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87화 (187/203)

187. informal - 비격식적인, 허물없는 (6)

187.

***

한 시간 전.

노퍽주에 위치한 샌드링엄 하우스

엘리자베스 여왕의 오랜 습관은 바로 기념일과 개인적인 행사를 이곳에서 가족들과 보낸다는 점이었다.

지난해 한차례 입원한 뒤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대외 활동을 대폭 축소한 상태. 그 이후로는 줄곧 이곳에서 어린 손자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저택이 오랜만에 분주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특별한 손님의 방문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차 한 잔을 마시며 정원을 내려다본다.

‘벌써 70년이 되었군.’

여왕은 지난여름에 있었던 여왕 재위 70주년 행사를 떠올린다.

수십 대의 전투기가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고,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여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여왕과 왕세자, 왕세손 등 왕실 가족들이 나와 군중들에게 손을 흔든다.

1953년 대관식과 함께 생긴 전통.

무려 70년째 이어오는 행사였다.

세계 각국 정상들이 축전을 보냈고, 수많은 예술가들과 국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래.

영국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온몸에 받는 존재.

그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긴 세월 동안 함께한 무수히 많은 기쁨.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기쁨보다는 슬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잊히지 않는 슬픔이 있었다.

바로 왕세자비의 죽음.

남은 삶이 많지 않았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아픔은 가시처럼 남아 여왕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기억은 바로 손자인 조지 왕세손의 방황이었다.

‘이번에도 조지는 오지 않겠지...’

몇 달 뒤에 있을 크리스마스 행사.

크리스마스 당일.

왕실 식구들과 함께 이곳 샌드링엄 하우스를 시작해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에 미사를 드리러 가는 건 왕실의 오랜 전통이었다.

해군을 졸업한 이후 왕세손인 조지는 단 한 번도 왕실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왕실 권위까지 포기한 채 할머니인 자신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갔다.

워낙 오랜 세월 동안의 방황이기에 언론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행보.

그러나 여왕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하아, 모든 것이 내 업보인 것을...’

그나마 희망은 얼마 전 버킹엄 궁전에서 봤던 조지의 모습이었다.

‘조지가 제 발로 버킹엄 궁전을 다시 찾을 줄은 몰랐으니까...’

모든 건 한 사람을 만난 직후에 생긴 변화였다.

권서준 작가.

엘리자베스 여왕도 잘 알고 있는 작가였다.

베네딕트의 연극 공연을 보러 갔다가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측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지가 권 작가의 낭독회뿐만 아니라 사인회까지 찾아갔다고 했지.’

그 뒤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버킹엄 궁전을 찾은 것도 그렇고.

궁금했다.

대체 그 작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공식으로 치러지는 오늘의 만찬.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

샌드링엄 하우스 (Sandringham House).

영국 노퍽 카운티에 있는 저택으로 런던에서 출발해 차로 1시간 정도 되는 곳에 있었다.

1863년부터 4대에 걸쳐 왕실 영지로 사용되는 곳이며 여왕이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는 곳으로 알려진 곳.

20,000 에이커가 넘는 대지.

푸른 잔디와 탁 트인 풍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고층 건물로 가득 찬 서울에서 느끼기 힘든 개방감. 입구를 지나 커다란 나무숲을 지나 한참을 들어갔다.

그 안에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구나.’

영국 여왕의 거처 중 한 곳이었다.

내가 이곳에 초대됐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후원해주는 몇몇 귀족들 덕에 왕실 영지를 방문했던 기억들.

시골 출신의 작가에게 그 보다 더한 영광은 없었다.

문득 전생과 묘하게 이어지는 현생의 흐름에 생각이 깊어진다.

분명 그때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시 영국 여왕과 다시 한번 맞닿아 있었다.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구나...’

나는 들뜨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차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자 베네딕트가 따라 내린다.

“TV 속에서 많이 보긴 했는데, 이렇게 초대된 건 처음이네요.”

베네딕트 역시 평소보다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대영제국 훈장을 받을 때 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대영제국 훈장.

영국을 위해 중요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 받는 훈장이었다.

베네딕트는 그중 3등급 훈장인 대영 황실 훈위(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받았다.

연기자로서 그의 예술 공로를 인정받은 것.

“아, 그렇기는 한데...”

무심코 대답하던 베네딕트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설마, 오늘 어떤 분을 만나는지 이미 알고 계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곳이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여왕의 사유지라는 점이니까요.”

내 말에 베네딕트가 입을 떡 벌린다.

그리고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하아, 역시 작가님을 속일 수는 없네요. 이럴 거면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해가 되니까요.”

내 배려에 베네딕트가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잠시 뒤, 배웅 나온 집사의 안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실내 규모.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가구들.

몇몇 건축가들은 이곳의 스타일을 두고 정신없다, 음침하다,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혹평을 내뱉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시설과 달리 영국 여왕의 가장 사랑하는 장소라는 점에선 변화가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곧 나오십니다.”

남자의 말에 우리는 기다렸다.

잠시 뒤.

남자의 말대로 백발의 노인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자그마한 체구.

그러나 그녀가 입은 진한 핑크빛 투피스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려줬다.

나는 그녀를 향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작가님.”

그녀의 목소리엔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

저녁 식사 전.

나는 그녀와 긴 독대 시간을 가졌다.

한 세기를 살아온 한 여인의 삶부터, 여왕으로서의 삶까지.

한 인간의 고뇌와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치, 햄릿을 실제로 본 느낌.

나는 솔직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여왕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서 가엾이 여겼는데, 살고 보니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더군요. 인간이란 어쩜 이렇게 모순적인지...”

회한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그게 삶인 거겠죠. 신은 결코 우리 생각대로 살 수 없게 상황을 만들어가니까요.”

내 말에 여왕이 미소를 짓는다.

“화려한 말보다 그 담담한 한 마디가 더 와 닿는군요. 역시 부커상 수상자다워요.”

여왕은 어둠이 깔린 정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상징적인 의미만이 남은 왕족이지만 나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영국과 인류를 위해, 그리고 예술을 위해.”

백 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왕의 눈빛은 맑았으며 목소리 역시 깨끗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70여 년을 한 나라의 정상으로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 나라의 정상으로 사는 것보다 한 사람의 어머니로, 할머니로 산다는 게 더 어렵다는 점이죠.”

말 안에 의도가 느껴진다.

차 한 모금을 마신 여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조지를 만났다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었어요. 그 아이가 권 작가를 만나기 위해 수행원도 없이 낭독회에 갈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여왕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지의 방황은 나에게 크나큰 아픔이었어요. 되돌릴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는 아픔. 그런데, 작가님의 책이 그 아이에게 큰 위로가 되었나 보네요.”

조금 전과 달리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였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인생에서 겪는 슬픔.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아픔이었기에 나는 진심을 담아 답했다.

“위로가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다만 책은 기회가 될 뿐이에요.”

“기회요?”

되묻는 여왕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책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죠. 그 상처에 대한 위로를 건네면서 동시에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니까요. 하지만 삶의 변화는 책이 아닌 선택에서 나오는 거죠.”

“그 말뜻은 이후의 삶이 조지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물론 여왕님도요.”

“...”

내 말에 여왕의 눈빛이 깊어진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오전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다녀왔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무덤을 봤는데, 거기에 있던 비문이 마음에 와닿더군요.”

나는 창밖을 보며 묘비의 문구를 나직이 내뱉었다.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엘리자베스 여왕도 익히 알고 있는 문구였다.

“부활의 희망...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죠. 그 대신 신은 우리에게 다른 걸 주었습니다. 바로 언제든지 내 인생의 마지막을 바꿀 기회 말이에요.”

내 말에 순간 엘리자베스 여왕의 눈빛이 깊어진다.

“...”

자연스럽게 흐르는 적막.

누구보다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일까, 고뇌의 깊이가 남들과 달랐다.

여왕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소설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네요. 행복한 순간은 고작 몇 페이지 되지 않고요. 우린 그런 짧은 엔딩을 위해 그 긴 책을 읽는 거고요...”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엔딩을 바꾸면 모든 고난과 슬픔은 그 엔딩을 위한 과정이 되고, 복선이 되죠. 그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고요.”

나는 담담히 전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다.

“...”

나를 바라보던 여왕의 눈가 주름이 한결 옅어진다.

내면에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귀한 깨달음을 얻었네요.”

여왕이 따스한 미소로 진심을 건넨다.

“가만, 이렇게 귀한 시간을 선물 받았는데 내가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여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갚으셨습니다. 다른 분이.”

“...네?”

여왕이 되물으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가만히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

나는 만찬이 준비되는 동안 잠시 정원을 산책했다.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서늘해진 밤공기가 오히려 상쾌함을 더했다.

나는 차분히 걸음을 옮기며 여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엔딩을 바꾼다라...’

그 말은 여왕뿐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바꾸지 못한 엔딩에 좌절했던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이번 삶은 달라야지.’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공기 때문에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나는 한 사람을 떠오른다.

‘이 정도면 조금이나마 갚았을까요?’

반짝이는 별빛의 온도만큼이나 가슴이 따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작가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나를 찾으러 나온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베네딕트와 함께 안으로 향했다.

어느새 화려하게 준비된 만찬.

기다리고 있던 여왕이 식사에 앞서 특별히 내게 건배사를 요청한다.

“아름답고 뜻깊은 이 밤, 작가님이 마지막을 장식해주면 감사하겠네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나는 잔을 들며 나직이 외쳤다.

“The Queen(여왕 폐하를 위하여).”

잠시 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잔을 들며 외쳤다.

“The Queen!”

띠링.

잔 부딪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진다.

그 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밤이었다.

***

만찬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기분 좋게 마신 와인에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쯤 우리는 샌드링엄 하우스를 나섰다.

차에 올라타자 베네딕트가 나에게 뭔가를 내민다.

“작가님, 여기요. 여왕님이 부탁하신 선물입니다.”

작은 바구니였다.

“이건, 햄퍼(Hamper)군요?"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에 주는 선물용 식품 바구니였다.

“네, 직접 고르셨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가만히 바구니 안을 살폈다.

안엔 노퍽주에서 유명한 푸딩과 파이가 담겨 있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딱 봐도 보통 맛이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내 눈길을 끈 건 푸딩 사이에 놓인 메모였다.

[진실한 벗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네요. 당신에게도 영국에서의 시간이 의미 있길 바라봅니다.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여왕은 손자보다 어린 나를 벗이라 불러주었다.

그 소탈하고 허물없는 모습에 나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잘 해결되겠군.’

더욱이 마지막에 달린 추신이 내 마음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언젠가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줘요.]

여왕에게 얻은 일종의 소원권.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 어느 드라이브보다 기쁘고 뿌듯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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