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황태자의 입에서 뚝뚝 끊어진 단어들이 쏟아졌다.
온전히 문장을 끝맺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
저것이 충격이든 분노이든 간에, 그는 한동안 오늘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엘렌은 원하던 반응을 이끌어 낸 데 만족했다.
“케이든 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든은 그 덕에 비로소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처음보다는 다소 가라앉은 억양으로 말했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이건 대체…….”
“장난이라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제 충심이 왜곡당한 것 같지 않습니까.”
“뭐? 충심? 아니, 그대는……!”
간신히 가라앉았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격앙되었다.
제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왔던 것인지 스스로 놀라 움찔한 그는, 곧 화를 가라앉히기 위함인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후…….”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그것은 아주 가상한 노력이었고, 평화적으로 뒷말을 잇기 위한 행동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그의 반문을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였다면 이런 불법 조직이 또 몇 개나 더 있을지, 기대가 되어 근심 걱정은 금세 사라졌을 텐데요.”
이런 곳, 몇 개나 있을까요?
“전하께서 살피시는…… 이 황도에서 말이에요.”
그녀의 은밀한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눈앞의 한 사람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한바탕 소리를 칠 것 같았던 황태자의 입이 벌어지다 말고 멈추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엘렌의 곧은 눈이 직시했다.
이것이 쐐기다.
“황가의 눈을 피해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곳. 대담하게 제 영지도 아닌 황도에서, 아마 높은 확률로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황실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 과연,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눈에 분기와 의심으로 얼룩진 혼란이 들어찼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제정신인가?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낮의 살인 사건과 이곳을 묶어 이야기하는 근거는?”
“글쎄요, 왜일까요…….”
엘렌은 생각했다.
이 시간에서만큼은, 길리언이 원하는 것들을 성취하도록 두지 않으리라.
먼 미래 길리언 크렘벨에게 목숨을 앗길 비운의 황제. 케이든 이스타지오.
오늘 그에게 엘렌은 크렘벨이 뱃속에 숨기고 있던 검을 보여 주었다.
“전, 이혼할 예정이니까요.”
그녀의 산뜻한 말에 황태자는 이를 악물어 다소 뭉개지는 발음으로 으르렁거렸다.
“……터무니없군. 마치 모든 건 크렘벨이 범인이라는 소리처럼 들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깊은 분이시니, 스스로 알아내실 줄로 믿습니다.”
황태자는 어리석지 않다.
지금 당장은 분노가 치밀겠지만, 그것은 결국 배후를 잡아내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테지.
“이만 가실까요. 모시겠습니다.”
더는 이곳에 체류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먼저 출구로 향했다.
등에 와 닿는 시선이 심장을 찌를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그날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추궁하지 않았다.
* * *
“하, 정말이지 돌아 버리겠군.”
케이든 이스타지오, 현 이스타지오 황실의 황태자는 전날의 일을 곱씹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심히 정면을 응시하던 눈동자와 굳게 다물린 입술.
만지면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듯 창백했던 뺨과 냉정함이 묻어나던 단정한 눈썹.
‘……그건 아무리 좋게 봐도 나 즐거우라고 안내한 이의 얼굴은 아니었지.’
애초에 도박 따위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케이든은 기이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어제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이혼 선언도 들었다.
그는 저 깊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도 문제지만, 당장의 급선무는 그게 아니야.’
그는 전날 궁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계속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 자신을 그런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인가.
그곳은 대체 무엇인가.
게다가 황도에서의 치안 문제에 대한 보고가 왜 제게까지 올라오지 않았는가.
황도의 치안대가 장님은 아니다.
그들은 우수한 인력이었다.
그러니 그 정도 규모의 도박장을, 치안대를 상회하는 보안을 갖추어 운영할 수 있는 자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크렘벨 공작, 길리언 크렘벨이라든가…….’
하지만 그는 곧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길이 그럴 이유가 없다.’
애초에 길리언이 크라이언트와 혼사를 치렀던 것은 안정적인 자금 융통을 위해서였다.
그 말인즉, 처가인 크라이언트가 건재한 지금 그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 주군이자 친우인 자신에게 숨기면서까지는 더더욱.
‘그래. 그딴 짓은 빌어먹을 크레센트에게나 어울리지.’
그는 재수 없는 은발을 자랑거리처럼 늘어뜨리고 다니는 제 배다른 동생을 떠올렸다.
‘그 자식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전히 의문점이 남게 된다.
예를 들어 황도의 치안대조차 잡아내지 못했던 비밀을, 사교계만 돌아다녔을 여인이 어찌 알고 있었냐는 점.
‘그녀가 크레센트의 외부에서부터 정보를 캐낸 것이 아니라, 그 자식과 손을 잡은 내부자였기에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납득할 만한데.’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이상했다.
애초에 그곳이 크레센트의 영역이었고, 그녀가 크레센트의 끄나풀로서 활동을 하던 것이었다면, 어째서 그곳에 발을 들인 자신을 보고도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렇게 크레센트를 배제시키면, 또다시 남는 것은 길리언 크렘벨이 된다.
그리고 길리언은 그럴 이유가 없다.
“아, 제기랄.”
그는 짜증스레 뒷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휘둘리고 있다.
그녀의 목적이 자신에게 스트레스로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아주 훌륭히 성공했다.
“갈까마귀!”
아침부터 침소에서 허, 하, 하는 소리만 반복하며 굴러다니던 황태자를 지켜보고 있던 갈까마귀가 그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나타나 부복하는 갈까마귀에게 케이든은 제가 결심한 바를 말했다.
“네가 좀 알아볼 것이 있다.”
* * *
하루가 지난 늦은 아침.
호화로운 호텔 룸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엘렌의 귀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1층 로비에서 크라이언트 백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찬 준비가 되었다는 안내일 줄 알았더니, 그녀의 부친이 방문했다는 이야기였다.
엘렌은 가슴이 급작스레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그녀의 예상보다 한참 빠른 도착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편지를 받자마자 출발한 모양이었다.
엘렌은 급사를 향해 지시했다.
“이리로 모셔 오너라.”
급사는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기껏해야 3분 남짓이나 될까.
급사가 1층까지 다녀오는 그 짧은 시간이, 지금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현관 근처를 서성이고 있자, 곧이어 또 한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문을 열어젖혔다.
“엘렌!”
다니엘 크라이언트. 반역의 죄로 참수당한 그녀의 부친.
“괜찮으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편지로는 도통 무슨 말인지……”
고통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낯이었다.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모든 것이 온전하던 그 시절이 눈앞에 있었다.
“……아버지.”
행장을 얼마나 급히 차린 것인지 바깥에 서 있는 수행 기사가 고작 둘뿐이다.
그녀는 딸의 이혼 소식에 놀라 달려 나왔을 아비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아, 고통 속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그래.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나도 사정을…… 엘렌!”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으나 무리였다.
미간은 좁혀 들며 하늘을 보았고, 눈과 코끝으로는 왈칵 열이 몰려들었으며, 종내에는 눈물샘까지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엘렌. 울지 말거라.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보렴…….”
아주 작았던 아이를 안아 어르던 것과 똑같은, 다정하디다정한 목소리가 엘렌의 귓가에 들렸다.
죽음 이래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제 아비의 품에서 마치 둑이라도 터진 듯 눈물을 쏟아 내었다.
* * *
“이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꾸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
눈은 조금 부었고, 눈가와 코끝은 발갰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결연하게 굳힌 채로, 엘렌이 말했다.
“편지로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전 크렘벨 공과 이혼할 거예요.”
다니엘은 나지막이 신음을 내뱉었다.
편지를 보고도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일을 벌일 생각일 줄은 몰랐다.
“크렘벨은 침몰할 배입니다. 이제 그만 내려설 때가 되었어요.”
어릴 적 아비의 품에 안겨 그날 읽은 동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는, 이제 그런 세상은 모두 허구 속에나 존재함을 깨달았다.
“지금 크렘벨이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일단 계속해 보려무나.”
“그는 황위를 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니엘은 펄쩍 뛸 듯한 기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 말인즉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숫자야 줄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며, 제가 갖고 싶은 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를 죽이면 제 손에 굴러떨어진다고 믿는 자입니다.”
“……마치 그를 아주 잘 안다는 듯 말하는구나.”
“그래도 크렘벨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엘렌이 씁쓸히 웃었다.
“그의 야심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혹 우리가 지지하여 그 야망을 쟁취해 낸다 한들 우리에게 보은을 할 인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껏 그래 왔듯 우리를 죽이고 빼앗는 것을 택하겠지요.”
“……그래서 네가 생각한 것이 이혼이냐?”
“예. 더는 우리의 자본이 크렘벨로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크렘벨에 문제가 있고, 이혼을 한다 치자꾸나. 그러면 그 후 우리 가문은? 크렘벨의 보복에 노출되거나, 이후의 권력 구도에서 밀려나 버릴 우리 가문은 어찌하느냐.”
모진 말이었다.
적어도 아비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아비 된 자로서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 제게 경멸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노력으로 부를 얻어도 명예와 권력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내를 잃었으니까.
“……대책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크렘벨을 지원함으로써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전하께 직접적으로 자금을 원조하는 방식으로 황태자파에 남을 겁니다.”
다니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형편 좋게 이야기가 풀릴 것 같으면 자신도 얼마든지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면.
“크렘벨의 보복을 피하면서 황태자파에 남겠다고? 그게 가능하다면 굳이 혼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긴 하겠구나.”
“제가 전하께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네가 전하께? 무슨 거래를…… 아니, 일단 방법은 있느냐?”
“크렘벨 공작의 곁에서 종종 뵌 일이 있습니다. 저도 무턱대고 믿어 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을 주시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버지 딸이잖아요.”
엘렌은 아버지에게 단언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 닥친 기회를 놓칠 정도로 순하고 어리석은 소녀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정보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이번 생에서 엘렌 크라이언트가 얻은 힘이었다.
“시간……. 그래, 시간 말이지. 얼마나 생각하고 있니.”
“가능하다면 두 달 정도는 있었으면 해요. 하지만 전 아버지께서 두 달 이상의 시간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실 것이라 믿어요.”
“두 달……. 어렵긴 하겠지만 못할 것은 아니구나. 알았다. 내 너를 믿어 보마.”
그리 말한 다니엘은 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얼른 일어났다.
미안함, 고마움, 기특함, 씁쓸함…….
그 자신도 채 다 짚어 낼 수 없는 심정들이 엉망진창 섞여 있을 얼굴을 딸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니엘이 일어남에 따라 엘렌의 고개도 함께 들렸지만, 그는 딸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는 것으로 다시 한번 제 얼굴을 드러나지 않게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