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barefaced - 뻔뻔스러운, 낯짝이 두꺼운 (5)
198.
***
다음 날.
송영도 교수는 급히 정영만 회장을 찾았다.
권서준의 차기작에 대해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전날 이미 권서준의 원고를 읽은 정 회장은 감탄을 터트렸다.
“엄청나군. 아니, 엄청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야...”
정 회장은 아직도 감동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단순한 SF가 아니야. 거대한 서사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어. 그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독백을 통해 개인적인 상처를 또다시 자연스럽게 일반화 시키고 있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 인간이 겪는 처절한 고통을 우주라는 거대한 배경에 대비시키면서 결국 기가 막히게 주제와 연결된다고.”
듣고 있던 송 교수도 옆에서 거든다.
“특히 온갖 상상력을 유발하는 이미지를 통해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를 선명하게 만들었죠.”
정 회장이 무릎을 소리 나게 내려친다.
“그래, 맞아. 마치 내가 실제로 우주 속에 있는 것처럼 묘사가 생생하다니까. 하아.”
우주 한 가운데로 독자를 이끄는 필력.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오게 했다.
“개인적인 고난을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확대해서 전달할 수 있지? 이건 흡사...”
정 회장이 생각에 잠긴 채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지켜보던 송 교수가 뒤를 채운다.
“셰익스피어 같죠.”
정 회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고민을 끌어내는 모습이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야. 마치 풀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 부단히 노력하는 햄릿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랄까...”
쉼 없이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뱉던 정 회장이 숨이 찬 듯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읽을 때 놀라웠고, 작품의 깊이를 나누자 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놀랄만한 일이 있지.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전쟁이 있지 않나?”
정 회장의 말에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작품 속의 이름도, 나라도, 시대도 달랐지만 자연스럽게 전범 국가들의 악행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성이었다.
그것도 한 인간의 치열할 삶을 통해 제대로 드러낸 것.
“이거 엄청나군. 소설을 소설로 잡겠다는 녀석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돼...”
어느새 정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거, 이토 히나타 작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겠군.”
얼마나 부들댈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참, 이럴 게 아니지. 이런 작품은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내보내야 해.”
정 회장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주상진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흐뭇한 미소를 짓던 송 교수의 얼굴이 차분해진다.
‘아무래도 사과를 하는 게 맞겠지...’
자신의 실수.
더 늦기 전에 당사자에게 표현해야 했다.
***
늦은 오후.
송 교수는 다시 한번 나를 찾았다.
“사과해야겠구나. 내 오해를 인정한다.”
다행히 송 교수는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답답한 문학계 원로들과는 다르지.’
나 역시 쿨하게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워낙 SF에 대한 인식이 그랬으니까요.”
나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답했다.
그러자 송 교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본다.
“틀에 갇힌 건 네가 아니라 내 자신이었어. 타 장르가 좋은 문학이다, 아니다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부터 틀에 갇힌 거였는데..”
다행히 송 교수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바라봤다.
‘아마 이로써 또 한 번 성장하겠지.’
그러나 여전히 놓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짚어줬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깨셔야 할 틀은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뭐?”
“선생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떠올라서요.”
“...”
내가 말한 사람은 송진호였다.
해결되지 않은 부자 관계의 문제.
두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
송 교수가 순간 놀란 듯 쳐다본다.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넌 대체...”
말끝을 흐리던 송 교수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래. 과거라는 틀도 깨야지. 근데 쉽지 않구나. 과거의 실수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까...”
송 교수가 어금니를 지그시 문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쉬운 일은 없었다.
“물론 과거의 실수를 바꾸는 건 쉽진 않겠죠. 다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적어도 방향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방향?”
송 교수가 눈을 가늘 게 뜬 채 되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진 것과 마주 보는 건 다르잖아요. 두 사람의 거리는 그대로라고 해도 한걸음 옮길수록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는 것과 반대로 멀어지는 건 천지 차이니까요. 아닌가요?”
“...”
순간 대답 못하는 송 교수.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몫.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작품 「황금사과」 출판 일정이 정해졌다.
하이든 에이전시와 정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
영국 피어슨 출판사와 와이즈 출판사의 협업으로 출판 일정이 엄청나게 앞당겨졌다.
이번엔 하이든 에이전시가 미국 출판사들과도 계약을 진행한 탓에 한미영 동시 출판.
-6월 중순에 출판 예정입니다.
정확한 일정은 석 달 뒤로 정해졌다.
‘이 정도면 됐어.’
나는 모든 출판 일정을 확인한 뒤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 「레이디 햄릿」의 시사회 일정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물론 비행기 안에서도 일은 쉬지 않았다.
“서준아, 이건 세부 일정.”
나는 장현웅이 건넨 영화 홍보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중간 중간 잡혀있는 영화사, 언론사와의 인터뷰 스케줄 역시 꼼꼼히 확인했다.
“작가님, 혹시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그때, 우리를 알아본 스튜어디스를 물었다.
“저희 와인 한 잔씩 주시겠어요?”
“혹시 원하시는 와인이 있으신가요?”
“셰리 와인이면 좋겠네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친절한 스튜어디스의 인사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잠시 뒤,
향긋한 고급 와인이 내 손에 들린다.
그리고 정확히 15시간 뒤.
우리는 시사회가 진행되는 상영관에 도착했다.
***
늦은 오후.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영관 문을 바라봤다.
시사회에 앞서 권서준 작가가 이번 작품을 보고 있었다.
“하아...”
첫 영화 시사회 때보다 더 떨리는 마음.
‘권 작가님이 말하고자 했던 걸 내가 잘 표현했을까?’
한없이 부족하다는 걱정에 마음이 초조해진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러닝타임.
그러나 이틀이 지난 것처럼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그리고 잠시 뒤,
상영관 문이 열리며 권서준 작가가 나온다.
“잘 봤습니다.”
올란 감독은 재빨리 권서준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들어갈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
올란 감독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실망스러웠던 걸까...’
그런데 그때, 권서준 작가의 감상평이 이어진다.
“이거 충격이 크겠는데요?”
“...네?”
“최고였습니다.”
담담한 칭찬.
그러나 그 어느 칭찬보다 올란 감독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저,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머릿속에 그렸던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었죠.”
옆에서 함께 고생한 정은미 피디가 엄지를 세운다.
“하, 하아...”
순간 두 다리가 풀린다.
그제야 비로소 온몸의 피가 도는 기분.
그리고 그날 오후.
영화 「레이디 햄릿」이 첫 프레스 시사회가 열렸다.
물론 반응은 엄청났다.
***
늦은 오후.
LA 근교에서 진행된 시사회.
초대받은 지미 스미스가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지미.”
먼저 알아본 올란 감독과 악수를 청한다.
지난번 칼럼을 통해 엄청나게 올란 감독을 악평했던 지미 스미스였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손을 맞잡았다.
“토크쇼 스케줄 때문에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바쁜 스케줄 중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왔습니다. 실망스럽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다를 겁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악평을 쓰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니까요.”
지극히 날선 대답.
그러나 올란 감독의 얼굴엔 오히려 여유가 엿보인다.
“보고 나서 말씀해주시죠. 그럼.”
“...”
자신감 넘치는 올란 감독의 대답.
그러나 여전히 지미 스미스는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
‘과연 내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쉽지 않았다.
한 번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면 극복하기란 어려우니까.
‘영감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거든.’
팔짱을 낀 채 다소 무료한 표정으로 영화를 기다렸다.
잠시 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이 올라온다.
낯선 동양 배경이 스크린을 채운다.
그리고 이름조차 어색한 한국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 팔짱은 낀 손이 내려온다.
고개를 점점 더 스크린 앞으로 다가온다.
‘이게, 올란 감독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작품과 연출력까지 모두 완벽에 가까웠다.
‘이건... 엄청나잖아...’
비단 지미 스미스뿐만이 아니었다.
상영관을 찾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
늦은 오후.
시사회 관련 기사가 한국까지 전해진다.
[영화 레이디 햄릿. 돌풍 예고.]
[프레스 시사회에서 찬사받아...]
권서준의 기사를 읽던 송 교수를 고개를 끄덕인다.
‘대단하군. 영화까지 좋은 반응을 얻다니...’
한국 작가로서는 드문 성공.
그러나 더 기대되는 건 조만간 출판될 차기작이었다.
‘그땐 더 큰 충격을 선사하겠지.’
이미 그 맛을 본 송 교수의 얼굴엔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오른다.
거침없이 제 길을 가는 제자의 모습.
자연스럽게 자기 모습을 반추한다.
‘나 역시 가야 할 길이 있지...’
어렵고, 두려운 길.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었다.
다시금 권서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물론 과거의 실수를 바꾸는 건 쉽진 않겠죠. 다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적어도 방향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달 넘게 가시처럼 마음에 남은 그 말.
전날 밤.
결국 송 교수는 아들 송진호에게 먼저 연락했다.
무려 10년 만에 먼저 하는 연락.
약속 장소에서 송진호를 기다리며 송 교수는 하염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다.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간극. 그 막막함에 그 어떤 노력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녀석의 말은 달랐다.
‘등을 진 것과 마주 보는 건 다르잖아요. 두 사람의 거리는 그대로라도 한걸음 옮길수록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는 것과 반대로 멀어지는 건 천지 차이니까요.’
그 말을 듣자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방향을 바꾼다라...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걸까?’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무슨 일이세요?”
아들이었다.
몇 년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그동안의 집필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
송 교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말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잘 봤다고 해야 하나.
과거의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뜻밖에도 송진호 입이 먼저 열린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뭐?”
“배가 고파서요.”
“...그, 그래. 밥부터 먹자.”
두 사람은 가까운 백반집으로 향했다.
마주 보고 앉은 부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그 사이 주인아줌마가 다가와 묻는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어... 제육주세요. 넌?”
“뭐, 저도요.”
주문을 마치자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
“...”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끝내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
문득 고개를 들자 시선이 짧게나마 부딪친다.
“...”
불편한 호흡과 분위기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어색한지 송진호가 먼저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는 송 교수 앞에 놓인 김치를 바라본다.
손을 뻗기엔 다소 먼 위치.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린다.
그 순간,
송 교수는 앞에 있던 김치를 슬쩍 송진호 쪽으로 밀어줬다.
아주 작은 용기.
“...”
힐끔 보던 송진호가 말없이 밥알을 가만히 씹는다.
그러다가 천천히 젓가락을 뻗어 김치를 집는다.
“...”
그 순간, 송 교수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래.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었다.
작은 시작.
그러나 동시에 아주 큰 변화이기도 했다.
순간 권서준의 말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다.
‘방향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고작 첫걸음.
그러나 방향이 달라진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