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날은 유독 운이 없는 날이었다.
일단 아주 드물게도, 파티장으로 출발하기 직전 다급한 기색의 전령이 온 것부터 그랬다.
엘렌은 시종이 내민 것을 받아 펼쳤다. 그녀가 좋아하는 스파니엘 체셔의 시원시원한 서체로 무언가 긴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엘렌. 미안해.
오늘 파티에는 사업적으로 용건이 있으신 아버지만 참석하시기로 했어. 영지에 불이 났는데, 바람이 세서 불길이 잡히질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거든.
나와 오빠는 이 편지만 마무리한 뒤에 곧바로 떠날 예정이야. 아무래도 피해가 클 것 같아서, 이재민 대책을 마련하는 게 급해졌어. 물론 진화 작업도 말이야.
하지만 엘렌, 나는 네가 괜한 마음고생을 할까 그것이 마음에 걸려.
언제나 혼자서도 잘했던 네가, 크렘벨이 연관되고부터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누군가의 허락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웅크려 있기 일쑤니까.
물론 그런 너의 모습이 크렘벨 공이 신경 쓸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임은 알아.
다만 내 말은, 스스로 곪을 때까지 안고 있지는 말라는 거야.
혹 주제를 모르고 입을 놀리는 것들이 있거든 꼭 기억해 놓길 바라.
그것들이 꼼짝도 못할 말들을 같이 구상하는 건 아주 즐거울 것 같거든.
가능하다면 다녀와서 네 무용담을 듣는 것도 괜찮겠어.
그럼 부디 오늘도 당당한 엘렌이 되기를.
―너를 사랑하는 스위니.>
“……되었네. 출발하지.”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친구의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해 넣었다.
사실 중앙에 올라온 이후로 그녀가 운이 좋았던 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적대적인 이들이건 호의적인 이들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참석하는 이 황궁 파티가 있는 날은 더더욱 말이다.
그곳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라니.
엘렌은 정말로 파티에 가기 싫어졌다.
하지만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는 별다른 사유가 없다면 참석을 해야 한다.
그 불문율 탓에, 엘렌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옮겼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 홀로 남겨지는 것이 싫어 파티를 싫어한다니. 아주 웃을 일이었다.
엘렌은 평소였다면 애써 머릿속에서 쫓아내려 했을 생각들을 자조적인 낯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남편인 길리언은 사교계에서 손을 놓다시피 해 버렸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중앙 귀족들과 한 번 인사만 나누고는, 이제부터는 너의 일이라며 그녀에게 사교계에 대한 것을 아주 넘겨 버렸다.
그가 하는 것은 가끔 제게 꼭 필요한 행사에만 참석해 몇몇 인원과만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는 것뿐.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날도 제 남편이 돌아와 그녀와 함께 있어 주길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파티장은 여전히 싫었을 뿐이었다.
“……어머, 오늘도 혼자로군요.”
“내가 뭐랬어요. 부부간에 무언가 단단히 틀어진 게 틀림없다니까요?”
“그러게요. 처음하고 지금 이렇게나 태도 차이가 명확한데. 저 어린 나이에 정부라도 들였던 걸까요…….”
정부는 무슨. 굳이 한쪽을 의심한다면, 내가 아니라 당신네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그 공작 각하 쪽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런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끝끝내 참아 냈다.
결국 그녀는 적당한 타이밍을 찾아 홀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속절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찾았다.
“아, 크렘벨 부인. 여기 계셨군요.”
“전하?”
눈에 띄지 않게 나오느라 꽤 노력했는데, 그녀가 있는 곳을 어찌 알았는지 황태자가 찾아온 것이었다.
“전하께서 이곳은 어찌…….”
“일단 황궁이니까요.”
케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다.
“파티가 지루하셨나 봅니다.”
“……아, 그럴 리가요. 다만 밤바람이 시원하니 좋아서 나와 있었답니다.”
“아직은 바람이 찬데요.”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혼자 쿡쿡 웃더니 말했다.
“예 혼자 계실 것이 아니라…… 그러고 보니 그림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지요. 괜찮으시다면 제 갤러리라도 둘러보시겠습니까?”
상냥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홀로 바깥에 나와 있었던 이유는 사교계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모든 걸 알고서 그녀를 위해 이리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너무나도 오래간만의, 어쩌면 오늘 이 순간이 없었다면 영영 잊고 지냈을 타인의 호의였다.
“……네. 감사해요.”
“하하, 모처럼 이것저것 자랑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렙니다.”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은 긴 회랑을 따라 걸었다.
걷는 내내 둘 사이에는 어색한 거리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케이든은 짐짓 쾌활하게 어릴 적 길리언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농담 삼아 늘어놓았고, 엘렌은 자신이 모르는 제 남편의 이야기들이 퍽 재미있어 웃었다.
황태자의 갤러리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모후가 생전에 그려 두었었다는 그림들이었다.
어린 태자가 제법 늠름한 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저보다 키가 한 뼘은 큰 길리언과 함께 조그마한 목검을 들고 있는 모습, 둘 다 성장기를 맞았는지 앉은키가 제법 비슷해져서는 나란히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
엘렌이 저는 보지 못했던, 어렸던 제 남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케이든이 다가와 말했다.
“부인께서는 길을 참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 참 미안하고, 또 고맙게도.”
“……전하께서 그러실 것이 무에 있나요.”
“길이 비록 사촌이긴 해도, 제 친형 같은 이이고 가족이니까요. 물론 부인께서도 마찬가지시고 말입니다.”
“…….”
“그림들이 마음에 드시는 듯하니, 앞으로 종종 생각나시면 들러 보시지요. 누군가가 자주 찾아 주는 것을 제 모후께서도 더욱 좋아하실 것 같고.”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것도 없지요.”
그는 엘렌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안쓰러운 듯 설핏 웃더니, 뒤에서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
“받으시지요, 부인.”
“이것은,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예. 제가 물려받은, 황실이 대대로 후계의 안녕을 빌며 선물해 온 물건입니다. 황실의 귀보이지요.”
“그런 것을 왜 제게…….”
“그런 것이라기보다, 사실 그냥 붉은 루비 반지입니다. 저는 어울리지 않아 하지도 못하는.”
그가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부인께서 비록 황족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저희는 가족이잖습니까. 오늘처럼 파티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날에는 잠깐 숨 돌릴 구멍쯤은 되어 줄 수 있는.”
“…….”
“부인께서도 그렇고, 타 가문의 이들도 그렇고 그 사실을 영 실감하지 못하고 계신 듯하기에.”
그리 말하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성질을 채 죽이지 못해 새어 나온 그의 본심이었을 듯했다.
“가급적 제대로 손에 착용하고 다니시는 것을 권해 드리지만, 불편하시다면 목에라도 걸고 다니세요.”
“……감사합니다.”
엘렌은 그의 호의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아닌 척 말로써 그녀를 능멸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그러니까 보통이라면 공작 작위를 가진 남편이 해 주었어야 할 일을 보다 못해 대신 나서서 해 주겠다 말하는 그 호의가.
“나중에…… 꼭 사례와 함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은원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부친께 배웠거든요.”
“음, 돌려주시는 건 나중에 제 아이에게 물려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전령은 제 아이가 되겠어요.”
“하하, 그거 좋군요. 아이들끼리 참 좋은 사이가 되겠습니다.”
* * *
그때 받았던, 황실의 붉은 루비 반지.
그리고 그 반지를 지닌 채, 그의 등을 찌르는 길리언을 모르는 척했던 그녀.
갑자기 쏟아져 내린 과거의 기억에 엘렌의 얼굴이 경직되자, 케이든 또한 표정이 굳었다.
“내 모후께서도 직접 착용하고 다니셨던 물건입니다. 적어도 그걸 들고 있는 이에게 함부로 할 이는 없지요. 심지어 부황 폐하까지도.”
“……압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
엘렌은 고민했다.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 반지가 불러온 옛 기억 탓에, 그녀는 제 마음이 이미 기울어 버렸음을 알아차렸다.
‘가능하면 들어주고 싶은데, 어쩐다…….’
이러다 혹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길리언은 아직 우리의 접근을 몰라. 이런 건 모를 때 한 번에 덮쳐야 효과가 크다는 것이 사실이지.’
엘렌은 위험성과 이득을 저울질해 보았다.
‘황태자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는 유형인 것 같고…… 무턱대고 입을 닫고 말린다고 넘어갈 일은 아니야. 그러기보단 시야에 두고 같이 움직이는 게 낫겠지. 어쩌면 유대감을 쌓는 데 또한 도움이 될지도.’
그녀는 잠시 생각을 잇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알려 드리지요.”
“역시. 그대는 더 아는 게 있을 줄 알았어.”
케이든이 만족스레 웃어 보였다.
“다만, 이렇게 모험성 짙은 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만큼 핵심에 가까운 정보라면 더 파고들기 위해 이런 짓거리를 할 필요도 없어지겠지요.”
엘렌의 질책 섞인 당부에 케이든이 어서 정보나 풀어 보라는 듯 들뜬 태도로 대꾸했다.
그것이 얄밉다고 생각한 엘렌은, 눈을 한차례 흘기면서 그녀가 현재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말했다.
“템트 하역장으로 가시지요.”
“템트?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조금 놀라운데. 하기야 크렘벨은…….”
케이든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크렘벨을 의심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했다.
엘렌은 그런 그를 대신해 뒷말을 이어 주었다.
“템트 대운하를, 주된 화물 운반로로 쓰니까요.”
“……그렇지요.”
“황도 이스타잔과 경계를 맞댄 템트 운하가 거론될 줄은 모르셨나 봅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군요.”
케이든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짝입니다. 생각해 보면 도박장도 수도에 지어 놓았었고…….”
“기본적으로 돈은 수도로 모이니까요. 게다가 템트 운하는 이스타잔의 경계인 동시에 크렘벨령의 경계가 되기도 하니.”
그러자 뒤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물었다.
“하역장이라면…… 화물을 확보해야 할 텐데, 자칫 때를 잘못 맞췄다간 물품들이 모두 운송되고 난 뒤일 겁니다. 혹시 그에 관한 정보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이 배가 들어오는 날이었기 때문에 말씀드린 거랍니다. 지금쯤이면 화물이 물류 창고로 옮겨지는 중이겠군요. 이르면 오늘 저녁에는 운송이 시작될 겁니다.”
“시간이…….”
“예. 촉박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제대로 된 급습이 되지 않겠어요?”
이미 마음을 먹은 엘렌은 망설이지 않았다.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는 거다.
그때 체셔 경 테리어드가 영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엘렌. 일단 우리가 바로 움직여서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데려다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지만, 근처 삯마차 집에 내려 줄 테니…….”
“아니요.”
엘렌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거기엔 저도 같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