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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8화 (8/128)

<8화>

한차례 폭풍을 몰고 왔던 황태자가 돌아갔다.

넓은 객실에는 다시 오래간만에 재회한 부녀와 그들을 수행하는 가문의 기사들만이 남았고, 그들은 앞서 진행되었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정말로 재난을 예상하고 있느냐, 물론 말씀드린 그대로이다, 사교 시즌 이야기는 또 무엇이냐,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드릴 참이다…….

다니엘은 정말로 황태자와 모종의 계약을 체결해 버린 제 딸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지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런 다니엘의 모습에서 묘하게 활기가 돈다고 느낀 엘렌은 ‘아버지 또한 이 새로운 사업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이 틀림없다’며 내심 다행이라 안도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 크렘벨은 역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부자였던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즉,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알죠. 사실 이미 일부는 전하께 보여 드렸어요.”

이제 남은 것은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것뿐이죠.

엘렌은 말을 이었다.

“잘못했다가는 우리까지 역모에 휩쓸릴 수 있으니 이혼 문제는 그전에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 해요. 이것은 전하께서 도와주신다 하셨으니 어떤 식으로든 매듭은 지어지겠죠. 하지만 이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돼요. 우리는 이혼 후 크렘벨이라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 없이도 황태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다니엘의 맞장구에 엘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자본 아니겠어요?”

“그 역시…… 아쉽지만 그렇지.”

“아버지, 아쉽다니요. 많은 돈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을요.”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말했다.

“많은 귀족이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려는 이유, 크렘벨 공작이 우리와 혼담을 나눈 이유, 지금 황태자가 우리와 계약을 나눈 이유. 모두 한 가지예요, 아버지. 최상층부도 결국 자본을 얻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그래. 아닌 척하지만 다들 더 많은 자본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이것은 우리의 창이자 방패가 될 거예요.”

황태자가 직접 크렘벨의 뒤를 캐도록 만들어, 그를 직접 크렘벨의 민낯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그가 크렘벨가의 역심을 일부라도 알게 되면, 크렘벨은 축출될 것이고 그녀는 황실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레 이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혼은 어디까지나 단기적 목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저 권력의 소용돌이 안에서 안전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태자를 제위에 올리고 그 이후로도 그가 안정적인 세를 유지해 주는 것이 필수였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의 엘렌은 자신이 직접 그 세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핵심 열쇠가 될 생각이었다.

배신 따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번 시즌에는 시즌 중 유행이 크게 바뀔 거예요.”

“유행이라면?”

엘렌은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 여성복이요.”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그 어떤 귀족에게 묻더라도 나올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현재 혼인 적령기에 있는 황녀 이클립스 이스타지오와 귀족파의 거두 트라이아 공작가의 트라이아 공작 부인인 두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고위 귀족들의 의상을 제작하는 의상실에서 주도하는 유행이 그해 사교 시즌의 주된 흐름이 된다.

하지만 이번 해는 달랐다.

당시 유행하던 파티 드레스의 특징은 레이스로 만든 칼라와 스커트의 겉자락을 뒤쪽 중심으로 끌어올려 드레이프 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칼라를 모두 치워 깔끔하게 목을 드러내고, 스커트는 화려한 레이스나 수를 놓아 꾸민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나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두 가문의 결속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냐는 말들이 돌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유는 엉뚱한 데 있었다.

이번 사교 시즌은 퇴역을 앞둔 트라이아 출신의 황실 디자이너가 맡은 마지막 시즌으로, 황실에서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해에는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영향력이 있는 이들이 입으면 원래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물살은 뒤바뀌는 법.

그런 탓에 그해 사교 시즌에는 난데없이 급작스런 새 유행이 시작되었고, 당시 의상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던 귀족들은 큰 손해를 껴안아야 했다.

“올해로 은퇴하는 황실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황실에서 그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그가 디자인한 것을 입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전에도 황실 디자이너 중 한 명이 은퇴를 할 때 그랬던 일이 있었죠.”

“그래? 언제 그런 정보까지 모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우리는 그 디자이너의 디자인들을 겨냥하여 유행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게 일회성에 그친다면 오히려 우리가 손해를 볼 텐데.”

“그 디자이너는 트라이아 출신이에요. 그 옷이 황실에서 채택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트라이아가에서 역시 그의 진상품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랑하고 홍보하려 나설 겁니다. 그 스타일로 유행은 삽시간에 바뀔 거예요.”

그녀는 제 아버지가 납득해 줄 만한 인과의 퍼즐을 잘 맞춰서 늘어놓았다.

다니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놓은 퍼즐들만 들으면 나름 타당성 있는 말이긴 했다. 다만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저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그에 엘렌은 말했다.

“글쎄요. 이렇게나 완벽히 조각들이 늘어서 있는데, 어찌하여 완성된 그림은 제게만 보이는 것일까요.”

처음과 같은 단정한 미소와 어투로 제 얼굴을 가린 대답.

펑펑 눈물을 쏟던 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곳에는 미소 띤 가면을 쓴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 알겠다. 이번은 온전히 너를 믿어 보마.”

“감사드려요, 아버지.”

다니엘은 그녀에게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스스로 이혼을 말해야 했던 딸은, 늦게라도 제 모든 것을 쥐여 주고 싶을 만큼 가여웠으니까.

* * *

다음날, 하루가 지난 늦은 아침.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는 햇살이 화창했다.

햇살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티 테이블 앞.

그 오묘한 빛깔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차를 홀짝이던 엘렌의 귀에,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구나……. 또 찾아올 만한 이가 있는 게냐?”

“글쎄요. 전하께서 다시 들르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황태자는 이미 전날 방문을 마친 참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슨 일인가?”

엘렌이 기척을 내자 바깥에 서 있던 급사가 제가 들고 온 전언을 전했다.

“1층 로비에 크렘벨 공작가에서 오신 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역시나.

가장 달갑지 않은 경우의 수였다. 엘렌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혹 다른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불러 주십시오.”

알았다며 대충 대답한 그녀가 테이블로 돌아오자, 다니엘이 다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공작가인 게로구나.”

“네.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네요.”

“갈 생각이냐?”

“……글쎄요.”

엘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건 일단, 목욕이라도 하면서 생각해 볼게요.”

엘렌은 최대한 느릿느릿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구 좋으라고 곧장 준비를 해서 내려간단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엘렌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은은한 장미향의 향유를 넣고 준비되어 있는 꽃잎까지 뿌린 뒤,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근 그녀는 몽글몽글하게 근육들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욕조에 등을 기대 누웠다.

‘혹시 도장을 찍을 준비가 되어 부르는 것일까.’

정말 어쩌면 합의 이혼으로 일이 쉬이 풀릴지도 모른다.

엘렌은 작은 기대를 가져 보았다.

하지만 그 기대가 유지되는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 인간이 그럴 리가 없었다.

보나 마나 또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일 테다.

‘하지만 합의로 끝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 맞는데…….’

복잡한 절차 없이 합의로 끝낼 수 있다면, 그만한 일도 없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스르륵, 엘렌은 욕조 아래로 깊숙이 들어갔다.

코 위로만 빼꼼 얼굴을 내민 채 따스한 물의 온기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즐긴 그녀는, 욕조의 물이 다 식을 때쯤이 되어서야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언제가 되더라도 한 번쯤은 대면해야 해. 하기 싫은 일을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엘렌은 느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이전에 급사에게 심부름을 시켜 사 두었던 드레스들을 꺼내 보았다.

보나마나 한판 싸우고 올 것이 뻔하니 드레스는 짙은 와인빛을 골랐다.

파릇한 봄에 어울리는 색상은 아니었지만, 엘렌은 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른 데 대해서 어울리니 괜찮다며 작은 합리화를 했다.

구두는 굽이 뾰족한 것을 집었다.

그것은 여차하면 무기로 써야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선택으로, 엘렌은 저번처럼 또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든다거나 했다가는 그대로 그를 구두로 내리찍어 버릴 심산이었다.

붉은 기가 도는 도발적인 화장과 망사가 조금 드리워진 작은 모자.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고를 때마다 그녀의 코끝에서는 자그마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치장하는 즐거움이라니,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것인지.

혼자 생각하고도 이런 사실이 못내 우스웠던 엘렌은 엷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검은색 레이스가 섬세한 양산까지 고르고 그녀가 방을 나서자, 다니엘이 그녀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영락없이 어디 싸움이라도 하러 가는 모양새구나. 그 어떤 영애라도 내 딸 앞에서는 기가 팍 죽겠어.”

“아쉽게도 지금 만나러 가는 게 여느 영애들처럼 어여쁜 이는 아니지만요.”

엘렌이 마찬가지로 웃으며 응수하자, 다니엘은 조심히 다녀오라며 딸을 한 번 안아 주었다.

“……정말 다녀올 생각이냐? 그랬다가 혹시 다신 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흐려진 말끝에서 아버지의 염려가 읽혔다.

그런 점을 그녀 또한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그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다.

“그러니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후, 제가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 크렘벨 저로 와 주세요.”

“크렘벨 저로? 내가 가는 것이야 문제없다만…… ”

“잘됐네요. 만약 제가 세 시간이 넘도록 연락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오셔서 저를 데려가세요. 근처에서 적당한 선물이라도 구해 오시면 좋겠군요. 크라이언트 백작이 이곳까지 왔었다는 소문 정도는 뿌려 줘야 그도 허튼짓을 못할 테니.”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 게냐?”

“당장은요. 나중에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직 엘렌이 벌일 일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로서는, 한낱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보다 제 체면과 위신에 당장 영향을 미치는 주위 이목이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이것은 지난 생에서 긴 시간 동안 그를 관찰해 온 그녀의 경험이 기반이 된 예측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버지.”

그녀는 다니엘과 다시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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