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3화 (173/203)

173. addiction - 탐닉, 중독 (6)

173.

***

윤서원.

그녀의 목표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찬 숙부를 향한 복수였다.

치열한 욕망 아래에 감춰진 음모와 배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천륜까지 저버리는 윤서원의 삶.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에 갇혀 있는 가엾은 영혼이었다.

좌절과 상실.

그러나 여전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애.

끊임없이 제기되는 존재론적 회의감이 윤서원의 삶을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복수가 단순한 사이다가 아니라 먹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거고.’

쉽지 않은 윤서원의 삶.

마찬가지로 윤서원의 테마곡 역시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군.’

손주환 작곡가는 윤서원의 삶을 정확히 담아냈다.

일종의 행진곡.

시작은 경쾌했다.

골목길을 내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리듬이었다.

그런데 점점 음이 고조될수록 분위기는 묵직해진다.

요란한데, 어둡고, 빠른데, 차갑다.

마치 앞만 보고 질주하는 광기 어린 리듬에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담은 곡.

게다가 상류층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평범한 악기로 만들어낸 리듬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훌륭합니다. 역시 손 선생님답습니다.”

“하아, 기대에 부응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손주환 작곡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정도면 부응한 정도가 아니죠. 제 기대를 훌쩍 넘어선 곡이니까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리고 내 진심은 고스란히 손주환 작곡가에게 전해진다.

“감사합니다.”

밀려드는 뿌듯함에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인정받았을 때만 누릴 수 있는 성취감.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기쁨이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이제 해결해야 할 건 제프리 감독이었다.

***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오랜만에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 회의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 정은미 피디의 모습이 보인다.

“오셨어요, 작가님.”

나를 본 정 피디와 올란 감독이 반갑게 맞이한다.

두 사람 다 웃고 있었지만 지난번 촬영장에 비하면 밝지 못한 표정.

“분위기가 어딘가 가라앉은 느낌이네요?”

내가 묻자 올란 감독이 쓴 미소를 짓는다.

“그러게요.”

한숨 섞인 대답과 함께 흐르는 짧은 침묵.

눈치를 보던 정 피디가 먼저 침묵을 깬다.

“제프리 감독이 직접 올 줄은 몰랐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올란 감독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겠죠.”

제프리 감독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올란 감독은 어느 정도 각오를 한 표정이었다.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미덕인 한국의 분위기와 달리 미국에선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면 가만히 있지 않거든요.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제프리 감독 입장에선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총감독은 올란 감독이었지만 음악에 관해서는 제프리 감독 역시 프라이드가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뭐 분업화된 헐리웃 시스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 싸움이기도 합니다..”

올란 감독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일단은 만나봐야 설득을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도착하실 때가 된 거 같은데...”

정 피디가 시계를 보며 말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제프리가 들어온다.

붉은 머리에 배가 많이 나온 백인 남자.

힘주어 다문 입 모양에서 지독스러운 고집이 느껴진다.

“아, 어서 오세요.”

“...”

재빨리 일어난 정 피디가 인사를 한다.

그러나 제프리는 슬쩍 한 번 시선을 건넬 뿐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올란 감독과 나, 그리고 정 피디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침 세 분 다 계시군요.”

“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마실 것 좀 준비해드릴까요?”

예의를 차린 정 피디의 말.

그러나 제프리는 거칠게 손을 내젓는다.

“됐습니다. 한가하게 차나 마시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요.”

목소리에서도 찬 바람이 쌩쌩 분다.

화가 잔뜩 났는지 굳게 다문 어금니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턱 근육이 씰룩거리고.

“대체 제가 선정한 곡이 왜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까?”

제프리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나같이 제가 직접 선택하고, 의뢰해서 받은 음악입니다. 특히 윤서원의 테마곡은 그중에서도 더 심혈을 기울인 곡이고요. 내가 유키 야마토 선생의 곡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제프리의 목소리가 그라데이션으로 높아진다.

당황한 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나선다.

“그게, 거절한 게 아니라 더 좋은 곡이 있나 알아보자는 뜻이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건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죠. 절 무시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처사입니다.”

그때, 듣고 있던 올란 감독이 끼어든다.

“진정해요, 제프리 감독. 미리 말씀드렸지만 더 좋은 곡이 있는지 한 번 확인만 하겠다고 한 겁니다. 절대 당신의 곡을 무시한 게 아니라고요.”

“거장들의 음악을 반려하고, 고작 무명 작곡가의 곡을 고려한다는 게 무시가 아니면 뭡니까?”

무명 작곡가라는 표현에 정 피디가 마지못해 나선다.

“제프리 감독님, 손주환 작곡가는 얼마 전 뮤지컬 OST로 꽤 큰 성공을 거둔 작곡가입니다. 능력 면에서도 주목받는 작곡가이고요.”

“그 정도면, 유키 야마토 선생에 비해 무명 아닌가요? 지금 제가 작업하는 분들이 어떤 분인지 알기나 하세요?”

“...”

정 피디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유키 야마토.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며 동시에 헐리웃 OST 거장으로 인정받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올란 감독이 마지못해 나선다.

“저희 쪽에선 마침 권 작가님이 좋은 곡이 있다고 추천해주셔서 들어보기로 한 겁니다. 이렇게 흥분하실 일이 절대 아닙니다.”

“하아.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왜 작가가 OST까지 관여하냐고요. 이게 월권이 아니면 뭐가 월권입니까? 안 그래요, 권 작가?”

제프리 감독의 날 선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올란 감독과 정 피디는 난처한 얼굴이었지만 내 생각엔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생각이 다 드러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직설적인 사람일수록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면 인정도 빠른 법이었다.

설명보다는 직접 느끼게 해주는 게 더 좋은 설득 방법이었고.

‘어차피 설명해봤자 변명처럼 느낄 테니까.’

다행히 나에겐 제프리를 납득시킬만한 결과물도 있는 상태였고.

“오신 김에 한 번 들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네?”

“마침 내일이면 곡이 준비될 거 같습니다. 직접 들어보시고 결정하시죠.”

“...”

제프리 감독이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본다.

나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나도, 제프리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지켜보던 정 피디 역시 눈치만 볼 뿐 섣불리 끼어들지 못한다.

그만큼 과열된 분위기.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제프리가 숨을 고른다.

“후우, 좋습니다.”

앞뒤 다 생략된 한 마디.

가만히 지켜보던 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제프리, 혹시 좋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나 대단한 곡인지 한 번 들어보자고요.”

“저, 정말요?”

정 피디가 믿기지 않는 듯 나를 쳐다본다.

물론 같이 들어보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투와 눈빛에선 제프리의 속내가 그대로 읽힌다.

뭐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

숙소로 돌아온 제프리는 곧장 미국에 있는 매니저와 통화를 했다.

“그래. 나한테 곡을 들어보자고 했다니까?”

제프리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진한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켰다.

뜨끈한 술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식도의 위치를 알려줬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이 불난 속을 진정시키는 게 더 중요했다.

“진짜 이해가 안 간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뒤떨어진 시스템이야. 분업화가 철저한 헐리웃과 달리 여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니까? 이젠 하다 하다 작가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하아.”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는지 술잔을 채우고 또다시 비워낸다.

“참, 내가 말한 건 준비했어?”

-아, 내일 내보낼 기사 말씀이시죠? 안 그래도 이미 초안 잡아놨습니다. 잠시만요.

곧이어 휴대폰이 울리고 매니저가 보낸 메일 한 통이 도착한다.

________

제프리 측은 “감독과의 끊이지 않는 불화와 예술적 견해 차이 또한 좁히지 못해 음악 감독직 사임을 통고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정은 촬영이 한창 중인 11일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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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는 “곡 선정 문제로 인해 월권에 가까운 올란 감독의 행태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유감스럽게도 11일 이후 작품과 관련된 모든 음악 활동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________

친한 기자에게 미리 준비시킨 기사였다.

기사의 핵심을 바로 결별.

이후 작품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의미였다.

‘얼마나 좋은 곡인지 한번 들어보자고. 만일 내 기대에 못 미친다면, 당신들 각오해야 할 거야.’

한창 촬영 중인 영화에 찬물이 될 수 있는 불화설.

자존심에 상처받은 음악감독의 표정이 서늘했다.

***

다음 날 오전.

제프리는 정 피디의 차를 타고 연남동에 위치한 손주환 작곡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미리 도착해 있던 권서준 작가가 맞이한다.

그 뒤로 작은 규모에 투박한 음향 장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서 작곡을 한다고?’

그동안 거장들과 일해 온 제프리 눈에는 못마땅한 수준이었다.

최고급 음향 장비로 세팅되어 있는 유키 야마토 선생의 작업실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션도 없고, 직원도 없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차이가 나는 수준에 기대감이 더 떨어진다.

그러나 애써 입을 다문다.

어차피 중요한 건 곡이었으니까.

‘그래. 내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곡을 확인하기 전까진 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

제프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 앉는다.

“시작하죠.”

권서준의 사인을 받은 손주환이 음원을 튼다.

잠시 뒤,

경쾌한 리듬이 귓가에 들어온다.

“응?”

순간 제프리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이 리듬은...’

유키 야마토의 곡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윤서원의 테마 곡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해석이 달랐다.

그러나 이내 경쾌한 리듬이 묵직해지기 시작한다.

악기도 별로 없는데, 오히려 그 여백이 가져다주는 느낌이 묘하게 서글펐다.

“자, 잠시만요. 다시.”

제프리는 초반부를 반복했다.

‘이건 캐스터네츠인가? 이건 리코더고...’

투박한 악기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더 정확히는 윤서원의 아픈 과거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마음 둘 곳 없어 헤매는 앙상한 영혼을 위로해주는 듯 경쾌한 리듬.

그러나 이내 비장미 넘치는 리듬으로 바뀐다. 게다가 끊임없이 변주되며 불안한 윤서원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분노, 광기, 그리고 슬픔...’

대본을 읽으며 떠올린 윤서원과 전혀 다른 그녀의 감정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설마... 권 작가가 그린 윤서원은 이런 모습인가?’

윤서원의 캐릭터가 재해석 된다.

잔다르크의 이미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고뇌하는 햄릿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 이래서 제목이 레이디 햄릿인 거야...’

뒤늦게 밀려드는 깨달음에 입이 떡 벌어진다.

“이거 너무 좋은데요?”

그때,

옆에서 함께 듣던 정 피디가 놀라 외친다.

그러다가 제프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차 싶었는지 얼른 입을 다문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응은 정 피디와 같았다.

말없이 감상하고 있는 올란 감독의 표정도 마찬가지.

“...”

이쯤 되자 제프리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해석이 틀린 거군요?”

권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제프리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의구심이 생긴다.

‘왜 어제 먼저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면 될 텐데...’

그 순간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혹시,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기회를 준 건가?’

권서준 작가의 표정을 보니 확실했다.

상대가 민망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설득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뒤늦게 권서준의 생각이 이해된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다.

민망하면서, 동시에 고마움이 솟구친다.

‘이 사람, 생각이 깊구나...’

저 나이대에 경험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무례했던 자신과는 수준이 다른 그의 설득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제 제프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이 곡으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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