 엘렌 크라이언트. 크라이언트가의…… 백지 수표?”
“그래.”
“뭐야, 이 정도로 위험한 일이야? 이건 나도 생각을 좀 해 봐야겠는데, 잠깐만…….”
“지금 필요한 건 정말로 하역장 관련 정보뿐이지만, 이 일이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는 우리로서도 알 수 없으니까.”
“아, 그러니까 목숨값이다?”
“……수도의 번듯한 집, 여동생의 풍족한 아카데미 생활과 부모님의 안락한 노후. 그 정도면 어떠냐고 하더군.”
“누가. 이 수표 주인이?”
“그래.”
“……내가 이 직장에서 백 년을 일해도 못 이뤄 낼 일이다. 모자라진 않아.”
단델리온은 그새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인 듯 담담한 얼굴로 수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더 제대로 끼어들 생각이 있다면, 크라이언트의 이름으로 네 여동생을 후원하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최소한의 방패막이까지도 되어 주겠다는 건가……. 이거 오히려 대접이 너무 후하니 이상한데.”
그가 아카데미에서 겪어 온 이들은 이렇지 않았다.
단델리온이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모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능한 인재라고, 포섭해 두어 나쁠 것이 없다고…… 내가 제안했다.”
“네가?”
“그래.”
그의 긍정에 재차 한숨을 내쉰 단델리온은, 모리스의 손에 들려 있던 수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놔.”
“너―”
“됐고, 여기서 기다려. 노크는 네 번 할 테니 여기서 문 잠그고 딱 기다려라.”
빼앗은 수표를 자신의 품속에 소중히 갈무리한 그는, 모리스에게 뒤지고 싶지 않으면 쥐 죽은 듯 있으라며 재차 협박을 한 뒤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