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90화 (190/203)

190. useless - 쓸모 없는 (3)

190.

***

“걱정할 거 없어. 난 평범한 SF를 쓸 생각은 없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나에겐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SF라는 틀에 놀라운 보물을 담을 생각이었다.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미 내 머릿속에 큰 줄거리는 완성된 상태였다.

“알지. 너야 알아서 잘하잖아.”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기존의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시도는 환영할 만해. 그런 신선한 시도에 독자들도 다시금 책을 펼치게 되는 거고.”

장현웅의 얼굴이 그제야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 일 얘긴 그만하자.”

장현웅이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기울인다.

지이잉.

그때, 내 휴대폰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굴까 싶었는데, 주상진 편집장이었다.

-작가님, 저 주 편집장입니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축하 파티 초대 명단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와이즈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부커상 수상 축하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메일로 초대 명단 보내드렸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인 중 빠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배려하는 마음.

나는 휴대폰을 든 채 노트북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타이거 스튜디오, 와이즈 출판사, 창조 극단 서미연 대표를 포함한 뮤지컬 업계 인맥까지.

내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대부분 포함되었다.

“잘 선정하셨네요. 좋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더 초대하고 싶으신 분이 있을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명단에 없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럼 한 명만 더 추가해도 될까요?”

-그야 물론이죠. 말씀만 하세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권 작가님이시니까요.

잠시 뒤,

나는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보냈다.

누구보다 내 일에 관심을 두고, 내 성공을 기뻐해 주는 사람.

적어도 이번 파티엔 꼭 초대해야 할 사람이었다.

***

늦은 밤.

JW엔터테인먼트 연습실.

넓은 연습실에선 안무 연습이 한창이었다.

거친 숨을 참아내며 격렬한 안무를 연습하는 사람은 바로 신하율.

예능 출연을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 중이었다.

땀이 뺨을 타고 흐르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신하율은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안무를 마무리했다.

“그만.”

그때, 지켜보던 댄스 팀장이 소리치자 신하율이 동작을 멈춘다.

“훌륭하네요. 너무 잘했어요.”

안무를 봐주던 팀장이 박수를 치자 신하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아, 하아, 정말요?”

“네, 정말 완벽했어요.”

팀장이 엄지까지 세우며 칭찬하자 신하율은 그제야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하아, 하아.”

지친 숨을 토해내고는 이내 바닥에 드러눕는다.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쏟은 상태.

지켜보던 성도윤 팀장이 물과 수건을 챙겨 서둘러 다가간다.

“이야, 이것도 그림인데? 너 조만간 스포츠음료 CF 들어오겠다.”

“그게 하아, 숨 쉴 힘도 없는, 하아,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흘겨보는 신하율을 보며 성 팀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고생했다. 좀 쉬어.”

성 팀장이 수건을 건네자 신하율이 힘겹게 일어난다.

“후우, 감사합니다. 이제 끝난 건가요?”

신하율이 대충 땀을 닦아내며 묻는다.

“어. 오늘 스케줄은 끝이야.”

“내일도 스케줄 없죠?”

“그래. 너 힘들다고 해서 뺐잖아.”

“야호! 그럼 저는 이제 잠시 세상에서 사라질게요.”

신하율이 귀엽게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한다.

‘하긴 저럴 만도 하지.’

영화 「레이디 햄릿」 촬영 이후에 계속해서 이어진 살인적인 스케줄.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쉬는 거라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장 쉴 거 같던 신하율은 곧바로 휴대폰을 집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 팀장이 혀를 내두른다.

“너 설마, 또 검색하냐?”

“네, 어머. 그 사이에 기사가 수십 개 올라왔어요!”

신하율은 신이 난 듯 기사를 읽어간다.

기사를 검색하는 연예인이라, 뭐 그리 특이할 건 없었다.

‘그거야 자기 기사라면 그렇지...’

신하율이 검색하는 건 본인 기사가 아닌 권서준 작가의 기사였다.

“아, 근데 이 기자 권 작가님 안티인가? 사진이 왜 이래요?”

신하율은 기사 하나를 보여주며 쀼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슬쩍 쳐다본 성 팀장이 마지못해 대꾸한다.

“왜 이렇긴, 잘 나오기만 했구먼.”

“이게요? 실물의 반도 안 나왔는데요?”

지켜보던 성 팀장이 결국 혀를 내두른다.

“야, 그런 열정으로 네 사진하고 기사를 검색해봐라. 내 평생 너처럼 자기 기사 검색 안 하는 배우는 처음 봤으니까.”

“제 기사 보면 뭐 해요. 괜히 안 좋은 댓글 하나라도 있으면 기분만 상하는데.”

“권 작가 기사는 괜찮고?”

“네, 볼 때마다 좋아요. 이 맛에 덕질하나봐요.”

오히려 신나 하는 신하율을 보며 성 팀장이 고개를 젓는다.

‘저 정도면 중증이지.’

그래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일을 열심히 안 하는 것도 아니니까.

지이잉.

그때, 성 팀장의 휴대폰이 울린다.

“네, 네. 오랜만이네요. 네, 네. 내일이요? 아, 한 번 물어볼게요. 요즘 일정이 좀 많았거든요. 네, 네.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 신하율이 성 팀장을 바라본다.

“무슨 전화예요?”

“아, 와이즈 출판사 주 편집장님이신데 내일 권 작가님 수상 축하 파티가 있다고 참석할 수 있냐고 물으셔서.”

“저 갈래요.”

“그래 너 쉬고 싶다고 했으니까 거절하는 게... 뭐라고?”

성 팀장이 잘 못 들었나 싶어 되묻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하율이 대답한다.

“간다고요. 저 괜찮아요.”

“뭐? 너 조금 전까지 잠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다며?”

“그거야 일할 때 힘든 거죠. 몇 시래요?”

시간도 모르면서 가겠다고 하는 소속사 배우의 모습.

황당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이미 잔뜩 신이 난 신하율의 얼굴 때문이었다.

마치 팬 미팅을 앞둔 열성 팬의 얼굴.

회사 밖에서 신하율을 기다리는 팬들의 표정이 딱 저랬다.

***

와이즈 출판사 편집실.

주 편집장은 내일 있을 축하 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이잉.

휴대폰이 울린다.

[참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발신자는 신하율 매니저.

연락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답장이었다.

‘다행이군.’

이로써 축하 파티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한 번 더 장소와 초대 명단을 확인하고는 자정 전에 출판사를 빠져나왔다.

오늘도 보람 된 하루.

그러나 돌아가는 주 편집장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며칠 전 평론가 시상식에서 접한 원로들의 여론 때문이었다.

권서준 작가를 향한 불편한 시선들.

대한민국 순문학 계보를 뒤흔드는 별종의 등장은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선 개천에서 나는 용을 바라진 않으니까. 자기 라인에서 후진이 생기길 바랄 뿐이지...’

결국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욕심이었다.

하나같이 수려하고, 아름답고, 고매한 글을 쓰시는 분들이지만 그 속내는 범인(凡人)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기들의 욕심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위선자들이지.’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편집장으로서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한낱 편집장이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포기한 것도 사실이야...’

그저 대한민국 문학계에 불어야 할 새로운 바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등장으로 처음으로 기대감이 생긴다.

바로 권서준 작가.

포기하고 있던 이 바닥에 부는 새바람.

어둡고, 고인 문학계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 수 있어.’

곤고하게 권력을 유지하는 순문학 고인 물과의 피할 수 없는 대립.

아무리 머리를 써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권 작가가 실패하면, 영영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주 편집장은 젊은 청년 작가에게 자신의 남은 희망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

이른 아침.

산책을 즐긴 나는 시간에 맞춰 외출 준비를 했다.

지난번 부커상 수상을 위해 맞춘 정장을 입고 파티가 예정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막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국제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미국에 있는 정은미 피디의 전화였다.

현재 정 피디는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의 공동 연출로 인해 헐리웃에 머무는 중이었다.

-오늘 파티가 있다면서요? 제가 가서 엄청 축하해드려야 했는데, 이것 참 아쉽네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정 피디.

보이지도 않는 표정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미 충분히 축하해주셨잖아요.”

-그래도요. 직접 보고 축하드려야 하는데 아쉽네요.

“참, 편집은 어떤가요?”

-완전 잘 진행되고 있죠. 저희가 생각보다 합이 잘 맞더라고요.

들뜬 목소리를 보니 작업이 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 올란 감독님이 언제 한 번 오셨으면 하시더라고요.

“저야 좋죠. 내년 초쯤 어떨까요?”

-아, 그때쯤이면 어느 정도 편집이 끝날 때라 좋겠네요. 그럼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네. 아,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이건 단순히 지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라 정말 기쁘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드립니다.

진심 어린 축하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누군가 내 작품이, 내 성공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수십 명이 넘게 모인 자리.

이제는 주인공이 나타날 차례였다.

***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정영만 회장은 주 편집장의 보고를 받았다.

-지금 막 권 작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파티는 부족함 없이 준비 했겠지?”

-물론입니다. 참석하신 분들도 워낙 쟁쟁해서 최고급으로 준비했습니다.

주 편집장의 꼼꼼함을 아는 정 회장이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래, 잘했네. 서준이한테는 조만간 내가 보자고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전화를 끊은 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녀석, 지금부터 신나게 즐기겠군.’

권서준 작가의 부커상 수상.

정 회장에겐 마치 자신이 수상한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비로소 우리의 문학이 세계에도 통한다는 걸 알려준 계기니까.’

그러나,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바로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제목 : 개화(開花, かいか)

일본 작가가 집필한 소설로 최근 일본과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소설이었다.

배경은 2차 세계 대전.

전쟁과 침략으로 초토화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본인 선생님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였다.

전쟁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비극을 전달할 수 있는지 세밀하게 담은 작품으로 현재 미국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로 그 인기가 번지고 있었다.

물론 글은 잘 썼다.

캐릭터와 감정 묘사 역시 훌륭했다.

상징성은 더할 나위 없고, 서사 역시 탁월했다.

그래서,

못마땅했다.

‘이 소설은 일제 침략 사실을 교묘하게 미화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이 작품을 쓴 작가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일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오히려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스토리니까. 아니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 주인공의 시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설득될 정도로 교묘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논법.

마치 쌍방 과실처럼 몰고 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한국인 학생을 위해 희생하는 일본인 선생의 모습은 소설의 제목처럼 한국의 근대화를 일본이 도와줬다는 상징적 비유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지.’

정 회장이 어금니를 세게 문다.

분통이 터지다 못해 피가 솟구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소설의 인기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하아...”

답답한 현실에 정 회장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진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문학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쓴 날조가 퍼져나가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타깝군. 안타까워...’

그만큼 한일의 가슴 아픈 역사는 생각보다 세계인들의 관심 요소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단번에 날려버릴 거대한 태풍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문학계 거장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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