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barefaced - 뻔뻔스러운, 낯짝이 두꺼운 (3)
196.
***
겨울이 깊어지는 사이.
나는 동굴 잠을 자는 곰처럼 작업실에 박혀 차기작에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상상력을 따라 나만의 우주를 탄생시켰다.
우주.
신비로운 미지의 세상.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영역.
그 시절.
밤하늘은 그저 경외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올림포스가 저 하늘 어딘가 있을까?
신이 사는 세상이 저 너머에 존재하는 걸까?
그러나 400여 년이 지나고, 과학이 발전하고, 밤하늘에 대한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
우주, 그리고 행성.
그 밖의 과학적인 증거를 토대로 생겨난 무수한 가설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였고, 자신의 속내를 다 보여주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 미지의 땅을 오로지 내 상상력으로 탐험했고, 조금 전 그곳의 이야기를 막 끝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써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내가 느낀 설렘을 그들도 느끼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 안에 담긴 황금사과 역시 제대로 맛을 내야겠지.’
재미를 넘어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을 담은 작품.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이잉.
작품을 끝낸 기쁨을 만끽하는 사이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하이든 에이전시의 고용수 부장이었다.
집필 도중 그림 동화 판권과 관련된 연락을 종종 했었는데, 오늘도 그 문제인가 싶었다.
-작가님, 디니즈에서 「도둑고양이 네로」의 판권을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둔 제안.
그림 동화의 2차 저작물로는 가장 좋은 제안이었다.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데... 잘 됐군.’
한 해의 시작부터 출발이 좋았다.
그림 동화 판권은 디즈니와 계약하기로 결정한 뒤, 나는 몇 가지 세부 조건만 전달하고 나머지는 하이든 에이전시에 위임했다.
-그럼 계약 관련 진행 상황을 주기적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알아서 착착 진행되는 상황.
나는 만족감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었다.
이 소식을 가장 기뻐할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
대학교 연구동.
방학 시즌을 보내고 있는 송영도 교수의 손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바로 두 달 전 출시한 아들 송진호의 책이었다.
제목 : 뻔뻔한 거짓말.
무려 2년간의 노력 끝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었다.
송진호는 이 작품 속에서 이전과 달리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캐릭터의 변주.
허황된 주제 의식을 버리고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거장들을 흉내 내던 고질병도 꽤 많이 고쳐졌어.’
하나같이 긍정적인 시도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송 교수의 표정은 어두웠다.
‘시도는 좋지만, 결과가 너무나 아쉽군...’
틀에 박힌 사고가 문제였다.
단단히 박힌 고정관념이 글에서 느껴진다.
‘왜 이렇게 넘어서지 못하는 걸까?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을 담았으면 좋겠는데...’
어딘가 글이 갇혀 있는 느낌.
독자 입장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만들고 더 이상의 기대감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책 판매량에서 더 극적으로 나타났다.
‘듣기로는 초판 인쇄 분량인 3천 부도 다 팔리지 않았다고 했어...’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의 처절한 실패.
연거푸 이어진 실패에 좌절하고 있을 송진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던 송 교수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녀석의 역량은 여기까진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들을 향한 일말의 기대감은 이내 더 큰 실망감으로 변한다.
그에 비해 같은 날 출판된 권서준 작가의 동화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림 동화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 1위를 무려 2달 동안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준이는 쭉쭉 뻗어나가고 있군.’
제자 권서준의 성공.
아들을 향한 실망감에 젖어있던 송 교수는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래. 만일 내 숙원을 풀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송 교수는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있는 정영만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
나는 오랜만에 황태규의 작업실을 찾았다.
“잘 지냈지?”
“저야 형 덕분에 잘 지냈죠. 집필 중이셔서 바쁘다고 하시던데, 끝나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오늘 털고 나왔어.”
“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출판 쪽이 또 한 번 시끌시끌해지겠는데요?”
황태규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짓는다.
몇 달 전과 비하면 비약적으로 밝아진 모습. 말투와 미소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동생도 잘 지내지?”
내 말에 황태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후, 말도 마세요. 너무 잘 지내서 탈이죠. 요즘 디니즈 만화에 푹 빠져서 난리도 아니거든요. 「봄의 왕자」 아시죠? 그거에 완전 빠졌거든요.”
봄의 왕자.
작년 말에 디니즈 OTT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으로 초등학생들에게 특히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저 보러 열심히 그림 그려서 디니즈 애니메이션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믿지 않더라고요. 아이라서 그런지 순수해요.”
동생의 얘기를 꺼내는 황태규의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참, 동생은 언제 데려오는 거야?”
“내년이면 될 거 같아요. 작품 수익도 엄청 들어와서 전세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른다.
“감사하긴, 서로 윈윈한 거지. 참, 할머니도 건강하시지?”
할머니에 대한 물음에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하아, 사실 그게 걱정이에요. 할머니가 서울 올라오기 싫다고, 시골에 남겠다고 하셔서요. 이제 고생 그만 시켜드리고 싶은데 왜 이렇게 손자 마음을 몰라주시는지...”
할머니에 대한 황태규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됐다.
그러나 나는 조금 잘못된 부분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할머니 의견도 존중해 드려.”
“...네?”
“서울에 오셔도 마땅히 할 일이 없으시잖아. 고향에서 소일거리 하시는 게 오히려 할머니 입장에선 마음 편하실지도 몰라.”
“그건 그렇지만...”
“그만큼 자주 찾아뵈면 되지. 안 그래?”
“...”
황태규는 잠시 고민에 잠긴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음. 하긴, 생각해보니 형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서울에 혼자 올라온 것도 시골에선 할 게 없어서였으니까요. 할머니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황태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조금 전 우리의 대화에선 삶의 작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호의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만의 틀과 생각에 갇힌 판단인 경우가 많았다.
‘남을 생각해준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어리석은 선택을 종용하는 것과 같지.’
이쯤에서 좋은 선물을 풀어놓은 때가 됐다.
“참, 내가 선물하나 가져왔어.”
“선물이요?”
“어. 아마 우리 책의 판권이 팔릴 거 같아.”
“저, 정말요? 벌써요?”
놀란 녀석의 표정.
반짝이는 눈빛에서 기대감이 엿보인다.
상대방의 이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짜릿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선물 포장지를 풀기 시작했다.
“어딘 줄 알아?”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디니즈야.”
“...”
순간 녀석의 표정이 멍해진다.
“...네?”
“디니즈라고. 네 동생이 그렇게 바라던 디니즈.”
“...”
녀석이 말없이 눈을 깜빡인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디니즈에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도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그제야 점차 표정이 얼어붙는다.
“서, 설마... 진짜 디, 디니즈에서요? 「봄의 왕자」의 그 디니즈요?”
믿기지 않는 녀석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기분이?”
그제야 실감이 아는지 황태규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하, 하아. 말로 다 못 하죠... 믿기지도 않고...”
잠시 멍하던 황태규가 나를 보며 입을 연다.
“형, 저, 잠깐만 전화 한 통 하고 와도 될까요?”
“물론이지.”
황태규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뛰쳐나간다. 누구에게 하는 전화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은 건 바로 가족이니까.
‘오늘 두 형제에겐 뜻깊은 날이 되겠지.’
내 마음도 덩달아 뿌듯해진다.
***
늦은 오후.
나는 황태규와 헤어진 뒤 곧바로 작업실로 돌아왔다.
집필도 끝냈겠다, 오랜만에 장현웅과 몸보신 좀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보고 있는 장현웅의 모습이 보인다.
어찌나 심각한지 내가 지척에 다가갈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야, 뭐해?”
“아, 깜짝이야...”
내 말에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화들짝 놀란다.
“아... 벌써 왔어?”
“어, 뭔데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는 거야?”
“어? 아, 보다 보니까 화가 나서.”
한숨을 푹 내쉬는 녀석의 표정.
얼굴에 가득 찬 건 불쾌감과 분노였다.
“뭔데 그래?”
“아마 보면 너도 피가 거꾸로 솟을 거야.”
장현웅이 마지못해 태블릿 PC를 내민다.
커다란 화면엔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바로 이토 히나타 작가 기사였다.
[히나타 작가, 국제 대회에서 욱일기 사용 문제없다. 한국의 터무니없는 트집일 뿐.]
[이토 히나타. 韓 강제징용 소송 판결문 문제 있다. 그땐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어....]
연일 혐한에 가까운 발언이 이슈가 되고 있었다.
아울러 이토 히나타 작가의 작품 관련 기사가 길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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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나타 작가의 역사 왜곡 발언이 연일 이슈다. 이토 히나타가 몇 년 전 쓴 역사 왜곡 소설이 미국 학교에서 필수 도서로 채택되자 다시금 그의 과거 행적이 이슈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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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쟁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전쟁 피해자인 한국이 가해자로 뒤바뀐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공립학교 필독서로 지정되었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하고, 문학성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반전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게다가 엔플릭스에서 내년 하반기 영화로 제작 중이라는 소식에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한탄하고 있다.
매일연애 -윤석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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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기자는 영화 제작으로까지 번지는 이번 상황을 적절히 이슈화하고 있었다.
“봐봐. 열 받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데 오히려 필독서라니. 다른 나라는 그런 거에 관심도 없나 봐. 게다가 다음 달엔 LA에서 낭독회도 한 대. 참나...”
장현웅이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찬다.
그러나 그게 냉정한 현실이었다.
‘타국의 가슴 아픈 역사엔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먼 미국에서 날아온 메시지였다.
[드디어 영화 개봉 일정이 잡혔습니다. 시사회와 행사 일정을 보내드립니다.]
LA에서 날아온 초대장.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의 초대였다.
드디어 내 영화가 세상에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정확히 11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되는 일정.
나는 들뜬 마음을 살짝 누르며 다시 한번 일정을 확인했다.
“참, 이토 히나타 작가 낭독회가 언제라고 했지?”
“어? 잠깐만... 다음 달 17일이네.”
17일이면 올란 감독이 보낸 시사회 일정에 포함되는 날.
게다가 장소 역시 시사회 장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거 재밌겠는데?’
운명처럼 들어맞는 일정에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오른다.
벌써부터 머릿속엔 재미난 상황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