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3화 (13/128)

<13화>

<친애하는 케이든 이스타지오 태자 전하께.

제법 훈훈해진 날씨 덕에 이제 크라이언트령에도 분홍빛 화우가 내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곳 이스타지오와 동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레니오스에서 식량을 수입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그리고 이스타지오의 농가에서 재배할 감자가 주된 품목입니다.

재배에 큰 문제만 없다면 약 300만 명이 넉 달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로써 밀 생산량이 절반까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충격을 완화할 수는 있겠지요.

저희의 준비는 착실히 잘 되고 있으니, 남은 것은 전하께서 헤쳐 나가실 일들이 순조로이 풀리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무언가 필요하시다면 서찰을 통해 제게 연통을 주십시오.

그럼 다시 뵐 날까지 옥체 건강하시길.

―이스타지오의 백성, 엘렌 크라이언트 올림.>

“……진짜로 그만한 양의 식량을 수입해 오다니.”

케이든은 질린 눈으로 제 손에 쥐인 서신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가 혼자 하는 예상만으로 타국까지 가서 그만한 양의 식량을 수입해 온단 말인가.

게다가 이 단기간 내에 일이 성사되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정보를 파악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대상을 선별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대체 그 머릿속에는 어떤 정보가 얼마나 들어 있기에 그런 판단이 가능한 건지.

“정말이지 실행력 하나는 대단해.”

케이든은 편지지와 봉투를 넣어 두는 서랍을 열었다.

“그러면 그 실행력에 경의를 표하며, 나도 답장을 써야지…….”

그는 펜 끝에 잉크를 톡톡 묻혀, 아주 유려한 필체로 답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 호의 감사히 받지요. 가능한 한 빨리 일전의 호텔에서 만납시다.

―케이든 이스타지오.>

그는 습관적인 동작으로 밀랍을 붓다가, 왠지 모를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데.

케이든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는 봉투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딱 크라이언트 영애가…….’

그는 비로소 제가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최근에 이런 옅은 무언가를 봤던 것 같은데, 하던 생각이 곧 엘렌의 머리칼이 딱 이런 빛이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여자는 이런 구석에서도 치고 들어오는군.’

그는 근래 제게 스트레스를 선사했던 엘렌을 떠올리며 인장을 툭, 떨궜다.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뚜렷한 여자가 그동안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없는 듯 조용히 살았던 것인지.

그 의문투성이의 여자를 어찌해야 좋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케이든이 편지 봉투의 봉인을 마무리했을 때였다.

그새 볼일을 끝내고 돌아온 것인지 시종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마침 잘 왔군. 자네 가서 저것 좀 부치고 오게.”

케이든은 자신을 본 시종장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은 적당히 무시한 채―전하, 자세 좀!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곧장 제 용건을 전했다.

“편지. 지금. 어서.”

케이든이 들고 있던 펜으로 편지가 처박혀 있는 한쪽 구석을 콕콕 가리켰다.

시종장은 결국 우는 얼굴로 터덜터덜 편지를 부치러 나갔고,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태자궁으로 촌서가 한 장 날아왔다.

<예의 그곳에서.>

케이든이 보낸 것보다도 훨씬 짧은, 단 두 단어로 쓰인 편지였다.

* * *

황태자의 횡포에 휩쓸려 오늘도 그의 비공식 외출을 돕고 있는 기사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전하께서는 언제쯤 저 무모함을 버리실는지…….”

체셔 경 테리어드가 마치 들으라는 듯 투덜대었다.

“불경한 소리 말고 참아, 테드.”

그것을 들은 코엔하임 경 모리스가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 또한 황태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신하로서 아주 불충하기 그지없군. 내가 뭐 나쁜 짓 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 이 제국을 위해 생각이 있어서 나가는 것인데.”

“아니, 전하. 그러시면서 그 제국의 백성인 저희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케이든이 일침이랍시고 던지는 소리에 테리어드가 정말 기가 막힌다는 듯 외쳤다.

휴일이고 나발이고 저 내키면 불러 대는 상사라니 눈물이 난다며 떠들던 그는, 듣다 못한 모리스가 한마디를 할 때까지 계속해서 불평을 쏟아 내었다.

“제발, 전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테리어드!”

“……알았으니 두 사람 다 그만하지.”

케이든이 지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부의 소동이 어떠하든 목적지를 향해 달린 마차는 곧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달각, 달각, 달각.

마차가 멈추자, 마차의 문을 열고 깔끔한 차림의 남성이 내렸다.

남자는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호텔 테라스에 앉아 있던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어머, 테드?”

엘렌이 놀라서 그를 부르자, 그는 마차 안에서의 다툼은 그새 잊었다는 듯 해사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엘렌.”

“이렇게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러네. 저번엔 서로 인사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지.”

테리어드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에스코트를 위한 팔을 내밀었다.

“편지를 보냈지? 데리러 왔어.”

체셔가는 크라이언트와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어릴 적부터 만날 일이 많았고, 체셔가 남매는 엘렌의 소꿉친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들이었다.

“저번에도 전하와 함께 있기에 혹시나 했는데. 정말 오늘도 같이 왔군요.”

엘렌이 작게 감탄하며 그의 팔에 손을 올리자, 테리어드는 눈썹의 가운데를 하늘로 치켜세우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널 봤으니 상관없는 것으로 할까.”

“자의가 아니었군요. 세상에 그런 악덕이.”

“난 괜찮아. 그보다 어서 가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셔.”

그는 어릴 적 그리했던 것처럼 아주 조심스레 제 팔에 얹어진 손을 붙잡았다.

마차 앞에 도착하자 테리어드는 엘렌을 폭 감싸 들어 올린 뒤 빈자리에 앉혔다.

“테드?”

“왜. 어디 부딪혔어?”

“아뇨. 나도 이제 마차 정도는 혼자 탈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어서요.”

“하하, 그래. 앞으로는 신경 쓸게.”

그녀가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테리어드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엘렌의 옆자리에 앉은 그는 마부에게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마차는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달렸다.

엘렌은 마차 가운데의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녀를 수도로 불러들인 장본인을 보았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늘 건강하지요. 영애는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어찌, 괜찮았습니까?”

“예. 즐거웠답니다.”

은근슬쩍 벨레니오스 여정을 묻는 것을 보니 이번 협상 내용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엘렌은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더 궁금해할수록 좋지. 나를 그만큼 높이 살 테니.’

엘렌은 그저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전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 그거라면…….”

마차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케이든이 가볍게 몸에 반동을 주며 상체를 세웠다.

그는 마차 의자의 뚜껑을 열어 종이 뭉치 하나를 건넸다.

“일전에 영애가 알려 준 것들을 토대로 조사를 한 것인데, 이 중에 유력한 곳이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곳을 좀 가르쳐 주었으면 해서.”

“아하.”

엘렌은 가벼운 감탄사와 함께 받은 종이 뭉치를 팔랑팔랑, 넘기며 훑어보았다.

아, 이건 잡아냈군. 이건 여기까지밖에 알아내지 못했나. 여긴 중간이 비었네. 그건 왜 없지? 아예 찾아내질 못한 건가…….

엘렌이 조사 보고서를 읽고 있자, 케이든이 옆에서 보고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조직 내부에서 말단부터 훑어 나갔는데, 양만 많지 진짜로 핵심인 굵직한 정보는 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듯하군요.”

그녀가 진지하게 보고서가 실속이 없다며 긍정하자, 케이든의 얼굴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흠흠.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알고 있는 다른 고급 정보가 있다면 시간이 더 가기 전에 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번처럼 자잘한 정보 말고 뭐 큰 건수 하나 없습니까?”

“큰 건수라 하심은?”

“그대가 말하는 그 흑막이란 자에게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정보.”

“그런 것은 위험할 텐데요.”

“열매가 다 익어 버릴 때까지 겉만 핥고 있다가는 더욱 위험해질 테니까요.”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 또한 손해가 큽니다. 안전히 가시지요.”

엘렌이 에둘러 거절하자 케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이언트 영애.”

“예, 전하.”

“이렇게 뜸을 들일 거라면, 그대는 대체 내게 그런 것을 왜 보여 준 겁니까? 내가 언제까지고 그들이 판치도록 가만히 내버려둘 거라 생각했습니까?”

“…….”

“혹시 저번에 말했듯 그대도 밑천 하나쯤은 잡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거절하는 거라면.”

그는 제 품을 뒤지더니 작은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반지가 들어 있을 만한, 아주 작은 케이스였다.

“이걸, 그 밑천 대신으로 하지요.”

엘렌은 말없이 내밀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낯익은 것을 보니 어디서 보았던 물건인 듯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자, 엘렌은 그 자리에서 곧장 상자를 열어 보았다.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깔아 놓은 도톰한 진녹색 비로드 천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조금 오래된 듯 보이는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이것은, 황실의?”

“황실의 귀보지요. 원래라면 태자비가 가지게 될 물건입니다.”

“이런 것을 왜 제게……?”

“그대가 푸는 정보의 대가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밑천이 어쩌니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지금 여기 있는 체셔가와 코엔하임이 증인이니.”

“…….”

엘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그의 배려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원치 않게 마주해 버린 과거의 파편에 얼굴을 굳혔다.

‘이 반지가 이번 생에도 내게 돌아오게 되다니.’

그것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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