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uncomfortable - 불편한 (3)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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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예술학회 신규 회원 추대 및 특별 초청 강연회 제안]
놀랄만한 소식에 장현웅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대박. 여기 되게 유명한 곳이잖아. 역대 회원이 찰스 디킨스, 벤자민 프랭클린, 스티븐 호킹, 넬슨 만델라와 같이 저명한 사람들이라고!”
장현웅은 들뜬 표정으로 기뻐한다.
“혹시 이러다가 너도 회원으로 선정되는 거 아냐?”
“아직은 모르지. 무슨 생각인지.”
“그래도 완전 잘 됐지. 어차피 다음 주에 부커상 낭독회 때문에 영국 가야 했잖아. 이거 타이밍이 너무 좋은데?”
부커상 낭독회.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들의 행사로 장현우의 말대로 바로 다음 주였다.
“음. 뭐 그럴 수도 있고.”
나는 장현웅과 달리 차분히 메일 내용을 살폈다.
내 반응이 생각보다 차가워서인지 장현웅이 의아한 듯 쳐다본다.
“왜? 넌 안 기뻐? 아, 부담돼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단 좀 이상해서.”
“이상하다고?”
내 말에 장현웅은 서둘러 메일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출처도, 발신자도 왕립예술학회 공식 계정이 맞는데?”
장현웅의 말대로 출처는 확실했다.
그러나 나는 출처가 아닌 이번 초청의 이면에 숨겨진 초청자의 의도에 더 관심이 갔다.
“네 말대로 회원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명예를 얻게 되는 곳이야. 근데 그런 곳에서 갑자기 나를 초대한다? 좀 이상하지 않아?”
“음. 그거야 네 작품이 그만큼 임팩트 있었던 거 아닐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신규 회원은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야 회원 심사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곳이야. 그런데 왕립예술학회와 아무 연고 없는 나를 신규 회원으로 추대했고, 또 초청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어? 듣고 보니까 갑작스럽기는 하네...”
“그래. 네 말대로 내 연극과 소설이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긴 했지만 콧대 높은 왕립예술학회 임원들이 초대할 정도는 아니지. 그래서 이상한 거고.”
내 말에 장현웅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대체 이유가 뭘까?”
“글쎄.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영국 왕립예술학회의 초청 강연.
좋은 기회였지만 동시에 속내가 궁금했다.
***
늦은 오후.
영국 런던에 위치한 부커 재단.
사무실에 앉은 로건 위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로건 위원장의 고민은 다름 아닌 매튜 저먼 위원장 때문이었다.
부커상 최종 후보가 발표된 뒤로 그의 행보가 심상찮았다.
대상은 바로 권서준 작가였다.
로건 위원장은 자연스럽게 예전에 매튜 이사장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검증이 부족한 작가를 덜컥 수상자로 발표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부커상의 명성에 먹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최종 수상전에 작가의 자질을 충분히 검증할 적절한 기회가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영국왕립예술학회 초청 강연이라고 했지만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왜 그토록 권서준 작가에게 신경을 쓰는 걸까?’
대놓고 수상을 막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속에선 권서준 작가에 대한 못마땅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혹시 영미권 국적을 가진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하긴 부커상과 부커인터내셔널 상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 달랐다.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정한 게 부커 인터내셔널 상이었으니까.
‘사실상 로컬상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국제 문학상으로써의 위상을 갖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러나 여전히 치우친 시선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아.’
쉽게 바뀌지 않는 문학계의 편협함.
로건 위원장의 한숨만 깊어질 뿐이었다.
‘일단... 올리버 편집장을 한 번 만나봐야겠어.’
개인이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선입견.
그러나 로건 위원장은 그 가운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생각이었다.
***
영국왕립예술학회 초청.
좋은 기회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구린 내가 풍긴다.
‘대체 의도가 뭘까?’
알 수 없는 연결 고리에 기쁘기보다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나는 답장을 유보한 채 왕립예술학회에 대해 알아봤다.
영국 왕립예술학회(Royal Society of Arts).
인류의 지적 발전에 혁신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로 구성된 곳으로 최초 시작은 1754년이었다.
예술, 제조 및 상업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로 이후 왕실의 공식 인정을 받으면서 왕실 용어 사용 권한을 부여 받은 단체.
영국 여왕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으며 분야를 막론하고 인류의 지적 발전에 지속 가능한 공헌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유서 깊은 학회였다.
알베르트 메달, 벤자민 프랭클린 메달 등 세 개의 메달을 수여하며 회원이 된 이후엔 각종 특권까지 주어진다.
‘자긍심을 가질만한 단체지.’
그 순간, 내 눈에 유명 회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왔다.
‘매튜 저먼?’
익숙한 이름이다 했더니 바로 부커 재단 이사장의 이름과 같았다.
매튜 저먼 이사장.
부커 재단의 이사장이자 고지식한 문학인. 부커상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여기는 뼛속부터 영국인 중 하나였다.
‘동시에 왕립예술학회 회원이라...’
게다가 단순히 회원이 아니었다.
수뇌부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유력 인사 중 하나였다.
왕립예술학회 회원이면서 내가 최종 후보에 오른 부커 재단의 이사장이라... 흐릿하게나마 연결고리가 보이는 듯했다.
안 그래도 최종후보(shortlist) 발표 이후에 나온 내용이라 더 의아했는데 숨은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매튜 이사장의 최근 행보를 주의 깊게 살폈다.
사업 부분과 각종 논문.
각종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런데 한 유력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 하나가 눈에 띈다.
[세계 문학 생태계와 아프리카의 문학의 현주소]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견해를 담은 칼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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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문화와 다양한 가치들이 통용되는 시대. 그 가운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가치관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문학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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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문학은 최근 몇 년 사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줬다. 특히 단편 소설의 경우 몇몇 국제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나머지 장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주류 문학의 계보에 들었다고 평가하기엔 시기상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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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단어와 길게 풀어쓴 칼럼.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였다.
‘아프리카 문학은 아직까지 세계 주류 문학이 될 수 없다.’
한 대륙의, 한 문화권의 문학 수준을 오로지 자신의 얄팍한 기준으로 정의내리고 확신하고 있었다.
‘문학에서도 서양 우월주의 인식을 가진 사람이군.’
철저하게 서구권 중심의 주도권을 고집하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아시아 문학을 인정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초대했다?
자연스럽게 그 속내가 읽힌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뜻밖에도 올리버 편집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올리버입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참, 다음 주에 영국에 오시는 거죠?
“낭독회에는 절대 늦지 말아야죠. 마침 왕립예술학회 초청도 있어서 며칠 일찍 출발할까 생각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올리버 편집장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진다.
-사실 제가 조금 전에 부커 재단 관련 인사랑 미팅을 가졌습니다.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초청 행사는 거절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되묻자 올리버 편집장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게...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오늘 익명의 재단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작가님의 부커상 선정을 막는 세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내 촉이 발동한다.
“혹시, 그 세력의 중심에 매튜 이사장이 있나요?”
나는 주저 없이 내 생각을 밝혔다.
-그, 그걸 어떻게 작가님이...
올리버 편집장이 허를 찔린 듯 말끝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애매했던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다.
정리해보면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가 부커상을 받는 걸 막기 위해 매튜 이사장이 특별 강연에 초대한 것이었다.
‘명목은 초청이지만 그곳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선정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될 테니까.’
고상하면서도 치졸한 계획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선정 위원회 전부의 의견은 아닙니다. 다만 매튜 이사장의 꿍꿍이가 있어서... 아무래도 이번 초청 제안은 거절하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올리버 편집장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전달한다.
올리버 편집장의 말처럼 부커상 수상을 위해서라면 쓸데없는 책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참가해야겠네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올리버 편집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추후 내가 나아갈 방향을 위해선 이 자리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이왕 불편하게 만들 땐 확실히 불편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니까. 그것도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아니 뇌리에 각인 되도록 철저하게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지.’
물론 시간은 충분했다.
***
‘그래도 진행하시겠다고 합니다.’
올리버 편집장의 전화를 받은 로건 위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올리버 편집장에게 언질을 줬지만 돌아오는 답변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모든 사실을 말해줬음에도 권서준 작가는 초청 강연을 수락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젊은 천재 작가의 오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문학계 인사의 파워를 너무 무시하는 거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으니까.
사실 매튜 이사장의 의중을 전달한 것 자체가 로건 위원장으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학회장에게 신규 회원 초청이 보고됐겠지?’
영국왕립학회의 학회장.
신분으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영국 내에서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독한 무기력에 빠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상황.
‘어쩔 수 없어. 이젠 흘러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로건 위원장이 긴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비워내려 할수록 깊어지는 고민.
로건 위원장의 입맛이 씁쓸해진다.
***
며칠 뒤.
출국을 이틀 앞둔 날.
“서준아...”
한창 짐을 싸던 장현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지금이라도 거절하는 게 낫지 않아? 괜히 강연 갔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잖아.”
며칠 동안 녀석은 내내 같은 고민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다 생각이 있다고.”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한편으로 괜히 좋은 기회를 난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장현웅이 이토록 고민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부커상 수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서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문학 수준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
물론 난 그 일을 보다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준비를 할 뿐이었다.
내 생각을 이해했는지 장현웅은 더 이상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오늘 일정으로 주제를 바꾼다.
“참, 오늘 일정은 잊지 않았지?”
장현웅이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꾼다.
“물론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장장 반년 넘게 이어진 뮤지컬 「거장의 숨결」 마지막 공연 날이었으니까.
‘그 피날레만큼은 내 눈으로 봐야지.’
왜냐고?
끝은 곳 시작이니까.
국내 공연은 마무리됐지만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열매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뮤지컬「거장의 숨결」의 해외 순회공연.
한국의 뮤지컬 작품이 미국 본토로 진출하는 첫걸음.
그 장대한 시작이 바로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