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barefaced - 뻔뻔스러운, 낯짝이 두꺼운 (6)
199.
***
시사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화는 다음 날 엔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개봉됐다.
그리고 개봉과 동시에 영화에 대한 리뷰가 커뮤니티를 채우기 시작했다.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난 잠깐 틀어놨다가 파이까지 다 태워버렸다고.
-치열한 가족 간의 다툼이 마치 과거의 왕권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군.
˪맞아. 마치 목숨을 건 결투처럼 비장하기까지 했어. 각자의 욕망에 취한 인물들의 모습이 몰입감을 엄청나게 올렸지.
-난 여주인공이 특히 인상 깊어. 신하율이라는 저 배우, 내가 장담하는데 엄청나게 뜰 거야.
˪이미 떴어. 며칠 만에 팔로우가 200만 명을 넘었다고.
호평 일색인 리뷰들.
OTT 플랫폼의 장점이었다.
발 빠른 후기들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번지자 너도나도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서준아, 이것 좀 봐. 한국에서도 난리인 가 봐.”
장현웅이 내미는 기사.
그 안엔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흥행이면 흥행, 작품성이면 작품성 흠잡을 곳이 하나 없다.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아카데미 후보의 가장 앞자리는 아마도 이번 작품이 될 것.]
미국의 몇몇 평론가들은 벌써부터 아카데미를 거론할 정도였다.
“하아, 반응이 엄청나네요...”
마음을 졸이고 결과를 보던 정은미 피디가 감격한 듯 말끝을 흐린다.
“그러게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고생한 두 사람을 위해 진심을 건넸다.
그러자 올란 감독이 미소를 짓는다.
“고생했지만 행복하네요. 고생한 보람이 있으니까요.”
하긴 고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보람만 있다면 고생 따윈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영화가 성공적으로 개봉한 상황.
이제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만 남아있었다.
***
[영화 「레이디 햄릿」,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흥행 기록.]
[권서준 작가의 「레이디 햄릿」. 한•미•중•일에서 전체 1위 달성]
권서준 작가의 소식은 한국에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하아.”
기사를 보던 송진호는 긴 한숨을 내쉰다.
영화를 본 송진호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움의 연속.
권서준이 보여준 세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넌 정말 천재인 거냐?’
쓰고 있던 글이 부끄러워진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느낌.
그래도 예전과는 뭔가 달랐다.
조급한 마음은 옅어지고 가슴을 태우던 열등감도 어느새 사라졌다.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일까?’
고작 한 번의 식사와 몇 번의 통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지. 아버지가 먼저 연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무심코 흘린 말을 들어보니 그 변화엔 권서준의 역할이 있었다.
‘이번에도 너였냐?’
송진호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잠시 고민하던 송진호는 휴대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고마움을 담아본다.
‘이 정도면 내 마음이 전달되려나?’
몇 번이나 고쳐 쓴 끝에 메시지를 전송한다.
짧은 내용.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은 메시지였다.
***
지이잉.
늦은 밤 도착한 메시지.
뜻밖에도 송진호의 문자였다.
[니 덕에 큰 산을 하나 넘었다. 조심히 돌아와라.]
큰 산이라고 표현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진전이 있구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국에서 들려온 기쁜 소식에 내 마음도 한결 따스해진다.
나는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선생님께 했던 말은 사실 전생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어...’
절박하기만 했던 런던에서의 삶.
살만해질 무렵 아들을 잃은 뒤에 난 모든 것이 늦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내와 남은 가족들, 그리고 내 건강마저 잃고 말았지.’
그제야 깨달았다.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기회가 있었음을.
그 남은 기회마저 내다 버린 게 바로 어리석은 나의 선택이었음을.
‘그래서 방향은 중요해. 계속 나빠지는 것과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건 천지 차이니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역시 그랬다.
당장 문학계를 바꿀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과 계속해서 노력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과 퇴보하는 건 전혀 다르지.’
당장 모든 걸 바꿀 순 없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느려도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걸음은 오늘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
120개국 엔플릭스 시청률 1위.
불과 이틀 만에 거둔 성과였다.
엔플릭스의 루카스 대표가 직접 내게 전화를 걸 정도로 엄청난 반응이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일본과 중국 쪽 여론이 심상찮았다.
-엄청나다... 이거 말이 돼?
-재밌긴 하지. 근데 아카데미까지 거론하는 건 좀 선 넘은 듯.
-솔직히 부럽기는 해. 한국에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있다는 게. 이젠 영화 드라마 쪽은 한국에 밀린 게 사실이니까.
-그래도 우리에겐 이토 히나타 작가가 있잖아. 이번 연도 노벨 문학상에 가장 확실시되는 인물이라고.
교묘하게 까는 댓글들과 반대하는 여론.
그 사이 이토 히나타에 대한 칭송으로 정신 승리하는 모습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보인다.
‘재미있군.’
그래서 더 궁금했다.
이토 히나타 작가가 강연회에서 어떤 소리를 할지.
나는 귀국 하루 전 마지막 일정으로 이토 히나타 작가의 강연에 참석했다.
올해 나이 75세.
젊은 시절부터 숱한 전쟁 소설을 써온 일본인 작가였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
창백한 얼굴에 곳곳에 핀 검버섯.
짙게 패인 팔자주름과 이마 주름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사람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그 시절의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약육강식, 그것이 그 시대의 진리였습니다. 승자가 이득을 취하는 건 당연한 권리였죠. 일방적인 피해를 주장하는 건 패전국의 변명일 뿐이고요. 비인격적인 일이 있었느냐가 문제지만 일본은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이토 히나타 작가의 주장은 책의 내용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왜곡되고 은폐한 자료들을 제시했다.
‘어설프군.’
한국, 중국, 미국 등 당시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본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만 제시해도 이토 히나타 작가의 주장을 모두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 믿고 싶은 거겠지.’
과거 일본의 영광을 향한 그의 신념은 마치 종교와도 같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옛말에 틀린 말 없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망언에 가까운 강연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큰 박수 소리가 터지자 옆에서 보고 있던 장현웅이 황당한 듯 헛기침을 내뱉는다.
“이런 강연에 손뼉을 친다고?”
그러나 이게 현실이었다.
세계는 생각보다 타국이 겪은 과거의 상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
강연장은 벌써부터 이토 히나타의 노벨문학상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잠시 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칭찬 일색의 영양가 없는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다가 한 한국인 기자 차례가 되었다.
“강연 잘 들었습니다. 이토 선생님의 작품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근거로 제시하신 자료들은 하나같이 왜곡된 자료들이네요. 이런 거짓된 작품으로 과연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게 옳은 걸까요?”
날선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토 히나타의 얼굴에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 분이군요?”
“네, 맞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더군요.”
“...”
모욕적인 언사에 한국 기자의 얼굴이 붉어진다.
“방금 전 말씀하신 건 한국만의 일방적인 주장이죠. 일본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요? 그런 말이 있죠. 역사란 해석이다... 한국과 다른 해석을 했다고 해서 왜곡했다 주장하는 건 과연 옳은 태도일까요?”
그러자 악에 받친 기자가 입을 연다.
“아마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는 수준이기에 왜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거겠죠? 그래서 한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거고요. 특히 몇몇 사람들은 작가님을 입국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이런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이토 히나타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다.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진실을 향한 핍박은 어느 시대나 있었으니까요.”
기자를 향한 대답.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
강연이 끝나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
나는 강연장에서 기억을 더듬었다.
특히 이토 히나타 작가의 시선을 떠올렸다.
‘나를 알아봤군.’
명백한 도발이었다.
물론 이토 히나타의 주장은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입으로 싸우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거니까. 뻔뻔하고 낯짝이 두꺼운 사람들에겐 결과로 보여주면 돼.’
내가 할 일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 사이 장현웅의 입에서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아우, 너무 열 받는다! 그 늙은이가 뚫린 입이라고 진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장현웅이 나를 보며 넌지시 입을 연다.
“차라리 이번 작품 잘 돼서 네가 노벨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제발...”
간절한 장현우의 바람.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안 된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노벨 문학상.
작품성도 고려되지만 시대 상황 등 작품 외적 요소가 더 많이 고려되는 상이었다.
‘노벨 평화상만큼은 아니지만 정치적인 논란이 꽤 많이 제기되는 상이지.’
그래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가치보다 다른 요인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아, 그래서 더 답답하다. 저런 인간이 노벨 문학상 받는 걸 보기만 해야 하다니...”
장현웅이 아쉬운 속내를 내비친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누가 가만히 보고 있는데?”
“...어?”
나는 노벨 문학상에 관심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
강연회를 마치고 이토 히나타는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선생님, 아까 그 한국인 기자 말입니다.”
차가 출발하자 앞좌석에 앉은 수행비서가 뒤를 보며 말을 꺼낸다.
“어떻게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할 수 있죠? 한국인의 안하무인 태도는 몇 번을 봐도 대단하네요.”
듣고 있던 이토 히나타가 코웃음을 친다.
“그게 한국인의 특성 아닌가. 작은 걸 확대해석 하는 거 말이야. 과대망상이야말로 그 민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아, 하긴 그러니까 전쟁에 대한 피해도 아직까지 주장하는 거겠죠? 아, 그러고 보면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요?”
이토 히나타의 입꼬리가 느른히 올라간다.
“그러라고 해. 아무리 발악한들 한국에게 노벨 문학상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노벨 문학상은 우리 이토 히나타 선생 겁니다. 아마 한국에서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백 년은 지나야 할걸요?”
이토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의 의미였다.
‘이번 노벨문학상은 무조건 내 차례지. 그 어느 작가보다 내 인맥이 넓으니까.’
게다가 일본 출판계에서까지 뒤에서 로비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낭독회장에서 만난 한 사람이 떠오른다.
‘아마 그 친구가 권서준이었지?’
부커상 수상 이후 눈길을 끄는 친구였다.
최근 전 세계 문학계에서 워낙 주목받는 작가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시했다.
외모는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고, 일부러 도발해봤지만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
‘신경 쓸 정도의 인물은 아니야.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애송이일 뿐이지.’
이토 히나타는 자연스럽게 권서준에 대한 관심을 덜어낸다.
‘아마 그 친구가 노벨 문학상을 타려면 최소 환갑은 지나야 할 거야...’
결코 달라질 리 없는 결과.
이토 히나타의 마음이 평온한 이유였다.
***
다음 날.
나는 귀국 후 여독을 풀기도 전에 와이즈 출판사를 찾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출판 일정을 위해 조금 더 힘을 쓸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만난 건 황태규였다.
나는 특별히 이번 작품의 표지를 황태규에게 맡겼다.
“차기작 표지 제작은 거의 끝났습니다. 최종 버전 넘겼으니 곧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다. 덕분에 멋진 표지가 나오겠어.”
“어휴, 그런 말씀 마세요. 무조건 제가 해야죠. 오히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주 편집장이 다가간다.
“다른 건 다 준비가 끝난 상황입니다. 딱 하나 남은 게 서평인데 일단 회장님과 송 교수님께서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의 서평이 동시에 오른다라...
국내 출판계에선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조금 더 어그로가 필요했다.
“혹시 서평을 다른분께 더 부탁해도 될까요?”
“그야 물론입니다. 혹시 부탁하실 분이 있으신가요?”
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수준의 어그로를 끌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날 오후.
나는 내 책 한 권을 국제 우편으로 부쳤다.
수신지는 당연히 노퍽주 샌드링엄 하우스였다.
이제 묵혀놓은 소원권을 사용할 차례였다.
***
노퍽주 샌드링엄 하우스.
정원에 앉아 모닝 티타임을 즐기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눈을 크게 뜬다.
한국에서 날아온 소포 하나 때문이었다.
“권서준 작가가 나한테 선물을 보냈다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물음에 조지 학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차기작이라고 하네요. 할머니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었대요.”
조지 학회장의 말에 여왕이 손을 뻗어 책을 받는다.
“참 다정한 사람이구나.”
“보시고 마음에 들면 서평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래?”
자연스럽게 예전에 약속했던 소원권이 떠오른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오랜만에 돋보기를 꺼낸 여왕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하다.
그리고 잠시 뒤,
첫 장부터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100세를 앞둔 여왕의 눈빛이 어느새 깊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