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1화 (171/203)

171. addiction - 탐닉, 중독 (4)

171.

***

지이잉.

중요한 순간.

권서준 작가의 휴대폰이 울린다.

“잠시만요. 급한 전화 같아서요.”

“네, 괜찮습니다.”

발신자를 보던 권서준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마침 안주가 떨어진 터라 이경민은 추가 주문을 한다.

“사장님, 여기 육회 하나 주세요.”

배고픈 후배들을 위해 선심 쓸 때 사던 안주였다.

안주를 기다리던 이경민은 자연스럽게 조금 전 권서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기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라... 과연 그 문제 때문이었을까요?’

단번에 술잔을 비워낸 이경민이 다시 생각에 잠긴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 자신의 대립은 사실상 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 대해선 두 사람의 대립 자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연극 연기와 영화 연기는 엄연히 다르니까.’

애초에 연극 연기는 무대 크기와 환경에 맞춰야만 했다.

결국 주변 환경에 적합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

특히 큰 무대 위에서 연기할 경우 연기자의 세밀한 연기를 쉽게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에 과장된 대사나 동작은 필수였다.

‘뮤지컬과 달리 마이크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뒤쪽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대사와 행동이 전달하기 위해선 의도적으로 액션이 크게 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이렇게 훈련된 동작은 타 장르, 특히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볼 때 이질감이 들 수 있었다.

물론 이경민도 그 차이를 모르지 않았다.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 모든 걸 고려해도 문제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연극계 후배를 위해서 온 에너지를 쏟았다.

며칠 밤을 새우며 캐릭터를 연구했고, 카메라 동선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가장 윤정호다운 연기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랬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올란 감독의 연기 디렉팅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아.”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한숨.

이경민은 차디찬 술잔으로 불난 속을 애써 달랜다.

“죄송합니다.”

잠시 뒤 통화를 마친 권서준이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근데 급한 일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차기작 때문인데, 다행히 금방 끝났습니다.”

“차기작이요? 벌써요?

권서준의 말에 이경민의 입이 벌어진다.

“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서준과 달리 이경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대본 쓴 지가 얼마 전이고, 소설 출판한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벌써 차기작이라니... 정말이지 엄청난 열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열정만큼은 본받을 수밖에 없겠군.’

그때, 마침 안주가 나온다.

“주문하신 육회 나왔습니다.”

빛깔이 고운 육회 한 접시가 두 사람 앞에 놓인다.

“한 번 드셔보세요. 이게 여기 대표 안주거든요.”

이경민이 권하고는 시원하게 소주잔을 비워낸 뒤 기분 좋게 육회를 입에 넣는다.

그런데,

“음?”

순간 미간이 찌푸려진다.

육회 본연의 맛은 사라지고, 과도한 양념 맛만 강하게 느껴진다.

옆을 보니 권서준도 같은 표정.

괜스레 미안해진 이경민이 입을 연다.

“음. 사장님이 바뀌었나? 왜 이렇게 양념 맛만 강하게 나게 한 거지”

어색하게 웃던 이경민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안주 때문에 입맛은 버렸지만 애써 웃으며 아까 하던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간다.

“참, 작가님. 아까 연기에 대해 하신 말씀 말입니다. 고민해봤는데 무슨 뜻인지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뭐 특별한 건 아닙니다. 아마 배우님도 아시는 내용일 테고요.”

“그래도 도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너무 답답해서요.”

이경민은 진심이었다.

그러자 잠시 바라보던 권서준이 입을 연다.

“혹시, 배우님은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을 구했더니 오히려 질문이 돌아온다.

잠시 고민하던 이경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죠. 무대든, 스크린이든 결국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선 확실한 캐릭터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배우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 다 그렇게 답할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권서준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근데 오히려 그 노력이 윤정호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면 어떨까요?”

이게 무슨 소리일까?

순간 당황한 이경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네? 그게 무슨...”

“사실 올란 감독은 단순히 배우님의 과장된 연기 톤을 지적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윤정호라는 캐릭터를 알리기 위해 과장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본 거죠. 그 해석이 오히려 윤정호다움을 가리게 됐으니까요.”

“...제 해석이 틀렸다는 건가요?”

권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배우님의 해석은 훌륭했습니다. 다만 과도한 해석으로 인해 본연의 맛을 해칠 수도 있다는 거죠. 마치 이 안주처럼요.”

“...”

순간 이경민의 눈이 커진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안주로 향한다.

뒤이어 잊고 있던 깨달음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꾸며내지 마라.’

‘설득하려고 윽박지르지 마라.’

‘최대한 단순하게 연기해라.’

연극 무대에 처음 섰을 때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해줬던 조언이었다.

‘그래서 어느 배우는 연기하지 않는 연기가 진짜 연기라고 했었지...’

분명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기 경력이 오래되니까,

경험이 그만큼 많아지니까,

오히려 기본을 놓치고 만 것.

‘그래서 작가님이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권서준의 말대로였다.

연기 톤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 깊이 말하자면 연기 자체에 대한 내용이었다.

과장된 해석으로 인해 오히려 윤정호의 진짜 모습이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하아...”

부끄러움과 함께 충격이 밀려온다.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선 그 위에 덧칠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한 것을...’

이경민의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대로 이번 작품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질문.

권서준이 천천히 입을 연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캐릭터에 대해 진실하다면 관객들은 호응할 겁니다.”

“...”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감독과 배우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제대로 된 맛이 나올 리 없으니까요.”

이경민의 눈빛이 깊어진다.

***

늦은 밤.

올란 감독은 생각에 잠겨있다.

“골치 아프군.”

헐리웃에서도 배우와의 갈등은 늘 있는 이슈였다.

그러나 외국 현장에서, 외국 배우와의 갈등은 그보다 더 답답함을 일으켰다.

‘단순히 소통의 부재라고 보기보단 큰 틀이 맞지 않는 거야.’

올란 감독도 그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

‘이미 각오했지만 쉽지 않군.’

자연스럽게 이경민 배우가 하차했을 경우가 떠오른다.

‘아마 난리가 나겠지.’

안 그래도 헐리웃에서 건너온 몇몇 파파라치들이 주목하는 촬영 현장.

하차라는 문제까지 발생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썩해질 게 분명했다.

‘하긴, 큰일이긴 해.’

주인공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배역이었다.

그리고 이미 촬영이 꽤 진행된 상태에서 하차는 촬영 일정에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올란 감독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정 피디가 다가온다.

“감독님, 이경민 배우가 찾아왔습니다.”

“...이경민 배우가요?”

의외였다.

한 달간 지켜본 바로는 그렇게 뛰쳐나간 뒤에 다시 돌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엄청 강한 사람인데...’

그래도 분명 찾아왔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

올란 감독은 서둘러 이경민 배우를 숙소로 들였다.

“뜻밖이네요. 이렇게 다시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올란 감독의 가시가 담긴 인사.

그러나 이경민의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 배역만 생각하고 작품을 고려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

순간 올란 감독의 눈빛이 깊어진다.

이경민은 반나절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상대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들어오는데 굳이 고압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올란 감독 역시 솔직하게 속내를 꺼낸다.

“배우님의 연기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배우님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전체적인 그림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죠.”

듣고 있던 이경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감독님이 그리시는 그림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처음 보이는 태도의 변화였다.

더 이상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던 자존심 센 배우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이경민의 변화에 호기심이 인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올란 감독의 물음에 이경민이 쓴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권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권 작가님을요?”

고개를 끄덕이던 이경민이 천천히 입을 연다.

“권 작가님이 그러더군요. 진심으로 작품을 위한다면 감독님과 꼭 깊은 대화를 해보라고요.”

“...”

올란 감독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권서준 작가인가?’

자존심 강한 배우를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올란 감독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참 대단하군.’

그러나 지금은 감탄보다 배우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장 내일 있을 촬영이 중요했으니까.

올란 감독이 시선을 옮겨 이경민을 바라본다.

어느새 이경민의 눈빛엔 작품과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뜨거운 그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옮아 붙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생각하는 이번 작품의 주제는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함. 그로 인해 과연 존재란 무엇인지 묻는 고뇌의 여정입니다. 그 가운데서 윤정호는 말입니다...”

올란 감독이 먼저 자기 생각을 꺼낸다.

그렇게 시작된 깊이 있는 대화.

두 사람의 대화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

다음 날 촬영장.

“후우...”

촬영 준비를 마친 정은미 피디가 긴 한숨을 내쉰다.

아직도 촬영장에 도착하지 않은 이경민 때문이었다.

“하아, 올까요?”

정 피디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권서준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올 거니까요.”

“...그럴까요?”

“네, 기다려보시면 알 겁니다.”

자신만만한 권서준 작가의 태도.

그러나 공동 연출을 맡고 있는 정 피디로서는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저기 오네요.”

권서준의 말에 정 피디가 고개를 돌린다.

마침 촬영장에 도착한 차 한 대.

권서준의 말대로 이경민의 차였다.

“...”

정 피디는 눈을 크게 뜬 채 믿기지 않는 듯 가만히 바라본다.

차에서 내린 이경민은 이내 급히 다가와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 감독님.”

죄송하긴, 솔직히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이제 막 촬영 시작하려고 했거든요.”

“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어제와 분명 다른 눈빛이었다.

연기에 임하는 자세도 확연히 달랐다.

잠시 뒤,

올란 감독의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된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어제 촬영하다가 멈춘 장면에서 재촬영이 들어간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차분한 말투와 무심한 눈빛.

어제의 윤정호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동자가 헐렁이는 바짓단을 흔들며 원망 어린 목소리로 답한다.

“사, 상무님.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이게 다 문제 있는 기계 때문이었다고요! 그럼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억울함에 노동자가 윤정호의 옷깃을 잡는다.

“아니, 이게 어디서 더러운 손을...”

윤정호는 노동자를 툭 밀쳐내더니 세게 한 번 걷어찬다.

그리고는 이내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가만히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그만둬. 왜 돈 벌고 싶어서 기어들어 와 놓고 내 탓 하는 건데? 지 다리 지가 간수 못하고 왜 나한테 지랄인 건데?”

터트리는 게 아니라 매섭게 노려보면서 안으로 삼키는 분노.

화면에 담기는 표정은 차가웠다.

불필요한 손동작과 몸짓은 사라지고,

카메라에 담기는 이미지에 온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더없이 담백하고 간결한 연기.

그런데 오히려 소리쳤을 때보다 서늘하고, 그래서 더 무섭게 다가온다.

‘미쳤다...’

눈빛에서 서늘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덕분에 카메라 렌즈에 윤정호의 비열함과 잔인함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 연기력에 놀란 걸까?

“...”

노동자 역할을 맡은 조연 배우도 겁에 질린 눈빛으로 올려다 볼뿐이었다.

“컷.”

그때,

올란 감독의 외침이 들린다.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

그러나 이어진 말을 조금 달랐다.

“오케이.”

‘다시’가 아닌 ‘오케이’.

그 두 단어가 가진 의미는 달랐다.

어안이 벙벙한 촬영 스태프들.

그러자 올란 감독이 입을 연다.

“뭐해? 다음 씬 안 찍고?”

“네? 아, 네.”

스태프들이 당황할 정도의 온도 차였다.

그건 지켜보는 정 피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대체...’

놀란 정 피디는 고개를 돌려 권서준을 바라본다.

권서준은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치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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