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barefaced - 뻔뻔스러운, 낯짝이 두꺼운 (4)
197.
***
나는 올란 감독에게 연락해 17일 오후 일정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날은 감독 인터뷰 위주인 스케줄이라 괜찮습니다.
다행히 오후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내 이토 히나타 작가의 낭독회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결정에 장현웅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대체 거길 왜 가겠다는 거야? 가봤자 역사 왜곡 주장만 온종일 듣느라 기분만 상할 텐데?”
장현웅의 말은 맞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참석의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 제대로 알아야 반박도 할 수 있으니까.”
“반박?”
“그래. 세계 속에서 역사 왜곡이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나도 너도, 그리고 대중들도 알 필요가 있잖아.”
“흠.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장현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야. 지속적인 역사 왜곡이 가능한 것도 일본 국민의 자국 역사 왜곡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이고.”
내 말을 듣던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난 가끔 그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 자료로 보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보나, 실제 사건으로 보나 명명백백히 잘못된 역사를 왜 맞다고 주장하는지 말이야.”
“그건 일본의 정규 교육과 관련이 있어. 일본 역사 교과서는 메이지 유신까지만 다루거든. 근·현대사는 전부 소단원 수준으로 가볍게 다룰 뿐이지. 그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각종 전쟁범죄들은 철저히 왜곡하고 은폐해. 그러면서 자신들이 당한 피해, 이를테면 도쿄 대공습, 원폭 투하 같은 일은 상세하게 가르치고.”
장현웅이 놀란 듯 입을 떡 벌린다.
“하, 그렇게 왜곡된 정보만 배우다 보니 일본인들이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협한 시선은 비단 서양의 문제만이 아니야.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자들도 똑같다고. 그래서 알려야 하는 거고.”
“하아,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넌 정말 대단하다...”
장현웅이 감동한 듯 나를 바라본다.
장현웅의 말대로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
그러나 단순한 애국심만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문학이 제 가치를 갖기 위해선 문학의 부정적인 사용에 대해서도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경고는 자연스럽게 내 차기작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올 거고.’
나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를 짚으면서 내 작품에 대한 마케팅도 함께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번에 제대로 보여줘야지.’
작가로서 위엄을 되찾아야 할 때였다.
***
초저녁.
정영만 회장의 저택을 찾은 송 교수는 가벼운 반주를 마시며 정 회장과 대화를 나눴다.
출판계, 건강, 문화 얘기로 흐르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송 교수가 집필 중인 작품으로 이어졌다.
“그래. 자네 차기작도 거의 완성이 되었다고?”
정 회장이 근황을 묻는다.
송 교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얼마 전 편집본이 완성됐습니다. 썩 만족스럽진 않은데, 우선 서준이한테 부탁해놨습니다.”
“서준이한테?”
“네, 그 녀석이라면 뭔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정 회장은 조금 놀란 듯 쳐다본다.
누구보다 송 교수와 권서준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자에게 작품 조언을 구한다라... 자네, 정말 많은 것을 내려놨군.”
“그만큼 절박한 거죠. 과거의 저 자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말 한마디에서 굳은 결심이 느껴진다.
“하긴 그런 의미에서 서준이 녀석은 최고야. 편견에 갇히지 않은 사고에, 날마다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는 중이니까.”
부커상 수상에 이어 그림 동화까지.
그야말로 새 장르, 새 작품으로 매일 같이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작가 반열에 오른 제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는 스승의 마음을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소를 짓던 송 교수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진다.
권서준의 차기작 때문이었다.
‘SF를 준비한다고 했지...’
알 수 없는 녀석의 행보에 걱정이 앞선다.
그때,
지켜보던 정 회장이 천천히 입을 땐다.
“좋은 소식투성인데 자네 표정은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송 교수가 서둘러 표정을 감춘다.
그러나 눈치 못 챌 정 회장이 아니었다.
가만히 보던 정 회장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인다.
“하긴, 걱정되겠지. 실은 나도 처음엔 자네와 똑같은 반응이었으니까.”
정 회장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녀석이 어떤 사람인가. 언제나 더 높은 경지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녀석 아닌가. 그러니 한 번 믿고 기다려 보자고.”
정 회장은 믿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
결국 송 교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시간 뒤.
정원을 빠져나가는 송 교수의 얼굴엔 깊은 근심이 드리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왜 SF인 거지?’
곱씹을수록 아쉬웠다.
‘너무 뛰어난 천재는 재능을 낭비한다더니... 그게 맞는 말이었어.’
연이은 성공이 권서준에게 독이 됐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은 모든 걸 해낼 수 있다고 과신하고 하는 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군...’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뒤 자신의 행보와 흡사했다.
고였던 순문학 계보를 부수고, 새로운 문학의 경지에 도달하겠다 결심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숱한 좌절뿐이었지.’
순문학 계보를 깨부수는 것도, 새로운 문학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송 교수가 손에 든 건 펜이 아닌 술이었다.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클수록 정신과 몸은 오히려 피폐해졌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혼의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그때, 회장님께서도 말리셨지. 싸우려는 글을 쓰지 마라. 그저 네 길을 가라...’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옳은 길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 스스로가 설득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더 냈지만 오히려 퇴보한 느낌에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말았다.
후회만 남는 과거의 실패.
그래서 권서준의 얘기가 더 안타까웠다.
‘대체 왜 그 많은 장르 중에 하필 SF일까? 신은 한국을 버린 건가? 왜 녀석에게 재능을 주고 의욕을 주지 않은 걸까...’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내 강한 의지가 솟구친다.
‘아니야. 제자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그냥 볼 순 없지.’
그 시절,
자기 모습을 꼭 닮은 권서준의 행보.
후회로 점철된 그 길을 제자가 가게 둘 순 없었다.
‘그래. 이번만큼은 말려야 해...’
굳은 표정의 송 교수가 휴대폰을 들었다.
스승으로서의 다짐이었다.
***
[내일 잠깐 볼 수 있을까?]
어젯밤.
송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몇 주 전 받은 메일을 떠올린다.
송 교수의 차기작 원고.
심사숙고한 송 교수의 작품은 훌륭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보였다.
‘여전히 틀에 박혀 있어.’
단순히 필력이나 캐릭터 설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작가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어떤 트라우마가 송 교수의 글이 확장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본인은 결코 모르는 문제.
누군가는 짚어줘야 할 부분이었다.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차라리 잘 됐어.’
점심 무렵.
작업실 근처에서 송 교수와 만났다.
“여기다.”
“일찍 오셨네요?”
“그럼. 우리 권 작가님을 기다리게 했다가는 아마 뉴스에 날걸?”
너스레 섞인 가벼운 농담.
우리는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를 했다.
부커상 수상 이후 대중들의 반응부터, 해외 순회공연 중인 뮤지컬 이야기까지.
우리는 최근 근황에 대해 소탈하게 나눴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송 교수의 눈빛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느낌.
한 시간쯤 대화가 이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응?”
“혹시 하실 말씀이 있나요?”
“...”
“뭔가 그런 느낌인데 꺼내기 어려워하시는 느낌이라서요.”
송 교수는 말없이 잠시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후.... 그래. 네 말이 맞다. 실은 할 말이 있어.”
송 교수는 결심한 듯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어렵게 입을 땐다.
“회장님께 얘기 들었다. SF를 쓰고 있다고?”
“네, 맞습니다.”
“대체 왜 SF인 거냐? 다른 장르도 많은데...”
찬물을 한 모금 마신 송 교수는 나머지 말을 마저 꺼낸다.
“솔직히 말하면 그 길을 건너지 않았으면 한다. 진심으로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말투.
물론 나는 송 교수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해줄 답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싫습니다.”
“...뭐?”
충격을 받은 송 교수가 쳐다본다.
“전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거니까요.”
“그렇게 쓰고 싶은 게 고작 SF라는 거냐?”
“네, 맞습니다.”
“서준아, 그건 네가 가야 할 길이 아니야. SF는 정통 문학이 아니라고. 아무리 훌륭한 글을 써도 인정받기 어렵다는 걸 왜 모르는 거니?”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충고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나는 차분히 되물었다.
그러자 오히려 불안해지는 쪽은 송 교수였다.
“널 위한 거야. 제발 다시 생각해 봐라...”
간절한 바람이 느껴진다.
이쯤 되면 말로 하는 설득은 의미가 없었다.
“좋아요. 제가 쓴 글이 과연 정통 문학인지 아닌지...”
나는 설득 대신 내 작품을 내밀었다.
“선생님이 직접 확인하시죠.”
답은 이 안에 있으니까.
***
늦은 밤.
송 교수는 권서준의 원고를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고급 오피스텔.
남자 혼자 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깔끔한 그의 성격답게 먼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균실 같은 깨끗함.
그러나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지는 공간.
그래서일까.
집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송 교수가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은 이곳이 아닌 연구실이었다.
“후...”
송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원고를 바라본다.
바로 권서준의 차기작.
분량을 보니 이미 완성한 모양이었다.
‘대체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하는 걸까...’
안타까웠다.
저 재능을 고작 SF에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안 그래도 천재로 주목받는 상태에서 한 번만 삐끗하면 난리가 날 거야...’
환호는 비난으로, 박수는 손가락질로 변질될 게 분명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겪어 봤으니까...’
그러나 완고한 권서준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마치 그 시절의 자신처럼 확고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결국 경험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걸까?’
송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원고를 펼친다.
그런데,
불과 몇 장 읽지 않았는데 눈이 커진다.
‘이건...’
생경한 우주 배경.
그러나 그 안에 담은 건 우리가 겪은 역사의 이야기였다.
‘배경만 우주지, 그 안에 담긴 건 전쟁의 참혹함과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한 인간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야...’
책장을 넘길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권서준은 마치 새로운 세상과 감각을 창조하는 듯 새로운 배경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SF 장르였지만 장르조차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수려한 문체는 본 적 없는 세상을 형상화하며 작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게다가 뭔가 남는 기분이야...’
가상의 세계였지만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역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작품을 읽고 나면 뭔가 배운 것 같고, 역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뿌듯함이 밀려든다.
‘일종의 교양 욕구가 채워졌다고 해야 할까?’
흥미 위주의 작품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살아있는 감동이 먹먹히 밀려든다.
“하아...”
한숨과 함께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한다.
이쯤 되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틀에 갇혀 있는 건 나였구나...’
아들에게 지적한 그 실수.
그 치명적인 실수를 자신이 하고 있었다.
자책이 밀려든다.
그러나 동시에 권서준의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상승한다.
‘이거... 세상이 또 한 번 시끄러워지겠어.’
송 교수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