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82화 (182/203)

182. informal - 비격식적인, 허물없는 (1)

182.

***

이미 분위기는 나에게 넘어온 상태.

나는 한국 전통문화인 장독과 장독대에 대해 계속해서 강연을 진행했다.

단순히 음식과 장을 담는 용도의 그릇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 항아리.

나는 발효와 숙성, 그리고 다채로운 장독의 매력을 통해 문학이 담아야 할 타문화와 타민족의 다양성, 그리고 창조적 활동에 대해 강연을 이어갔다.

“여러분이 속한 왕립예술학회의 창립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기업 강화, 과학 확대, 예술 및 제조업을 개선하고, 상업 확장뿐 아니라 빈곤 완화 및 완전 고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사명이다.”

오늘 참석한 대부분이 왕립예술학회 회원이라는 점을 노린 발언.

“왕립예술학회의 창립 헌장처럼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실질적인 빈곤 완화에 도움을 주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정서적인 빈곤은 오히려 극대화되는 상황이죠. 이념 갈등, 빈부격차, 남녀노소를 가르는 편협한 이기주의. 우리는 이제 국가와 민족을 떠나 인류 공통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시선으로 환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바로 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요.”

발언을 듣던 참석자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문학이 그 존재 이유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결국 예술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글도, 여러분들이 속하신 왕립예술학회 역시 마찬가지겠죠.”

이제는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전 제 글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그대로 드러내려 합니다. 그게 작가인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죠. 장독처럼 오래 품고, 오래 숙성시켜 가장 맛있게 꺼내는 것. 그게 바로 제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이니까요.”

힘을 준 마무리 멘트.

강연장엔 이내 적막이 흐른다.

낯선 장독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민족과 국가의 다양성을 담아내야 할 문학의 틀에 대해 설명했다.

팔짱을 낀 사람.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긴 사람.

대부분 내 강연의 주제에 대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짝짝짝.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먼저 손뼉을 친다.

환한 얼굴로 손뼉을 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 왕립예술학회 부학회장인 마크였다.

그리고 잠시 뒤, 나머지 참석자들의 박수가 더해진다.

이전 강연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박수.

모두가 나에게 주목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바로 매튜 저먼 이사장.

그는 내가 박수를 받는 사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더없이 창백한 얼굴로.

***

“나이스 권서준!”

강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장현웅이 신난 얼굴로 달려온다.

“아까 그 딴죽 건 사람 표정 봤어? 아주 똥 씹은 표정이던데?”

장현웅은 직접 표정 흉내까지 내며 신나 했다. 나는 그런 장현웅에게 넌지시 말해줬다.

“근데, 현웅아. 그거 알아? 아까 그 사람이 바로 부커 재단의 매튜 저먼 이사장이야.”

“...부커상? 설마, 그 부커상?”

세상에 또 다른 부커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자 장현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오른다.

“헐, 그럼 괜찮은 거야? 작품 수상에 영향이 있는 건 아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오늘 같은 일이 없었다면 오히려 그럴 수 있지.”

내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녀석이 이내 눈을 크게 뜬다.

“설마... 너 그래서 올리버 편집장님이 그렇게 반대하셨는데도 일부러 이 강연회에 참석한 거야? 저 사람이 수작 못 부리게, 대놓고 발라주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못하게 충분히 불편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장현웅이 입을 떡 벌어진다.

“하, 하아. 진짜 무서운 놈. 어마무시한 놈. 적으로 절대 삼고 싶지 않은 놈...”

“너무 극찬인데?”

“하, 참나.”

녀석이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근데 생각할수록 너무 통쾌하다. 감히 누구한테 시비를 걸어?”

장현웅이 통쾌한 듯 미소를 짓는다.

물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

이후 작은 연회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는 과학, 예술 분야를 넘어 다양한 전문가들과 세계 문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뒤, 세 사람이 다가온다.

아까 강연장에서 처음으로 손뼉을 쳤던 마크 부학회장과 일본 작가 두 명이었다.

“작가님, 오늘 강연 훌륭했습니다. 문학의 본토, 셰익스피어의 나라에서 이 정도로 임팩트 있는 문학 설명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먼저 마크 부학회장이 인사를 건넨다.

뒤이어 가늘 게 콧수염을 기른 일본 작가가 말을 잇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예술 쪽 견해도 깊으시네요. 작가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한국 문학에 대해서도 새삼 관심이 가고요.”

“저는 이미 작가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마치 셰익스피어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또 다른 작가가 셰익스피어를 빗대어 칭찬을 건넨다.

“...”

그러자 순간 마크 부학회장의 표정이 묘하게 굳는다.

마크 부학회장의 표정 변화를 읽은 콧수염 회원이 동료 회원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이 사람아, 그건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결례 아닌가. 작가님 부담스럽게 왜 그런 말을 하나?”

“아니 그 정도로 감동적인 책이라는 뜻이지. 뭘 그렇게 곡해해서 듣나?”

듣고 있던 마크 부학회장이 끼어든다.

“부담될 수 있죠. 그만큼 영국인에게 셰익스피어는 자랑 그 자체니까요. 오죽하면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철학자도 있을까요.”

마크 부학회장의 표정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면전에서 내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좀 묘하다.

잠시 뒤,

마크 부학회장이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이정도 강연이라면 자격은 충분한 거 같네요. 저희 왕립예술학회의 회원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학회장이 건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예상하는 세 사람의 눈빛이 나를 향한다.

그러나 내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 조금 달랐다.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마크 부학회장의 표정이 순간 멍해진다.

“...네?”

“작가님...”

나머지 두 회원 역시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찰칵찰칵.

그 순간 카메라 셔터가 터진다.

특종 냄새를 맡은 기자들의 카메라였다.

***

나는 마크 부학회장과의 대화를 끝으로 축하연 자리를 빠져나왔다.

조금 전의 대화 내용을 들은 장현웅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준아, 대체 왜 거절한 거야? 왕립예술학회 회원이면 굉장한 기회 아니야?”

장현웅의 말대로였다.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회자될 정도로 모든 예술인이 탐내는 명예직이었다.

“물론 그렇지. 다만, 내가 원하는 자리는 아니야.”

“네가 생각 없이 그럴 리는 없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장현웅이 표정엔 궁금함이 가득했다.

나는 궁금한 건 못 참는 녀석을 위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도 좀 전에 들었잖아. 마크 부학회장이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던 말.”

“응. 그거 유명한 말이잖아.”

“근데 생각을 해봐. 어떻게 인도와 한 사람을 견주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어?”

순간 장현웅의 표정이 멍해진다.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훌륭하다고 한들 어떻게 한 나라와 비교가 되겠어. 그 말 자체에서 편협한 서구 중심의 사고가 있음을 알 수 있지. 누구랑 비슷하지 않아?”

그제야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아, 아까 그 매튜 이사장이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회원도, 부학회장도 겉으로는 다른척 하지만 깊숙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결이 같아. 그런 의미에서 사양한 거야. 내가 먼저 회원을 원한 적도 없고, 그런 왜곡된 잣대를 가진 곳이라면 나와는 갈 길이 다르니까.”

“아... 그렇구나... 자, 잠깐만.”

고개를 끄덕이던 장현웅이 갑자기 수첩을 꺼낸다.

“뭐해?”

“어? 아, 잊기 전에 메모 좀 하려고. 너무 멋있는 말이잖아.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훌륭하다고 한들 어떻게 한 나라와...”

녀석은 내 말을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녀석이 메모할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줬다.

‘아마 후에 언제고 웹툰에서 다룰 귀한 에피소드가 될 테니까.’

나는 장현웅이 메모를 하는 사이 케임브리지 대학 안에 위치한 여러 칼리지를 바라봤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눈에 익는 곳도 존재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진리의 상아탑.

수많은 인재를 잉태한 학문의 보고.

이곳이 존재가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엘리자베스 2세의 후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왕의 후원은 참으로 중요하지.’

따지고 보면 그 시절 나의 삶을 지탱해준 것도 여왕의 후원이었다.

질병과 가난.

게다가 청교도의 박해까지 받는 연극계를 살린 건 여왕의 후원과 관심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고마움을 갚기도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3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못내 마음에 남는 일.

‘언젠가 그 은혜를 갚을 날이 있길 바랐는데...’

문득 떠오른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추억.

수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 마음의 짐이었다.

***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

VIP석엔 분홍색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노인이 저녁 공연을 열심히 관람하고 있었다.

노인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 여왕.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수행원들과 함께 한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연극의 제목은 「거장의 숨결」.

영국이 낳은 가슴 아픈 천재 크리스토퍼 말로의 인생을 각색한 연극이었다.

무대 위에선 열띤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훌륭해...’

손자 조지의 친한 벗인 베네딕트의 작품이라 해서 찾아왔는데 내용이 훌륭했다.

아니 훌륭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예술이었다.

‘한평생 본 연극이 수도 없이 많거늘, 이렇게 가슴을 두드리는 공연은 처음이야...’

곧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녀의 가슴엔 묘한 울림이 일었다.

‘듣기로는 한국 작가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 시절의 느낌을 이렇게 잘 아는 걸까?’

자연스럽게 한 여자의 삶이 떠오른다.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여왕의 일대기.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왕으로 당시 유럽의 변방 국가였던 영국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올려놓은 여왕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업적에 비해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언니인 메리 여왕에게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뻔하기도 하고, 런던탑에 갇혀 오랜 시간 동안 감금당하기도 했다.

메리 여왕이 죽고 난 뒤에야 여왕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이후 의회와 신하들 앞에서 영국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며 한평생을 영국 부흥을 위해 힘썼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기도 하면서 영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

그 모든 일을 감당한 45년.

결코 쉽지 않은 지도자의 삶이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녀의 삶을 위로해 준 건 다름 아닌 셰익스피어였지.’

음악을 사랑한 그녀는 관현악단을 궁정에 두고, 틈날 때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감상했다.

‘그 시절 그분의 심정이 이랬을까...’

베네딕트의 연극을 관람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같은 이름.

그러나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두 명의 여왕.

상황은 달랐지만 마음은 통했다.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정치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나라는 어수선했다.

게다가 방황하는 손자의 모습은 더욱 그녀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조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자였기에 특히 마음이 쓰였다.

“그래, 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학회장 일은 잘하고 있고?”

여왕은 애칭을 부르며 조지의 근황을 물었다.

“그게...”

수행원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조지의 근황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이 든 여왕의 입에서 또 다시 한숨이 흘러나온다.

‘누굴 탓할까... 모든 게 내 업보인 것을...’

먼 곳에서도 국민들이 잘 볼 수 있게 핑크 옷을 즐겨 입는 여왕의 얼굴은 옷 색깔과 달리 어둡기만 했다.

잠시 뒤 막이 오르고 공연이 끝난다.

여왕은 주름진 손으로 힘없이 박수를 보낸다.

***

늦은 밤.

부커 재단 이사장실.

매튜 이사장은 이를 악문 채 생각에 잠겨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왕립예술학회 회원들이 가득 모인 자리.

그곳에서 당한 수모는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권서준의 작가 자질을 탓하려던 계획은 완벽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상상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매튜 이사장은 애써 마음을 다독인다.

“아니야. 그래봤자 고작 찻잔 속 폭풍일 뿐이야...”

왕립예술학회 회원이 되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부커상 선정까지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으로 링크하나가 도착한다.

“이건 또 뭐야?”

왕립예술학회 동료 회원이 보낸 기사 링크.

매튜 이사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링크 기사를 확인한다.

[권서준 작가, 영국 왕립예술학회 제안 거절하다.]

[편협한 잣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글을 쓰고 싶어...]

기사 제목을 확인한 매튜 이사장의 눈이 커진다.

“뭐, 뭐? 왕립예술학회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혀 예상 못한 소식이었다.

그날 밤.

권서준 작가의 거절 관련 기사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매튜 이사장의 예상과 달리 찻잔을 벗어난 태풍의 위력은 훨씬 더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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