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황태자는 노인이 앞으로 밀어 주는 꼬치를 집어 한입에 크게 물고는 우물대며 말했다.
“거 범인이 빨리 잡혀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면 좋겠다만, 듣자 하니 나라님들이 뒤를 봐 주는 것 아니냐고 하던데.”
“정말 그런 거면 큰일 아닌가? 영감은 그런 이야기까지 듣고도 왜 여기 있는 거야?”
“나야 손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니 그렇지. 너는 얼른 해치우고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지. 덕분에 잘 먹고 갑니다, 영감.”
그는 그 자리에서 나머지 꼬치까지 해치우고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엘렌에게로 돌아왔다.
“내공이 상당하시군요. 너무 자연스러우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밥 먹듯이 탈출을 해 댄 거냐는 소리를 제법 고급스럽게 할 줄 아는군요.”
“그리 배워 온지라.”
엘렌이 쿡쿡 웃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앞쪽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일단은 조금 걷지요. 자리를 옮깁시다.”
황태자가 이끄는 대로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광장의 분수대가 나왔다.
그곳에서는 자그마한 아이들이 까르륵대며 물을 튀겨 대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앉아 있다 갔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좋지요. 마침 바람도 좋아서.”
엘렌의 승낙이 떨어지자 케이든은 그녀를 근처의 벤치로 이끌었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
사람들이 오가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 큰 결심을 했는데도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전하께서야말로 그리 무일푼으로 계시는 와중 별 탈 없이 무사하시어 다행입니다, 아니 그 얘기는 갑자기 왜 나옵니까…….
그렇게 실없이 이어지던 그들의 대화는 곧 잦아들었고, 황태자는 말없이 정면을 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있었다.
아마 귀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진중한 낯으로 제 백성들을 살피는 그의 옆얼굴은, 어딘가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뭉근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한낱 찬탈자 따위에게 목숨을 내주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이었는데’와 같은, 이젠 지나가 버린 슬픔.
하지만 그런 후회가 제게 가당키나 하던가.
그가 배신자의 칼에 죽도록 두었던 것이 자신이고, 결국 제 목에 칼을 드리운 것도 자신인데.
그런 상념과 함께 해는 점점 아래로 기울었고, 시곗바늘은 어느덧 엘렌이 기다리고 있던 시간을 가리켰다.
엘렌이 물었다.
“수도의 치안 이야기. 근심이 크시겠습니다.”
“뭐,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문제를 안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석적인 답변이다.
엘렌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아는 곳을 들러 보시겠습니까? 다녀오신다면 전하의 근심이 가실 거라, 제 장담해 드리지요.”
“어디 극단이라도 서는 겁니까?”
묻는 남자의 얼굴은 순수했다.
이 남자는 극단의 공연을 좋아하는지도.
엘렌은 그런 생각을 머릿속 한편에 정리해 두었다.
“극단…… 극단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으로는 볼 수 있을 듯하군요.”
“좋습니다. 이젠 내가 그대에게 어울려 줄 시간이로군요. 가지요.”
“그럼 모시겠습니다.”
빙그레 웃는 그녀의 입매가 고운 호선을 그렸다.
의심 한 점 보이지 않는 그.
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곱씹으며 망설이기엔 그녀가 알고 있는 시간은 너무 많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 또한 많았다.
이번엔 엘렌이 그를 이끌 차례였다.
* * *
저녁놀을 뒤로하며 마차는 달렸다.
몇 블록을 지나, 한 골목길 앞에 다다르자 엘렌은 마부에게 멈출 것을 명했다.
“저, 나리. 여기에서 말입니까?”
마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엘렌은 대답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 마부에게로 넘겨주었다.
“담보이니 가지고 있도록 하게. 자네가 여기서 잘 기다리고 있다면 남은 한 짝도 마저 건네주겠네.”
그것은 작은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이었다.
제게 던져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마부는 대번에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아이고, 그럼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부의 굽실거리는 인사를 받으며 그들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분명 낮과 같은 도시임에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밤의 거리.
사람들이 웃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이전과 같이 친절하지는 않고, 주변에서는 생각지 못한 험한 말들이 들려오며, 환경 미화는 담당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낯선 환경에 연신 주변을 살피던 황태자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군요.”
“그런가요? 그래도 잠깐 보시다 보면 금방 적응하실 거랍니다.”
엘렌은 그저 엷게 웃어만 주었다.
그로서는 조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극단 같은 곳이라더니 대체 이곳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적지인 건물이 보였다.
그들이 멈춘 곳은 한 허름한 집 앞.
똑똑. 똑. 똑똑.
엘렌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덥수룩한 인상의 남자가 나왔다.
“뉘슈?”
“판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엘렌이 솜씨 좋게 금화를 하나 튕겼다.
그것을 받아 챙긴 남자는 그것을 얼른 제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케이든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은?”
“말씀드렸다시피, 근심을 잊게 해 줄 유흥의 공간이랍니다.”
엘렌은 물러서게 두지 않는다는 듯,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케이든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문은 열렸다.
그는 본인의 결심과 관계없이 문 너머의 광경을 보고 말았다.
두어 번 주변을 두리번거린 케이든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펍?”
제법 잘 꾸며 둔 내부와 꽤나 널찍한 공간.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과 출렁이는 맥주가 흘러넘치는 곳.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그가 비로소 이 상황에 대한 인식을 끝냈는지,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런 곳도 알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전에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체셔 경이…….”
“쉿.”
그러나 그가 뱉던 말은 톡, 그의 입술 위로 올라온 가느다란 손가락에 그만 저지당하고 말았다.
“일단 계속 따라오시지요.”
“……?”
졸지에 입을 봉인당한 케이든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엘렌은 다른 부연 설명 없이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테이블을 지나, 중앙의 바를 모두 지나쳐, 마침내는 메뉴판이 붙은 벽밖에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러자 그녀의 당부대로 뒤를 따라 걷던 케이든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대, 대체 여기서 무엇을―.”
“자, 그럼.”
“……?”
엘렌은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가 힘을 주어 벽을 밀자, 그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드르륵.
“……!”
메뉴판이, 옆으로 밀린 것이다.
“들어가실까요?”
“이게 무슨…….”
케이든이 당혹에 젖어 중얼거렸다.
앞에 드러난 것은 그들이 지나쳐 온 펍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판과 자르르 굴러다니는 구슬, 게임을 진행하고 있는 딜러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무어라 소리치는 사람들.
“자……. 저게 쉬워 보이는군요.”
엘렌은 그런 것들을 눈앞에 두고도 서슴없이 벽 너머로 향했다.
멍하니 보고 있는 케이든을 뒤에 둔 채로, 엘렌은 또각또각 유독 크게 들리는 구두 소리를 남기며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국가의 눈을 피해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자행되는 곳.
바로 길리언 크렘벨이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이었다.
등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엘렌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멀찍이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분노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엘렌은 태연히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곧 이어진 딜러의 안내에 따라 그녀도 베팅을 시작했다.
한 판. 잃었군요.
두 판. 이번엔 땄군요.
그렇게 두어 판쯤 더 굴렸을까.
“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옆에서 웬 남자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허망하게 원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빚’, ‘사기’, ‘말도 안 돼’와 같은 말들이 새어 나온 듯했다.
남자는 울음 섞인 소리로 흐느끼다, 딜러가 새 게임을 준비하자 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망연히 주저앉아 있던 남자의 눈에 희번덕거리는 귀기가 지나갔다.
남자는 다급히 일어나 딜러에게 달려들었다.
“너 이 새끼, 수작을 부렸잖아! 다 봤다고!”
그러나 곧 경비 목적으로 고용한 용병들이 몰려왔고, 돈을 잃은 남자는 그들에게 거칠게 얻어맞기 시작했다.
주변은 흘끗 그를 쳐다볼 뿐 다른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는 제 집중을 깼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었고, 누군가는 혀를 찼으며, 또 누군가는 저놈을 당장 끌어내라고 항의했다.
그 난장판을 엘렌은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는 뒤에 서 있던 황태자를 확인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얻어맞고 있는 남자를 보는 그의 얼굴은 예상한 것보다도 더욱 굳어 있었다.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그럼 됐어.’
시선을 느꼈는지 그의 고개가 엘렌에게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엘렌은 미소 지어 주었다.
그녀의 미소를 확인한 황태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않고 걸어온 그는, 엘렌이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아챘다.
“그대는, 대체,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