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88화 (188/203)

188. useless - 쓸모 없는 (1)

188.

***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커튼을 걷자 가을 햇볕이 객실 안으로 쏟아진다.

그 따스한 느낌을 잠시 만끽하다가 이내 밖으로 나온다.

전날 기분 좋게 취한 장현웅은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점퍼 하나를 챙긴 채 그대로 객실을 나섰다.

정치 예술 경제의 중심지 런던.

대영제국 시대부터 이 나라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시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후아.”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템즈강변으로 향했다.

이제는 쌀쌀해진 바람이 뺨을 훑는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군.’

돌고 돌아 다시 눈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강변에 설치된 돌벽 위에 걸터앉아 템즈강을 바라본다.

한참을 지켜봐도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잔잔하기만 한 강물.

가끔 오가는 유람선이 만들어내는 파동이 이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강 건너편을 바라봤다.

‘저곳이었지. 처음으로 연극 무대가 설치된 곳이...’

강 건너에 위치한 글로브 극장이 눈에 들어온다.

햄릿과 맥베스의 공연이 펼쳐진 곳이자 내가 작가, 배우, 그리고 극장주로 활약했던 곳.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리를 건넌다.

어느새 당도한 원형 건물.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개장하기 전.

그러나 나는 특별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락받았습니다. 편히 보시죠.”

관리인은 문을 열어주고는 자리를 피해줬다.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의 호의 덕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흰 벽과 잘 마른 원목으로 된 통로가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글로브 극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재로 소실되고 재차 지은 건물이지만 그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리처드 버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내 영혼이 예측했어. 삼촌이다!’

햄릿의 대사.

아버지의 원수가 숙부라는 걸 깨달은 햄릿의 절규 섞인 외침이었다.

지금도 원형 극장 안에 울려 퍼지는 듯 생생한 그의 목소리.

사뭇 그리운 벗의 목소리에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극장 안을 살폈다.

조명이 없던 시절.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게 뚫는 천장과 원형의 객석. 넓은 나무 무대 위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큰 두 개의 기둥이 보인다.

‘그래. 이곳이었어...’

나는 나무로 된 긴 의자에 앉아 무대를 바라본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앉아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던 자리.

무대 주변에 공터는 일종의 마당 역할로 평민들이 선 채로 싼 가격에 연극을 보던 곳이었다.

그 시절, 평민과 귀족은 한 곳에서 내 연극을 관람했다.

그 사이엔 수준이나 지식, 계급 따윈 필요 없었다. 고결함도, 신분도, 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울고, 즐기는 관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여왕님도 함께 즐길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 시절 연극은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답답한 현실을 꼬집고, 비틀고,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던 게 바로 그 시절 연극의 역할이었다.

‘내 글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허영심이 붙고, 쓸데없는 의미 부여가 시작되었다.

작품성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이 붙으면서 마치 문학과 예술이 지식층과 일부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인 것처럼 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다 개소리지.’

단적으로 말해 그 시절,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배역은 햄릿도, 맥베스도 아니었다.

‘바로 광대였었어.’

내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광대였다.

맛깔나게 욕하고 비꼬고.

우리나라로 치면 마당놀이에서의 마당쇠 느낌이랄까?

구수한 마당쇠의 입담에 자지러지는 어르신들의 반응처럼 그 시절 광대의 역할이 그러했다.

나는 시대를 비판하거나 귀족들을 욕하는 대사는 죄다 광대에게 맡겼다. 진짜 하고 싶은 속내를 광대의 입을 빌려서 고스란히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나한테도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 중 하나였고.’

등장과 함께 촌철살인의 대사를 연거푸 내뱉는 광대. 그래서 그가 등장할 때면 사람들의 눈이 반짝이고,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드리운다.

물론 광대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하나, 둘, 셋 점프!

다시 하나, 둘, 셋 점프!

세 걸음마다 토끼처럼 깡충 뛰는 춤.

사실 춤인지, 독특한 걸음인지도 모를 광대의 트레이드마크는 어린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죄다 광대의 걸음을 흉내 내며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으니까.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글로브 극장을 나왔다.

그래.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잰 척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해주는 광대였다.

나는 상상 속 도서관을 떠올린다.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야기들.

겉멋에 취한 허풍 가득한 글이 아닌 삶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였다.

‘그래. 이제는 꺼내도 되겠어.’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나는 템즈강을 끼고 자연스럽게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어느새 경쾌해지는 발.

나도 모르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 둘, 셋 깡충.

다시 하나, 둘, 셋 깡충.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였다.

***

늦은 밤.

와이즈 출판사 편집실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퇴근한 자리.

그러나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권지연이었다.

모니터엔 부커상을 수상한 동생의 기사가 자랑스럽게 떠 있었다.

‘너무 잘 됐어. 너무...’

그 어떤 소식보다 기쁜 소식.

그러나 권지연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서린다.

‘승승장구하는 서준이 입장에선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감이 그만큼 클 테니까...’

어린 천재 작가로 주목받고 있지만 문학계 인사 중 몇몇은 ‘어디 한번 실패만 해봐’라는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천재 작가가 갖는 리스크는 컸다.

‘연이은 성공보다는 언젠간 오고 말 실패의 순간이 그들에겐 더 큰 가십거리가 될 거야...’

권지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는다.

적어도 본인이 맡은 작품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동생의 성공을 바라는 게 바로 누나인 자신이었으니까.

권지연은 손에 들린 그림 동화를 바라본다.

권서준의 차기작인 「도둑고양이 네로」.

원고로 시선을 옮기는 권지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다음 날.

나는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때와 달리 귀국 반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작가님! 이번 부커상 수상 소감 좀 말씀해주십시오!”

“포즈 한 번 취해주세요!”

“계획하신 차기작은 있으신가요?”

쏟아지는 질문과 플래시 세례.

부커상 수상이 갖는 의미가 세삼 와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장현웅과 함께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진행된 영국 일정 때문에 귀국 인터뷰와 사인회는 모두 생략했고, 그 덕분에 점심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집이군.’

집이 보이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시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두 손을 뻗으며 나를 반긴다.

“어이고, 우리 아들 왔어. 왜 이렇게 얼굴이 반쪽이 됐어...”

엄마는 내 뺨을 한참이나 살피고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실제로는 살이 좀 쪘지만 눈치 있게 응석을 부린다.

“엄마가 싸준 밑반찬 다 먹고 나니까 식욕이 없더라고.”

“아이고, 그래도 잘 챙겨 먹어야지. 아니다. 좀만 기다려. 엄마가 금방 점심 차려줄게.”

엄마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한다.

그사이 누나가 다가온다.

“고생했어.”

“뭐야, 휴가 낸 거야?”

“휴가 쓰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출장으로 올리라던데? 동생 권서준을 만나는 게 아니라 권 작가님과의 미팅이라나 뭐라나.”

주상진 편집장이 배려해준 모양이었다.

흐뭇하게 웃던 누나가 어깨를 두드린다.

“아무튼 축하해. 정말 자랑스럽다.”

“뭐야, 닭살 돋게. 남매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그래도 팩트니까. 정말 대단해.”

누나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때,

엄마가 나를 부른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뒤늦게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엄마표 김치찌개.

외국만 나갔다 오면 간절하게 찾게 되는 음식이었다.

후룩.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자 조건반사적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맛있어?”

“응.”

“많이 먹어. 많이 있으니까.”

나는 새하얀 밥을 입 안에 가득 넣고는 또다시 찌개를 뜬다.

고소한 돼지고기와 푹 익은 김치에서 나오는 맛이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밥 한 끼에 밀려드는 행복.

행복 참 별거 아니었다.

***

늦은 저녁.

집에서 짧게 휴식을 취한 뒤 작업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장현웅이었다.

“너 뭐해?”

“어? 아, 작업 좀 하려고.”

녀석은 한창 웹툰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푹 쉬고 내일 하지.”

“그게, 너무 설레서... 내 평생 이런 경험을 또 하겠어?”

부커상 수상.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만남까지.

이번 여행을 통해 겪은 에피소드가 특별히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스토리상 지금 당장은 못 쓰겠지만 그래도 구성 좀 잡아 놓으면 좋을 거 같아서.”

“그래도 쉬엄쉬엄해. 그러다가 탈 나도 휴재나 연중은 안 해줄 거니까.”

“참나, 그러는 너는 왜 왔냐?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그야...”

나도 할 말은 없었다.

기뻐서 스스로 하는 일.

내가 추구하는 삶이었으니까.

어쩐지 오늘은 글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그쯤하고, 한잔할까?”

“한 잔? 좋지.”

장현웅이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앉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끼리는 축하주 한 잔 못했네.”

“워낙 정신없는 일정이었잖아.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난 더 바랄 게 없다.”

녀석의 얼굴에서 찐 행복이 떠오른다.

“고생했다.”

“너도.”

우리는 편안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기분 좋게 향을 음미하던 장현웅이 슬며시 입을 연다.

“참, 너 다음은 뭐 할 거야?”

“응?”

“궁금해서. 지난번엔 소설, 이번엔 동화였잖아. 다음엔 또 어떤 기가 막힐 일을 준비하나 싶어서.”

촉이 좋은 녀석이었다.

물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쓰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하지.”

“뭔데?”

장현웅의 눈빛에서 기대감이 읽힌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SF소설.”

“...뭐, 뭐?”

내 대답에 커지는 녀석의 눈.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뜻이었다.

“들었으면서 왜 되물어?”

“아니 그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정말로 SF를 쓰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커상 수상자가... SF 소설을?”

“왜?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누누이 말하지만 장르는 기호의 차이지, 수준의 차이가 아니거든.”

“그거야 알지. 하지만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문제지...”

“그럼 그 생각을 바꾸면 되지.”

“...뭐?”

나는 설명 대신 와인 잔을 기울였다.

당황해하는 장현웅과 달리 내 생각은 확고했다.

지금 내 시도는 순문학과 선민사상에 찌든 한국 문학계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문학을 고급과 저급으로 나뉘는 편협한 기준은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자유로운 시도 자체를 억압할 수밖에 없으니까.

부커상 수상에 들뜬 한국 문학계.

그러나 그 허울 좋은 편견들을 깨부숴야 할 적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래.

이제 한국을 불편하게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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