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uncomfortable - 불편한 (6)
180.
***
“저기다!”
기자 한 명이 우리를 알아보고 외치자 동시에 나머지 무리가 몰려든다.
“어? 어?”
당황한 장현웅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거대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손쓸 새도 없이 우리를 둘러싼다.
“작가님! 인터뷰 좀 해주세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여기 보고 웃어주세요!”
“거장의 숨결 흥행에 대해서도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요청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
그때,
“작가님! 이쪽입니다!”
소란스러운 기자들의 목소리를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보며 다급히 손을 흔드는 남자.
피어슨 출판사의 올리버 편집장이었다.
***
우리는 제때 나와 준 올리버 편집장 덕에 무사히 입국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와, 덕분에 살았네요. 입국장에서 편집장님 얼굴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하마터면 울 뻔했다니까요.”
장현웅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에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네요. 우리가 입국하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장현웅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게 한국에서 말하는 인싸의 삶 아닌가요?”
올리버 편집장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영어 가운데 ‘인싸’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뭔가 놀라웠다.
“어? 편집장님 그런 말도 아세요?”
“네, 권 작가님 덕에 요즘 한국에 관심을 두고 있거든요. 물론 저뿐만이 아니고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자연스럽게 조금 전 상황이 떠오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예상 밖이네요. 이 정도로 제 근황에 관심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요.”
“요즘 작가님 기사가 연일 쏟아지는 중입니다. 사실 부커상 최종 후보도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베네딕트의 연극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요.”
하긴 대중들의 입장에선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것보다 그쪽이 훨씬 임팩트가 있었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꽤나 많을 테고.
“참, 내일이시죠?”
올리버 편집장이 룸미러로 나를 보며 묻는다.
왕립예술학회 초청 강연 일정에 대해 묻는 질문.
“네. 맞습니다. 오후 2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올리버 편집장의 눈빛이 다소 불안해 보였다.
앞뒤가 다 잘린 말이었지만 무슨 의도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대답에 올리버 편집장이 씁쓸하게 웃더니 이내 표정을 정리한다.
“다른 분도 아니고 권 작가님의 말씀이니 믿어야죠. 참, 차량은 저희 쪽에서 지원해드릴 테니까 염려 마세요.”
올리버 편집장의 꼼꼼한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오늘 픽업도 그렇고, 매번 신세를 지게 되네요.”
“신세라뇨. 서로 윈윈하는 거죠. 작가님이 부커상을 수상하시면 저희 쪽에서도 엄청난 매출 증대를 노려볼 수 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를 벗어난 사이였다.
‘비즈니스를 위해서 이 정도까지 신경 써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매튜 이사장의 계획을 바로 알려준 것도 그렇고.’
서로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내가 원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깨지지 않는 신뢰였다.
‘그래서 이번 강연에서도 실수가 없어야 하고.’
믿고 기다려주는 올리버 편집장을 위해서 납득할만한 결과를 보여줘야 했다.
물론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위해 보여줘야 할 또 다른 결과물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제가 선물 하나를 드리죠.”
“선물이요?”
내가 사인을 보내자 장현웅이 가방에서 미리 챙겨온 파일을 꺼낸다.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한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올리버 편집장이 서둘러 파일 안을 들여다본다.
“이건... 원고 아닌가요?”
내용물을 확인한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네, 편집장님께 직접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삽화가 들어간 그림 동화.
바로 하반기에 출판될 내 차기작이었다.
***
권서준 일행을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올리버 편집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무슨 생각이실까...’
매튜 이사장의 꿍꿍이를 알면서도 정면 승부를 하는 권서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다 이내 옆자리에 내려놓은 원고로 시선이 간다.
권서준의 차기작이라고 해서 뒤도 보지 않고 계약한 그림 동화.
솔직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지만 사실 동화만큼 어려운 장르도 없으니까.’
전체적인 내용 파악이 쉬워야 했으며 동시에 주제 의식 역시 강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령대에 맞는 단어와 표현까지 적절히 사용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했다.
‘애초에 주 독자층의 연령대를 고려하지 않으면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없어.’
게다가 권서준 작가의 이번 작품은 번역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언어 실력을 갖췄어도 해당 언어를 타 언어권 아이들에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으니까.’
원작자의 의도와 문학성을 전혀 훼손하지 않은 채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자국에선 인기를 끈 원작들도 수없이 사라져가곤 했지.’
생각할수록 걱정되는 요소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선다.
언제나 그렇듯 권서준의 작품 앞에 서면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린다.
‘하긴, 만일 걱정이 더 컸다면 애초에 계약하지도 않았겠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올리버 편집장은 미소 띤 얼굴로 첫 페이지를 넘긴다.
파일이 아닌 손에 닿는 종이 감촉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잠시 뒤...
올리버 편집장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온다.
“...하, 하... 엄청나군.”
동화라고 해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동화야. 게다가 이 신비한 그림체는 뭐지?’
유럽에서 결코 경험하지 못할 신비로운 그림체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신비로운 그림체의 결합. 마치 환상 속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매직이야. 그래, 매직. 권서준 매직...’
한 번 떠오른 감동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올리버 편집장은 들뜬 마음을 애써 삭히며 다급히 출판 일정을 확인한다.
와이즈 출판사에 보내온 예상 출판 일정은 올해 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시점이었다.
‘이거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나오겠어.’
아이들의 꿈과 희망.
아니, 어른들의 상처마저 보듬어줄 아주 따스한 선물이었다.
***
헐리웃 스튜디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은 영국에서 온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권서준 작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그 아래로 공항에서 찍힌 권서준의 사진이 보인다.
‘대단하군.’
한국에선 베스트셀러 작가로, 영국에선 부커상 후보로, 미국에선 올란 감독 본인이 찍은 영화의 대본 작가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도 힘든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권서준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은 채 전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고작 서른을 바라보는 젊은 작가의 행보.
분야는 다르지만 또 다른 창작자의 열정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나도 뭔가 보여줘야 해.’
올란 감독은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한참 후반 작업 중인 작품의 진행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제 절반 정도 완성됐어.’
영화제작은 일반적으로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인 사전 준비.
2단계는 제작 단계.
3단계는 후반 작업.
세분화시켜 5단계로 구분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큰 틀에서 보면 3단계가 가장 선명한 구분이었다.
과거엔 시나리오 준비와 실제 촬영 작업이 포함된 1,2 단계의 중요도가 높았다면, 최근엔 최첨단 디지털 편집 기술이 도입되면서 후반 작업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잘 찍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제목 : 레이디 햄릿.
특수 효과의 비중이 높은 장르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에 따른 빛의 움직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표현하는 오묘한 색감 등은 필수적으로 다양한 편집 기법이 필요했다.
‘특히 윤서원의 불안한 심리를 보여주기 위한 상상력 씬은 고난도 CG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CG 작업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올란 감독이었지만 얼굴에 떠오른 건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모든 건 바로 얼마 전 발행된 영화 칼럼 때문이었다.
칼럼 기고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인 지미 스미스.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의 칼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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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올란식 유니버스의 한계]
한 때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감독이 있었다. 그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들을 뒤집고, 변주를 주면서 충격적인 세상을 보여주곤 했다. 혼돈과 쾌락, 파괴와 일탈은 오히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었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이다. 최근의 올란 감독의 영화 속에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던 독창성도, 즐거운 게임을 벌이던 긴장감도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을 뒤집어버렸던 천재의 혼이 사라진 곳엔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와 공허함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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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 아니라 악플에 가까운 수준.
그러나 올란 감독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악플은 아니지. 틀린 말이 하나 없으니까...’
연이은 흥행 실패에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지미 스미스의 말대로 복잡한 플롯과 과도한 상징성을 담았지만 모두 공허한 노력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조급했던 마음은 권서준의 대본을 보는 순간 달라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창작에 대한 열망도 이젠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똑바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이젠 보여줘야 할 때였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다시 재기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무조건 성공해야 해.’
헐리웃 유명 감독인 크리스토퍼 올란.
그러나 그조차도 이번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늦은 오후.
버킹엄 궁전이 보이는 버킹엄 팰리스 가든.
선글라스를 낀 조지 아서 찰스 왕세자는 굳이 외진 곳에 위치한 벤치를 찾아 앉는다.
지이잉.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한다.
[내일 오후 2시에 왕립예술학회 초청 강연 행사가 있습니다.]
학회장으로서 받아야 할 당연한 보고.
초청된 인사들 모두 왕립예술학회 회원으로 추천된 상태이기에 더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메시지를 확인한 조지 학회장은 지친 얼굴로 그대로 삭제해버린다.
‘귀찮아...’
그대로 공원 벤치에 누워 멍하니 버킹엄 궁전을 바라본다.
여왕이 사는 거처이자 국빈을 맞이하는 공식적인 장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조지 학회장에겐 상처와도 같은 곳이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니까...’
왕족으로 태어나 날 때부터 많은 것을 누렸지만 삶은 공허했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특히 그랬다.
어머니의 관을 따라 걸을 때도 왕실 어른들의 명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였다.
눈물을 참으며, 울지 않기 위해 손등을 꼬집던 게 고작 9살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조지의 삶은 달라졌다.
대마초를 즐기고 파티장을 기웃거렸으며, 자타공인 왕실의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그나마 그 환란의 시절을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 바로 베네딕트였지.’
어긋날 때마다 적절한 조언을 해주며 친형보다 더 가족같이 자신을 챙겨주던 벗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술을 산다고?’
친구 베네딕트에게서 받은 책을 바라봤다.
갑자기 웬 책일까 싶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책을 권한 적이 없는 친구의 부탁이기에 마지못해 책장을 펼친다.
처음엔 그저 무료하게 책을 바라본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작가는 한국 사람이었다.
등장인물 역시 영국식 이름이 아니었다.
생소한 이름과 지명.
배경까지 하나같이 낯선 것 투성이었다.
“...”
그런데,
어느새 책장이 넘어간다.
뒤이어 다음 장, 다음 장으로 그의 시선이 이어진다.
그리고 점점 그 안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바로 권서준이 창조한 놀라운 세상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