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addiction - 탐닉, 중독 (5)
172.
***
촬영 중 잠시 쉬는 시간.
정은미 피디는 부리나케 권서준 작가 쪽으로 달려갔다.
“작가님, 작가님!”
어찌나 뛰어왔는지 숨이 턱까지 찬 상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대체 무슨 마법을 일으키신 거예요?”
얼음장이나 다름없던 촬영장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달라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유일한 해답은 권서준 뿐이었다.
“그냥 이경민 배우님과 술 한 잔 했을 뿐이에요. 연기에 대한 얘기를 좀 나눴고요.”
“제발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궁금해 죽어요. 고작 그 정도로 촬영장 뛰쳐나간 배우가 제 발로 돌아올 리가 없잖아요. 그것도 저렇게 달라져서요.”
정 피디 입장에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제 얘기를 하시나 보네요?”
그때, 어느새 다가온 이경민이 인사를 한다.
“아, 배우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어젠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 그동안 정말 죄송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군요.”
정중한 이경민의 사과에 정 피디는 손을 내젓는다.
“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한 마음이 됐으니까요. 다만... 어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죠.”
솔직한 궁금증이었다.
그러자 미소를 짓던 이경민이 천천히 입을 연다.
“어제 권 작가님께 많은 걸 배웠습니다. 특히 좋은 연기에 대해서요. 그렇죠?”
이경민의 시선을 받은 권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정 피디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대체 그 대화가 뭔지가 궁금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정 피디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문제를 일으키던 배우가 촬영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만으로 일단은 희망적이었다.
감독과도 합이 잘 맞고, 촬영장의 분위기도 한껏 좋아졌다.
‘일단 이걸로 만족이야.’
정 피디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
이후 진행한 촬영은 순탄했다.
‘좋아, 아주 좋아.’
사실 이번 문제는 자기 입장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객관적일 수 없는, 주관적인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따지고 보면 이경민의 문제는 배우 중심의 해석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고 했어. 지나칠 정도로...’
날 봐달라고 외치는 연기.
그러나 그런 연기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감동하라고 윽박지르는 연기는 오히려 진실된 감동을 전달하기 어려우니까.’
결국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는 과도한 해석.
올란 감독도 그걸 알았기에 몇 번이나 재촬영을 지시한 거였다.
여기서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자기 영역에선 전문가였기에 더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하나가 된 이상 문제 될 건 없지.’
이젠 믿고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물론 아직 조각 하나가 남아있긴 하지.’
이번 영화의 마지막 퍼즐.
바로 OST였다.
특히 윤서원의 테마곡이 중요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내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 피디가 슬쩍 다가온다.
“작가님, 무슨 연락인데 그렇게 좋아하세요?”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거든요.”
“혹시, 관심 있는 분 생기신 거예요?”
“관심 있는 분은 아니고, 관심 있는 곡은 있죠.”
“네? 아,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시지 내용을 보여줬다.
[작가님, 곡 완성됐습니다.]
발신자는 손주환 작곡가.
내가 가장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
미국.
엔플릭스 본사 대표실.
평소와 달리 흥분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대표님, 이게 대체 말이 됩니까?”
“자, 자. 제프리 진정하게.”
루카스 대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렸지만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남자의 이름은 마이클 제프리.
헐리웃에서 유명한 음악 감독으로 이번 올란 감독의 작품을 함께 하는 중이었다.
“대표님,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이건 명백히 월권이라고요!”
제프리 음악감독은 또다시 언성을 높였다.
루카스 대표가 다급히 그를 다독인다.
“올란 감독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냥 문제 삼을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단 거죠? 제가 몇 주 동안 고생하며 섭외하고, 선정한 곡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럼 내가 한 번 연락해보겠네.”
“아니요. 됐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대안이 있는지 제가 직접 들어볼 테니까요.”
“자, 자네 설마...”
“네. 지금 당장 한국에 갈 겁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음악감독, 사퇴하겠습니다.”
제프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박차고 나갔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하아. 미치겠군. 산 하나를 넘으니 또 산 하나가 나타나다니...”
루카스 대표가 아픈 머리를 지그시 누른다.
***
다음 날 오전, 아트 갤러리.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촬영 30분 전에 도착한 이경민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인데...’
화난 황소처럼 분노를 쏟아내던 사람이 온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게다가 올란 감독과 이경민의 호흡 역시 척척 맞아떨어졌다.
올란 감독이 말하는 바를 이경민은 정확히 알아들었고, 그에 맞게 연기를 보여준다.
‘그래. 이게 제대로 된 촬영장 분위기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윤정호라는 사람을 그대로 ‘드러내려’ 노력했다.
올란 감독과 이경민의 대화.
그로 인해 정 피디는 영화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영화 디렉팅이군.’
아주 값진 경험이었어.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촬영은 문제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문제는 OST뿐.
‘권 작가님 말로는 곡도 나왔다고 하니까 곧 알 수 있겠지.’
정 피디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그런데 그때,
막내 조연출이 급히 달려온다.
“가, 감독님. 감독님!”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어디 불이라도 났어?”
“불보다 더 큰 일입니다.”
“뭐?”
“제프리 감독이 내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정 피디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왜?”
“아마 OST 선정 문제 때문인 거 같아요.”
“...뭐라고?”
순간 굳어지는 정 피디의 표정.
마이클 제프리.
바로 이번 영화의 음악 감독을 맡은 사람이었다.
***
늦은 오후.
LA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OZ201 기내.
좌석이 편하기로 유명한 퍼스트 클래스였지만 제프리 감독은 불편한 얼굴로 연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후우.”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자 VIP를 주의 깊게 살피던 스튜어디스가 다가온다.
“승객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나요?”
제프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냥 좀 기분이 안 좋군요.”
“그럼 시원한 음료라도 드릴까요?”
“음료는 됐고, 위스키 한 잔 부탁할게요.”
“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스튜어디스가 멀어지는 사이, 제프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토록 화가 난 이유는 다름 아닌 영화 OST 선정 문제 때문이었다.
제목 : 레이디 햄릿.
몇 번의 의논을 거쳐 가제였던 제목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제프리는 자연스럽게 권서준의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를 떠올렸다.
‘감동 그 자체였지. 특히 윤서원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었고.’
가족과 외부의 위협에도 꿋꿋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잔다르크를 연상시켰다.
최근 여성 히어로물에 관심을 보이는 헐리웃 추세에 맞춰서 강한 여성상을 보여주기에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서 곡을 섭외했더니, 감히 거절해?’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다.
“말씀하신 위스키 가져왔습니다.”
얼음이 살짝 깔린 위스키를 가져온 스튜어디스.
제프리는 답답한 마음에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뒤,
바드득, 바드득.
그의 입에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이를 가는 소리일 수도 있고.
***
늦은 밤.
나는 OST 확인을 위해 손주환 작곡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운전을 하며 조금 전 정 피디와 나눈 통화를 떠올렸다.
-제프리 감독이 내일 아침에 한국에 도착한다고 하네요. 아마 곡 선정 때문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에요.
난처해하는 정 피디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다.
‘하긴, 제프리 감독이 직접 한국까지 올 정도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하지.’
정 피디가 애써 숨겼지만 심각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느 음악 감독이라도 본인이 선정한 곡에 딴죽을 걸면 화가 날 법하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제프리 감독이 선정한 곡을 틀었다.
차 안에 흐르는 피아노 연주곡.
내 대본을 보고 반해버린 제프리가 거장 유키 야마토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첫 시작부터 묵직했다.
이내 소리의 강약을 토대로 긴박감과 함께 웅장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누가 들어도 훌륭한 피아노곡.
사실 제프리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최고의 판단도 아니었다.
특히 윤서원의 테마곡으로는 아쉬웠다.
‘이건 마치 히어로물에 어울릴 법한 느낌이거든.’
제프리는 윤서원을 마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거대한 성을 부수는 영웅에 빗대어 해석했다.
그로 인해 비장하며 웅장한 부분에 초점을 맞춘 OST를 제안한 것.
내가 작품 속에 담긴 윤서원의 캐릭터와는 많이 다른 해석이었다.
‘어쩔 수 없지. 미국과 한국의 정서 차이는 생각보다 큰 법이니까.’
아쉽게도 캐릭터의 이해에서 나오는 한계였다.
그에 비해 손주환 작곡가의 해석은 기대할 만했다.
손주환 작곡가가 훌륭해서?
물론 그만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맞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모든 힌트를 줬으니까.
작품에 가장 어울릴 음악이 나올 수 있게 모든 코멘트를 전달한 상태였다.
적어도 손주환 작곡가는 그 영감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게 힘들다면 애초에 같이 작업할 리가 없었으니까.’
일단 확인해보면 알 일.
나는 기대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
늦은 오후.
권서준 작가를 기다리는 손주환은 긴 한숨을 내쉰다.
“후우.”
무려 2주 동안 잠자는 시간도 줄인 채 모든 에너지를 갈아 넣은 곡이었다.
권서준 작가의 조언을 떠올리며 최대한 가깝게 만들려고 노력한 곡이었다.
‘오히려 아름다운 어린 시절보다는 역설적으로 상처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을 상징하는 쪽으로 콘셉트를 잡는 게 어떨까 해서요.’
상처받은 한 여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곡.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벗어나지 못해 겉만 커버린 어른아이를 떠오르게 만드는 곡이었다.
‘완전 다른 곡이 되었지.’
처음 예상한 콘셉트는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는 깊은 곡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마추어가 아니라서 더 긴장이 된다.
‘내 곡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게 프로 작곡가니까...’
그리고 이 곡은 다른 사람도 아닌 권서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실망하시면 어쩌지?’
세상에서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청중이 바로 권서준이었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작업실 문이 열린다.
훤칠한 키의 권서준과 장현웅이 들어온다.
“자, 자. 이것 좀 드세요.”
장현웅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들고 온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내민다.
“아이고, 뭐 이런 걸 사 오셨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드세요, 자, 드세요.”
장현웅이 음료수를 나눠주는 사이 권서준 작가가 들어와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럼 들어볼까요?”
곧바로 곡을 주문하는 권서준.
“네? 아, 네...”
손주환 작곡가는 이내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곡을 틀었다.
잠시 뒤,
며칠 밤을 새우며 만든 곡이 작업실에 울려 퍼진다.
손주환은 긴장한 나머지 손톱을 물어뜯는다.
전주가 흐르고,
심플하면서 비장한 리듬이 이어진다.
점점 고조되는 멜로디.
잠시 뒤, 곡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그런데,
권서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별로 인 건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갑자기 스페이스 바를 눌러 음악을 멈춘다.
“...왜 그러시죠?”
순간 긴장한 손주환이 묻는다.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린다.
그런데 가만히 손주환을 보던 권서준이 천천히 입을 연다.
“미쳤네요.”
“...네?”
“이 곡, 미쳤다고요.”
2주 동안 고생한 대가는 고작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짝 긴장한 손주환 작곡가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