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스타지오와 동부 국경을 맞댄 벨레니오스 왕국, 비엔나령.
영지 초입쯤에 도착하자 행렬을 이끌던 기사가 엘렌이 타고 있는 마차로 다가왔다.
“아가씨, 지금쯤 쉬어 가시지요. 이제 곧 도착합니다.”
“알겠네. 영주성에 파발을 보내도록.”
그녀의 말에 기사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앞으로 돌아갔다.
“비엔나령은 아가씨께서 말씀하셔서 처음 들어 본 곳인데, 경관이 나쁘지 않네요.”
샐리가 의외라는 듯 감탄하며 연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렇지? 평야도 넓고 기후도 서늘하니 괜찮은 곳이지.”
그런 특징 덕에 비엔나령은 벨레니오스의 곡창 지대 중 하나로 유명했다.
사실 저 윗세대라면 모를까, 엘렌의 세대에 들어서는 식량난이라는 것을 겪을 일이 없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타국에서 식량을 평년보다 몇 배씩이나, 그것도 감자 따위와 함께 수입하겠다고 나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대번에 어디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엄청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선택했다.
타국의 반란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길리언에게 백작위를 약속받았던 이곳 비엔나령을.
“아가씨, 영주성에서 사람이 도착한 모양이에요.”
계속해서 바깥을 살피고 있던 샐리가 저 멀리에서 말이 보인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엘렌에게 다가와 옷매무새를 급히 다시 살피고는, 기사가 마차로 다가오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곳에 크라이언트 영애께서 계십니까?”
자신을 찾는 소리에 엘렌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전령으로 온 것은 비엔나가의 기사로 보이는 이였다.
“내가 엘렌 크라이언트네. 비엔나 영주께서 보내셨나?”
“예. 그렇습니다. 정중히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리네. 다들 그럼 출발하지.”
오늘의 거래가 성사되면 이 영지를 비롯하여, 이곳의 생산량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백성들은 기근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나가게 될 것이다.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차피 식량이라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것.
숫자는 정해져 있으니, 자신은 그저 제게 조금 더 유리한 선택지를 고를 뿐이다.
엘렌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협상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도착한 그녀를 맞은 것은 성의 집사가 이끄는 사용인의 무리였다.
성의 주인인 비엔나 자작은 보이지 않았는데, 엘렌은 그 이유를 아마 방문한 이가 백작이 아닌 백작 영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중을 나온 성의 집사가 엘렌에게 다가왔다.
“큰 짐이 많으시군요. 도와 드릴 아이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시중은 되었네. 함께 온 아이도 있고.”
엘렌의 뒤에 서 있던 샐리가 보란 듯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보였다.
“그렇다면 호위는……?”
“되었네. 나는 낯선 이들을 옆에 둔 채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고 싶지 않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준비된 방까지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집사는 그녀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이곳이 머무르실 곳입니다. 편히 준비하신 뒤, 시녀 아이가 모시러 오면 그때 만찬장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알겠네. 고맙군.”
그녀가 짧은 인사로 축객령을 대신하자, 집사는 다시 깊이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비엔나 자작은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크라이언트라면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다.
이스타지오의 부를 쥐고 있다는 바로 그곳 아닌가.
그런 가문에서 이 영지를 방문하다니, 이렇게 설렐 데가 없었다.
그가 성심을 다해 준비한―성의 사용인들을 다그친― 만찬장에 크라이언트 영애가 들어섰다.
“초대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비엔나 자작.”
“저야말로 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크라이언트 영애.”
자작은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로 엘렌을 맞이했다.
곧 조용한 홀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제국 백작가의 영애께서 이 변변찮은 왕국 변두리까지 친히 내왕해 주시다니요.”
비엔나 자작이 마치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변변찮다니요. 오면서 보니 견고해 보이는 성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 평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크라이언트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곳이지만 말입니다.”
“자작께서야말로 제가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띄워 주시는군요.”
엘렌이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자, 자작은 호쾌히 웃으며 크라이언트에 대한 칭찬을 꺼냈다.
“하하, 크라이언트는 그만큼 여러모로 유명하니 말입니다.”
“어머, 그 정도인가요? 그리 말씀하시니 타국에서 보는 저희 가문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유명한 것을 대라면 단연 연구소 레토와 방직 회사 알바이지요. 그 놀라운 선구안과 노련한 사업 수완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크라이언트에 대해 읊던 비엔나 자작의 목소리가 꿈결을 헤매는 듯 몽롱해졌다.
그렇게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이 갖고 싶은 크라이언트의 부와 명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곧 본인이 내내 속에 담고 있었던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래서 오늘, 저는 영애께서 제게 어떤 놀라움을 주실지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거래를 들고 왔느냐.
어지간히 몸이 달은 것 같은 자작의 모습에, 엘렌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 저희 레토 사를 모르기도 어렵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제가 원하는 건 이겁니다.”
그녀는 플레이트에 곱게 갈려, 다량의 설탕과 함께 버무려진 감자샐러드를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씨감자, 1천 톤.”
“……감자?”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꽤나 당황한 것인지 자작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감자, 크흠. 감자를 말입니까? 그것도 1천 톤씩이나?”
“그리고 좀 오래된 것도 상관없으니, 싸게 넘길 수 있는 것으로 곡물가루도 같이 파시면 좋습니다.”
엘렌은 자작의 반문을 무시했다.
질문을 하지 말라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들은 것인지, 자작은 다른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말을 받았다.
“크흠. 식량 거래를 염두에 두고 오신 것이었군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희가 아무리 식량 생산지라지만 한 번에 그만큼씩이나 판매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그만큼의 물량도 없고…….”
“이곳의 저장 곡물에 더해, 근처 영지에서 시장에 내놓은 물량을 적당히 매입하면 충분히 가능하단 것을 압니다, 자작.”
“하지만 정말입니다. 이곳이 곡물을 팔아 풀칠하는 영지라는 것은 맞지만…….”
“자작.”
들고 있던 잔을 톡, 가볍게 내려놓은 엘렌이 비엔나 자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빈손으로 왔을 것 같습니까? 잔머리를 굴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엘렌의 싸늘한 눈길에 웃고 있던 자작의 입매가 파들, 떨렸다.
이토록 직설적인 말에는 아무리 자작이라도 모욕감을 참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거래였다면 그녀로서도 이런 방법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만히 보이면 그는 계속 허튼수작을 부리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입단속을 시키기도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자작의 기분이 상하더라도 강하게 나가야 했다.
어차피 기회주의자는, 반드시 상대의 조건을 듣게 되어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자작은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도 가식적인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빈손으로 오신 게 아니다……라. 그렇다면 준비해 오신 게 무엇인지 들어 봐야 저도 주판을 좀 튕겨 볼 수 있겠습니다.”
“자작께서는 이제야 제대로 거래에 임할 준비가 되셨군요.”
엘렌은 피식, 가벼운 웃음과 함께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한 바퀴 흔들어 보였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거래의 대가로, 비엔나령에는 우리 레토 사에서 비롯된 방직 회사 알바, 부티크 탈리아 등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회사들이 들어오게 될 겁니다.”
“레토, 와 알바……!”
“마침 강 하류라 공장을 짓기에도 좋은 환경이고. 사실 자작도 농지 대신 공장을 짓고 싶었잖아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을 뿐이지.”
엘렌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붉은 와인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럼, 혹 제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흥정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죠. 비슷한 조건을 갖춘 이가 바로 옆에 있으니.”
“설마 델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곳도 후보지랍니다.”
비엔나령의 바로 옆에는 또 다른 농업 도시, 델본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비엔나 자작과 개인적 은원이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엘렌은 생각만으로도 기대된다는 듯 밝은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거두어들이게 될 세금은 얼마나 될까요? 내 생각엔 최소한 이 벨레니오스에서는 견줄 영지가 없을 것 같은데. 자작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려나.”
“그것은, 저도 동의하지만…….”
“아, 그렇군요. 그럼 결정하셨습니까?”
엘렌이 묻자, 비엔나 자작은 난처히 웃으며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하, 영애. 영애께서도 아시겠지만 원래 이런 이야기는 천천히 장고한 뒤에…….”
레토와 알바의 이름을 듣고 그야말로 침을 흘리던 그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야 뻔했다.
그녀가 왜 식량을 필요로 하는지, 왜 제가 선택되었는지.
그 이유들을 알면 무언가를 더 얻어 낼 수 있을 거란 짐작에서 비롯된 시간 벌기였다.
이런 때에는, 깊이 생각할 수 없도록 몰아붙여야 했다.
엘렌은 그의 말을 중간에 끊어 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게는 시간 또한 돈인지라.”
그녀는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자신이 앉은 의자를 빼내도록 지시한 그녀는, 의자가 충분히 빠지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불발되어 아쉽군요. 그럼 자작, 부디 평안하시길.”
갑작스레 벌어진 그녀의 행동에 자작은 그저 벙벙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나가려는 그녀의 뒤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여…… 영애! 잠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엘렌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뒤를 돌아보자, 그는 최선을 다해 엘렌이 원하는 바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판매하지요. 하지만 씨감자 1천 톤은, 정말로 제가 혼자 준비할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시, 시간이 필요한데…….”
다다다 내뱉던 자작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위쪽으로 슬쩍 곁눈질하며 엘렌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을 어떻게 마련할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난 그대가 보내 줄 씨감자 1천 톤이 필요하고, 자작은 내가 지어 줄 공장들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무,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당장에 계약서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디서 물량을 충당해 올지 영지별 파악도 해야 하고, 타국의 회사가 우리 영지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인지라 자문도 구해야 하고…….”
“아, 그렇군요.”
엘렌이 살짝 고개를 까닥이며 동의하자 자작의 낯에 안도가 스쳐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래서 몇 시간이나 필요하십니까?”
“며, 몇 시간……?”
“예. 몇 시간?”
자작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세, 세 시간! 세 시간 뒤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 이후로 차차 조율해 보지요.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엘렌의 승낙이 떨어졌다.
화기애애했던 처음과 달리 다소 불손하다고도 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들은 자작의 얼굴에 스친 것은, 자신이 이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는 강렬한 안도와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