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useless - 쓸모 없는 (5)
192.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이토 히나타 작가의 관련 기사를 확인했다.
[소설 「개화」 일본을 넘어 유럽의 출판가 점령.]
[평생 전쟁과 인류애를 다룬 이토 히나타, 내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 중]
노벨문학상.
작가로서 한 번쯤 꿈꾸는 최고의 명예.
그러나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상은 관심 없어. 그보다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바로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내가 이토록 역사극에 관심을 갖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내가 쓴 대부분의 작품이 바로 실제 역사와 연관이 있었으니까.
-헨리 6세
-존 왕
-리처드 3세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8세
4대 비극과 희극에 가려져 있지만 그 시절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페스트와 전쟁.
수많은 국난을 통해 대중들의 모든 관심이 역사를 향해 흘렀다.
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절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썼다.
‘우리 역시 그 역경 속에서 계속 살아가야 했으니까.’
물론 역사를 다룬다고 해서 실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결국 우리의 미래를 바꾸는 거지.’
그게 역사극의 가치였다.
따지고 보면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여전히 전시 상황과 다름없는 역사 전쟁이 쉼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슴 아프고 충격적인 역사라 해도 기존의 역사극 틀로는 더 이상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유브튜, OTT, 스마트폰만 들면 재미있는 게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그래서 SF라는 틀이 필요했다.
직접적인 역사로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도 우리의 아픔을 전해야 했다.
그래서 감춰진 진실을 전할 수 있어야 했다.
‘세계인은 생각보다 우리의 아픔에 관심이 없거든.’
물론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타국의 아픈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자국 중심의 시선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자연스럽게 진실을 전달할 방법이 필요했고 내가 선택한 수단이 바로 SF였다.
세계인에게 가슴 아픈 우리 역사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문단에도 충격을 줄 태풍이었다.
긴 싸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포기해선 안 돼. 그게 오히려 내 권리를 지키는 일이야.’
사실 셰익스피어라는 천재 작가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훌륭한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돕는 훌륭한 정치가들이 있고, 예술가를 지원하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멋진 사회 속에서 천재가 탄생할 수 있었다.
더 풍요로운 세계를 위해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진실을 위한 투쟁이었다.
좁은 의미에선 독자를, 보다 넓은 의미에선 전 세계 독자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 손에 주어진 유일한 무기는 펜뿐.
내 싸움은 바로 하얀색 바탕화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사회와 기득권에 저항하던 사람.
크리스토퍼 말로.
영국의 천재 작가.
그 시절 말로는 중세 기독교적 틀에서 벗어나 자아와 자유를 찾고자 투쟁했다.
‘재미있군. 나 역시 자네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의 어느 날.
나는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
일본 교토.
작가 이토 히나타는 분재를 다듬으며 조수의 보고를 들었다.
“작가님, 유럽에서 증쇄 요청이 왔답니다. 정말 엄청난 흥행입니다.”
호들갑을 떠는 조수와 달리 이토 히나타의 눈매는 차분했다.
“뭘 그런 걸로 호들갑을 떨고 그래?”
“아, 죄송합니다...”
서슬 퍼런 눈빛에 조수가 얼른 눈치를 챙긴다.
“참, 한국에선 반응이 어때?”
이토 히나타의 얼굴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떠오른다.
“아,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조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한국에선 여론이 안 좋은 거 같습니다. 몇몇 작가들은 역사 왜곡이라며 국민 청원을 통해 입국 금지 요청까지 했다고 하고요.”
“역사 왜곡이라고?”
작가로서 기분이 상할만한 일.
그러나 오히려 이토 히나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다.
물론 일반적인 미소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뭐, 마음껏 그러라고 해. 언제나 그렇듯 입만 열면 거짓말만 늘어놓는 민족이니까.”
여든을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엔 고집스러운 오만이 서려 있었다.
그사이에도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으니까.
***
계절이 바뀌었다.
시간은 흘러 12월 중순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SF 작품에 몰두했다.
아직 첫 문장도 쓰지 않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어차피 머릿속으로 이미 그리고 있으니까.’
나는 엔딩으로 향하는 지도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길을 찾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한 것뿐이었다.
“야, 서준아! 첫눈 내린다.”
호들갑 떠는 장현웅의 말에 창가를 바라본다.
아침부터 꾸물꾸물한 하늘에선 올해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라...’
괜히 기분이 설레는 오후.
지이잉.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주 편집장이었다.
-작가님! 드디어 오늘입니다.
인사도 생략한 한 마디.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 그림 동화 「도둑고양이 네로」가 출판되는 날이니까.
그날 오후.
내 책은 한국과 영국에 동시 출판되었다.
물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며칠 뒤, 영국 노퍽주 샌드링엄.
시내로 향하는 차에 탄 엘리자베스 여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주말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때문이었다.
‘올해도... 오지 않겠지?’
수십 년째 이어진 가족 행사.
그러나 올해도 손자 조지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권서준 작가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엔딩을 바꾸면 모든 고난과 슬픔은 그 엔딩을 위한 과정이 되고, 복선이 되죠. 그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고요.’
권서준 작가를 만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시도를 하지 못했다.
‘엔딩을 바꾸기 위해선 나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수십 년을 엇갈린 혈육 간의 상처는 생각보다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답답한 마음에 모처럼 시내에 위치한 작은 서점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에 손자손녀들에게 줄 선물 때문이었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은 친히 실내를 돌아다니며 선물을 골랐다.
그런데 그때,
진열대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이 한국 작가의 신작이 엄청나게 팔리는군.”
“그래? 그 정도인가? 이 작가가 요즘 뮤지컬 쪽에서 유명하긴 하던데.”
“뮤지컬뿐만이 아니라 출판 쪽도 장난 아니라고. 아마 곧 미국까지 들었다 놨다 할걸?”
“그래?”
놀란 사내가 되묻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국 작가라는 말에 귀가 쫑긋한다.
영국에서 유명한 한국 작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알기에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신간으로 향한다.
역시나 사람들이 말하는 작품은 권서준 작가의 신작이었다.
‘그런데... 그림 동화네?’
예상치 못한 행보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호기심이 동한다.
여왕은 장갑을 낀 채 그림 동화를 집어 들었다.
신비한 그림체와 따뜻한 이야기.
가만히 서서 읽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대로 몇 페이지를 연거푸 읽어간다.
‘이건...’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 헤매는 어린 고양이의 슬픈 이야기였다.
아프고, 힘들고, 그러나 이내 남는 건 따스한 온기였다.
‘말도 안 돼...’
백 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마음마저 사로잡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어느새 그림 동화라는 편견은 사라지고 이야기가 주는 감동만이 먹먹하게 남는다.
“하아...”
숨을 고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자리에 책 한 권을 샀다.
어린 손자.
아니, 아직 다 크지 못한 손자를 위한 선물이었다.
“뜻깊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기를...”
커다란 동화책.
그 안엔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마음이 살며시 담기기 시작했다.
***
영국 왕립예술학회.
업무를 보던 조지 학회장이 긴 한숨을 내쉰다.
“후우...”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온 권서준 작가의 연락 때문이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라는 안부 인사.
그러나 정작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마지막 추신이었다.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엔딩을 바꿀 수 있는 펜은 아직 우리 손 쥐어져 있으니까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후우...”
애써 외면하고 있던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진다.
조지 학회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으로 향한다.
여느 때처럼 왕실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초대장.
작년엔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모두 권서준 작가 때문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결심해도 할머니를 마주하는 순간 솟구칠 미움과 원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아, 난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조지 학회장은 결국 초대장을 다시 서랍 제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책상에 놓인 소포 하나가 눈에 띈다.
자신이 외출하는 사이 도착한 소포인 모양이었다.
‘누가 보낸 거지? 이건 왕실 문양인데...’
한참을 고민하던 조지 학회장은 조심스럽게 소포를 뜯는다.
안엔 책 한 권과 붉은 인장이 박힌 카드가 담겨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조지에게.
무심코 내용을 확인하던 조지 학회장의 눈이 커진다.
‘이건...’
분명 할머니의 필체였다.
9살 크리스마스 때 받았던 카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조지 학회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할머니가 보낸 책으로 향한다.
예전이었으면 보지도 않고 창고행이 되었을 할머니의 선물.
그러나 억지로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본다.
책은 그림동화였다.
작가는 놀랍게도 권서준 작가였다.
‘지난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하더니 그래서인가...’
조지 학회장은 애써 책장을 펼친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마음이 시큰거린다.
[부모를 잃은 어린 고양이는 울지 못했습니다.]
신비로운 그림체는 부모의 죽음을 환상처럼 나타냈다. 그 아래 어린 고양이는 울지도 못한 채 부모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
순간,
자신의 9살 기억이 떠오른다.
숨이 막힐 듯 상처가 올라온다.
그러나 조금 더 용기를 내 네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고양이의 모습은 조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부모의 흔적을 되짚으며 상실과 삶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는 이야기.
상처투성이였던 고양이는 어느새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그제야 처음으로 눈물을 터트린다.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끝없이 흐르는 네로의 눈물.
어느새 조지 학회장의 뺨에도 눈물이 흐른다.
그래.
고작 어린 고양이의 모험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옥죄고 있던 무언가에서 해방된 기분이 든다.
“하아...”
한결 후련해진 마음.
몸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전에 느끼지 못한 편안한 마음에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린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군...’
제일 먼저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뒤를 이어 권서준 작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참 대단한 작가야...’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조지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제일 안쪽에 밀어 넣었던 초대장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