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8화 (178/203)

178. uncomfortable - 불편한 (4)

178.

***

영국 왕립예술학회.

곱실거리는 금발의 백인 남성이 무료한 시선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조지 아서 찰스.

올해 마흔 살로 영국 왕실 계승 서열 6위이자 현 왕립예술학회 학회장을 겸하고 있는 왕손 중 하나였다.

조지는 신규 회원 요청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 사람은 누구죠?”

“아, 한국의 작가인데 이번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이 부커상에요? 부커 인터내셔널이 아니고요?”

“네. 맞습니다.”

“흠. 그렇군요.”

잠시 떠올랐던 호기심이 이내 사라진다.

다시 무료한 시선을 장착한 조지는 자연스럽게 술병을 집어 든다.

퇴근도 아니고, 엄연히 집무 중인 상황. 보고하던 임원이 다급히 입을 연다.

“저, 학회장님...”

“학회장은 무슨, 그냥 예전처럼 찰리라고 불러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임원이 결국 마지못해 호칭을 바꾼다.

“찰리... 술을 좀 줄이시는 게 어떨까요?”

“아, 술이요? 이게 없으면 약을 하게 될 거 같은데요?”

약은 당연히 마약을 의미했다.

화들짝 놀란 임원이 서둘러 주변을 살핀다.

“야, 약이라니요. 찰리,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뭐 들으라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더 불행해질 것도 없고.”

지친 목소리의 조지는 반쯤 채운 위스키를 단번에 비워낸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요즘, 베네딕트는 안 만나시는 겁니까?”

“아, 그 친구가 요즘 바빠서요.”

유일한 벗인 베네딕트.

최근 작품 활동으로 바쁜 탓에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참, 신규 회원 선정은 알아서 정하세요. 나야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조지는 다시 위스키 잔을 채우며 책상에 두 다리를 올린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

그러나 그 모든 걸 누리는 사내의 표정은 한없이 무료하고, 우울하고, 슬퍼 보였다.

임원은 그런 조지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누구보다 그의 아픔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영국인이라면 그의 아픔을 모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왕세자비.

어머니를 잃은 조지의 나이는 고작 9살 때였다.

‘그때 이후로 비뚤어지기 시작했지.’

임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조지를 바라본다.

그 사이, 조지는 또 한잔을 비워내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하아...”

술기운이 담긴 뜨거운 입김이 조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조지의 슬픔.

그건 독한 술도 마찬가지였다.

***

뮤지컬 「거장의 숨결」 마지막 공연.

배우 조현성이 뮤지컬의 시작을 열었다면 마무리는 방수찬의 몫이었다.

“한스럽구나. 그토록 칭송하던 나의 글이 결국 끔찍한 저주였던 것을 이제야 알았구나. 그래, 너희의 오만을 참을 수 없는 천재는 오늘 기어코 당신들의 손에 의해 죽을 것이다!”

방수찬의 물오른 연기.

몇 달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절규 섞인 그의 외침에 관객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무대에 집중했다.

잠시 뒤,

암전이 찾아오고 막이 내린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무대 위에 침묵이 흐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안에서 먹먹한 감동이 뒤늦게 밀물처럼 밀려든다.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채우는 감동.

한발 늦게 찾아온 감동에 사람들이 몸서리를 친다.

그리고 이내 한 마음이 된 것처럼 관객들의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무대 위로 쏟아진다.

“와아아!”

뒤이어 연주 소리마저 묻힐 정도의 엄청난 함성이 무대를 채운다.

그렇게 화려한 무대가 막을 내린다.

1년 가까이 진행된 공연의 피날레.

분명 저 안엔 몇 번이나 이 공연을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다르게 찾아오는 감동에 또다시 함성과 박수를 보낸다.

라이브 공연만이 줄 수 있는 다채로운 감동.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멋지군.’

평소보다 다소 격해지는 감정.

나 역시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내 마음을 실어 보냈다.

***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방수찬의 대기실을 찾았다.

예전과 달리 조현성에 못지않게 많은 팬들과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방수찬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한다.

“이젠 허전하지 않네요.”

꽃과 선물.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 찬 대기실은 그때와 많이 달라진 상황을 보여줬다.

“다 작가님 덕분이죠. 지금도 꿈만 같아요.”

방수찬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내 작품이 세운 기록 역시 엄청났다.

전 공연 매진.

관객률 1위, 예매율 1위.

2위와의 차이가 압도적이라 당분간 기록을 깨기는 어려울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고맙습니다. 권 작가님. 이런 기회를 주셔서.”

“이제 시작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세요.”

살아있는 눈빛을 보니 든든했다.

잠시 뒤,

대기실 앞에서 두 주연 배우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뮤지컬계의 황태자인 조현성은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를 했다.

“무대 안팎에서 동료 선후배 배우들과 좋은 추억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거 같습니다. 특히 우리 수찬이한테 많은 자극을 받았고요.”

방수찬 역시 복도 한쪽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작품 덕에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권서준 작가님과 조현성 선배의 도움이 컸죠. 옆에서 보면서 연기에 대해 다시 한번 배울 수 있었고요.”

짧은 인터뷰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드러난다.

질투와 시기가 아닌 존중.

이번 공연을 통해 더욱 돈독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다행이군.’

앞으로 해외 순회공연을 담당할 두 사람이기에 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안심이 되는 모습이었다.

***

공연 후 나는 서미연 대표를 만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엄청나네요.”

내 말에 서 대표가 고개를 젓는다.

“저희보다 작가님이 더 대단하시죠. 소식 들었어요. 부커상 후보라니, 정말 대단하세요.”

“운이 좋았죠.”

내 말에 서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한결같으시네요.”

우리는 짧은 덕담을 주고받고 곧바로 해외 순회공연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하이든 에이전시와 함께 브로드웨이 쪽 일정은 잡혔어요. 내년 상반기로 예상하고 있고요.”

내가 차기작에 집중하는 사이 서 대표와 고용수 부장은 해외 순회공연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특별히 문제 삼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준비라 나는 대부분의 일정에 동의했다.

“우리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다니 믿기지 않네요.”

서 대표는 감격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면 작가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다 그랬어요. 처음 영국에서 작가님 대본을 봤을 때도 그랬고, 같이 연극을 하게 됐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서 대표의 눈빛이 감상에 젖는다.

“다 작가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대표님의 덕 많이 봤으니까.”

“에이, 저에 비하면 아니죠.”

서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대본이 이만큼 결과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서 대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때때로 내가 그린 세상보다 더 멋있는 경우도 많았고.

조현성과 그의 연기가 그랬다.

그 연기를 제대로 디렉팅하고 이끈 것도 서 대표님의 역량이었다.

물론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나서서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를 채운 건 서 대표님의 몫이었다.

‘나 혼자 그 모든 걸 감당하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하긴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를 키운 거고. 마치 그 친구처럼 말이야.’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리처드 버비지.

그 시절 내 작품의 동반자.

나는 또 한 명의 버비지를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서울에 위치한 호텔 로비.

모든 영화 촬영을 끝낸 정은미 피디는 권서준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작가님!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정 피디는 권서준을 보자마자 인사를 건넨다.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탓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올란 감독님은 후반 작업을 위해 며칠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셨어요. 저도 조만간 미국에 한 번 찾아갈 예정이고요. 올란 감독께서 편집도 같이 고민해보자고 하셨거든요.”

헐리웃의 유명 감독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정 피디의 기분이 좋았다.

그때,

권서준이 묻는다.

“참, 이번 공동 연출은 어떠셨나요?”

권서준이 묻자 정 피디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옆에서 많이 배웠죠. 다만 알면 알수록 더 어렵긴 해요. 특히 좋은 연기에 대한 부분이 더 고민되기도 하고요.”

정 피디는 찬물을 마시며 솔직한 고민을 꺼냈다.

“그동안 좋은 연기란 해석이 잘 된 연기라고 생각했어요. 배역에 대해 많이 파고들고, 그만큼 몰입하면 좋은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경민 배우님의 연기를 보면 뭔가 달랐거든요.”

“아마 작품을 위한 연기를 해서일 거예요.”

“작품을 위한, 연기요?”

“네.”

권서준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연다.

“처음 이경민 배우의 해석은 윤정호라는 캐릭터 하나에 국한되어 있었어요. 편집 예술이라는 걸 간과한 채 그저 과도한 해석을 밀어 넣어 오히려 윤정호에 대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거고요.”

정 피디는 권서준 작가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맞아. 캐릭터에 집중하는 배우와 달리 작품의 전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다르니까.’

긴 서사를 홀로 이끌어가는 연극배우와 컷 편집이라는 수많은 조각을 통해 긴 서사를 만들어가야 하는 감독의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배우의 연기는 작품을 위한 작은 조각에 불과해요. 물론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긴 하지만.”

물론 정 피디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연출점을 잡을 경우 배우 입장에선 그저 도구 취급받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정 피디의 질문에 순간 권서준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게 잘못된 건가요?”

“...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정 피디가 당황한 듯 바라본다.

그러나 권서준은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입을 연다.

“배우의 연기는 작품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연기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작품 속에서 모든 게 도구에 지나지 않죠. 제 대본도, 올란 감독의 연출도, 배우의 연기 역시 창조적 과제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니까요.”

“...”

“예술은 존엄성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한 노력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완성되는 거죠.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도 홀로 있을 땐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쾅.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연기, 대본, 연출.

각각의 독립된 영역이 아니었다.

모든 건 하나를 위해 존재해야 했고, 서로가 없다면 의미를 잃게 되는 의존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배우가 작품 속에서 하나의 조각으로 온전히 빛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감독의 역할이었다.

‘그게 바로 디렉팅이지...’

그 자존심 센 이경민 배우가 하루아침에 바뀐 것도 아마 권서준 작가의 디렉팅 때문이었다.

‘권 작가님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디렉팅을 적용하고 있었어...’

정 피디는 큰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크기가 큰 만큼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근데 대체 권 작가님을 저 나이에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계신 거지?’

볼수록 신기한 사람.

볼수록 배울 게 생기는 사람.

신비로우면서 불가사의한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권서준을 바라보는 정 피디의 마음속에 든든한 신뢰감이 피어난다.

그래.

그건 바로 존경심이었다.

***

정 피디와 헤어진 뒤 나는 집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고 강변대로에 올라가자 정 피디의 눈빛이 떠오른다.

‘고민이 있다는 건 좋은 신호야. 현재보다 더 성장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니까. 다행히 잘 알아들은 모양이고.’

정 피디는 내 기대만큼 잘 성장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작품이 끝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테고.

얼추 진행 중인 작업 일정이 정리되었다.

차기작인 그림 동화는 편집에 들어갔고, 영화는 올란 감독과 정 피디에 의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군.’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남은 한 가지 일정이 떠오른다.

안 그래도 콧대 높은 서양 양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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